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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예쁘기만 한 ‘껍데기’는 가라

디자인으로 경영을 혁신하라

정임수,문권모 | 11호 (2008년 6월 Issue 2)
 
디자인 경영이 화두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일부 선도적 기업은 디자인 경영으로 날개를 달았지만 아직까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기업도 많습니다. 디자인 경영 매뉴얼 업데이트를 위해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경험과 융합, 소통이란 세가지 최신 트렌드와 이론적 배경, 한국 기업의 성공 사례, 디자인 구루와의 대담 등을 전해드립니다. 또 세계적 디자인컨설팅사 IDEO의 팀 브라운 CEO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6월호에 실은 논문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문권모·정임수 기자 dbr@donga.com
도움말 이안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ahnjlee@seri.org
 
기업 경영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구문(舊聞)’이 됐다. 경쟁 격화와 기술 평준화, 소비자 욕구 변화 속에서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전통적 비즈니스 방법론만으로 시장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영자들은 대부분 잘 알고 있다. 소비자들은 오래 전부터 품질이 아닌 디자인을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디자인 경영을 실천해야 할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 디자인 경영과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혁신을 이뤄낸 기업들의 최신 사례를 통해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사점을 찾아본다.
 
고유의 디자인 정체성 구축해야
한때 MP3 플레이어 부문에서 세계 1위 업체였다가 애플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은 레인콤 양덕준 사장은 일본에서 한 당돌한 고등학생에게 질타를 받았다. 2005년 도쿄 시부야의 매장 개막 행사에 참석한 한 학생이 양 사장에게 버럭 화를 낸 것이다. “당신들 제품(아이리버) 자체에 훌륭한 매력이 있는데 왜 자꾸 애플 아이팟(iPod)을 흉내내려 하느냐”고 따졌다.
 
양 사장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이팟을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짝퉁이나 다름없는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점유율 경쟁에만 매몰돼 아이리버다운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다”며 후회했다. 이후 양 사장은 다시 아이리버만의 특징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이후 디자인 정체성을 회복하자, 적자에 시달리던 레인콤은 지난해 흑자전환에 이어 올해에도 실적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레인콤 사례는 기업의 디자인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일관성 있는 제품 디자인은 소비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해당 브랜드를 알아보게 하며, 고객 충성도를 높여준다.
 
몇 년 전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이 문자입력 방식 등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를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정부 의견에 반대한 적이 있다. 각사 고유의 디자인이 고객을 잡아두는(lock-in)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정 문자 입력 방식에 익숙하거나, 특정 디자인 컨셉트를 좋아하는 소비자는 재구매 시 동일한 방식의 제품을 선호한다.
 
또 디자인 정체성은 기업이 고객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철학을 의식과 무의식적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일을 한다. 소니는 작고 가벼우며 심플한 소니 스타일이란 일관된 이미지를 모든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미국의 유통업체 타깃(Target)은 매장과 종업원의 복장, 전단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디자인 컨셉트를 유지하고 있다.
 
디자인 정체성을 중시하는 기업은 별도의 관리감독 기구를 설치해 운영하기도 한다. IBM은 1990년대부터 ‘기업 아이덴티티 & 디자인’ 부서를 설치해 제품, 포장, 카탈로그, 매뉴얼, 건물디자인 등 기업과 관련한 모든 디자인을 관리하고 있다.
 
트렌드를 앞서가는 선행 디자인이 핵심
미래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앞날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2008년 국제가전전시회(CES)에서 혁신대상을 받은 슈팅스타폰을 기획한 팬택계열 디자인기획팀의 홍주영 수석연구원은 “환경 변화가 심하고 제품의 수명주기가 짧아지는 상황에서 현재 고객 니즈만 조사·분석하면 어느 순간 뒤처지게 된다”며 “근미래(近未來)적 사고를 갖고 적어도 2∼3년 정도 트렌드를 앞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래 디자인을 연구하면 제품 차별화는 물론이고 기술 개발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팬택계열 SKY가 업계 최초로 시도해 선풍을 일으킨 슬라이드폰과 하얀 휴대전화 색상은 모두 선행연구를 통해 나왔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역시 상품의 디자인과 컨셉트를 먼저 정하고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선(先) 디자인, 후(後) 개발’ 전략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또 ‘디자인 뱅크’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활용해 혁신적 제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행디자인을 모두 ‘뱅크 시스템’에 저장해 놓았다가 정기적으로 활용가능 여부를 검토하면 앞선 디자인의 제품을 순발력 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삼성의 첫 텐밀리언셀러인 이건희폰(T100)에서부터 최근의 보르도TV에 이르기까지 많은 디자인 혁신 제품이 이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LG전자는 지난해 ‘디자인경쟁력 강화 4대 방안’의 첫째 방안으로 디자인이 기술의 개발방향을 리드하는 선행디자인 프로세스를 강화하기로 했다.
디자인을 통한 혁신 체제 구축해야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도구이기도 하다. 선도 기업들 사이에서는 디자인을 기업 혁신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러 기업이 디자인 리서치를 기반으로 기업의 장기 전략을 짜거나 운영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있다.
 
아이디오(IDEO) 등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회사들은 이런 기업들의 노력을 도와주고 있다. 이들은 심리학, 생물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팀을 구성해 소비자를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한 후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디자인 트렌드와 소비자 인사이트를 찾아낸다.
 
국내 금융회사 중 디자인 경영을 가장 성공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평가받는 현대카드는 아이디오와의 협력을 통해 회사의 장기 전략을 세우고 운영 시스템도 개선했다.
 
현대카드의 의뢰를 받은 아이디오는 먼저 한국 소비자에 대한 관찰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일과 놀이’, ‘휴식(time-out) 필요’ 등 한국 문화의 7가지 키워드가 도출됐다. 두 회사는 이 키워드를 기반으로 다시 카드 이용자의 구체적인 사용 행태를 찾아냈고, 최종적으로 20가지의 디자인 및 전략 가이드를 뽑아냈다. 도원석 현대카드 홍보팀장은 이에 대해 “흔히 현대카드의 성공 원인을 ‘예쁜 디자인’으로 돌리는데, 그보다는 철저한 과학적 조사의 실시를 바탕으로 했기에 ‘티파니 박스 속의 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현대카드가 1차적으로 실행한 전략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용카드를 지갑에 꽂았을 때 회사 이름이 포켓 위로 올라와 보이게끔 한 디자인. 이것은 여러 종류의 신용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니지만, 습관적으로 한 가지 카드만 쓰는 한국인의 사용 행태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는 이에 대해 “지갑 안의 다른 ‘애첩(카드)’들을 제치고 눈에 띄어야만 주인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카드 모양이 눈에 띄게 예뻐야 습관적 사용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경쟁사들은 서둘러 현대카드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현대카드는 최근 두께가 1㎜도 안 되는 신용카드 테두리를 오렌지색으로 칠해 더욱 눈에 띄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아래 그림 참조)
 
디자인을 획기적으로 바꾼 요금청구서도 고객의 니즈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한 사례다. 현대카드가 소비자 이용행태를 조사할 때 “카드 청구서에서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총 사용금액이 얼마인가다. 그런데 보통 총액은 세부내역 아래에 작은 글씨로 나와 찾기가 불편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회사는 즉시 총 사용금액을 큰 글씨로 표시하고 세부 내역은 뒷면에 정리한 새로운 청구서 개발에 착수했다.

현대카드는 이 과정에 회사의 업무 시스템을 디자인에 맞춰 바꾸는 혁신을 추진했다. 새 카드 청구서의 내용을 입력하려면 담당 부서 직원들이 세로로 세워서 쓰던 모니터를 가로로 누이고, 항목별 입력값의 위치를 다시 프로그래밍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업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디자인 기능을 접목하거나, 디자인과 다른 분야의 협력을 강조하는 기업들도 많다. LG전자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디자인을 주축으로 상품기획과 설계, 마케팅 등 관련부서가 협업 팀을 구성해 고객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을 추진중이다. 미국의 프린터 제조업체 렉스마크의 경우 디자이너가 제품의 모양을 만들 때 엔지니어가 해당 제품의 표면처리 등을 동시에 연구하는 통합 시스템을 운영한다.
 
외부 디자인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
내부인력뿐만 아니라 외부의 디자인 자원을 활용해 성공적인 디자인 경영을 펼치는 기업도 많다. 외부 자원의 활용은 기업의 디자인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막는 동시에 다양한 시각과 아이디어를 내부로 가져오는 장점을 지닌다.
 
이탈리아의 생활용품 브랜드 알레시(Alessi)는 자체 디자이너 없이 외부 디자이너들과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는 동시에 200여 명의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디자인의 대가를 초청해 일정 기간 ‘마스터(master)’가 되게 한다. 디자인 마스터는 자신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이기도 하며, 여러 회사와의 컨소시엄을 이끌 때도 있다. 따라서 알레시의 제품은 일정 기간별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가지며, 적어도 4∼5년마다 기업의 디자인이 변신을 거듭한다.
 
한때 파산 위기에 몰렸던 스포츠 브랜드 푸마는 1990년대 중반 질 샌더(독일), 줄리 벳(프랑스), 미하라 야스히로(일본)와 같은 외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자사의 스포츠용품을 ‘패션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푸마는 이후 높은 성장을 거듭했고, 지난해에는 2억6900만 유로의 순이익을 냈다.


디자인 명가로 평가받는 덴마크의 오디오 전문기업 B&O도 대부분의 제품을 계약관계에 있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활용해 디자인한다.
 
지난해 대한민국디자인대상 대통령상을 받은 웅진코웨이는 필요 업무에 따라 외부 인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한다. 일반적인 제품 디자인 업무는 거의 내부 인력이 해결하지만, 해외시장 공략과 선행디자인 등 전략적 디자인은 외부에 맡기는 식이다. 이 회사는 해외 시장 공략과 관련해서는 아이디오(미국), 탠저린(영국), 허스(일본) 등의 글로벌 디자인 업체와 공동으로 외국 문화와 소비트렌드를 연구하고 있다. 선행디자인 작업은 주로 외주업체와 TFT를 구성해 내부 인력의 업무로드를 줄인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래미안 아파트의 주거형태와 조명 배치, 조경 등과 관련해 이돈태 탠저린 한국사무소 대표를 디자인 고문으로 위촉해 조언을 받고 있다. 이 대표는 탠저린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삼성물산에 출근해 조언과 프로젝트 점검을 한다.
 
CEO의 역할도 중요
디자인 경영이 높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난 디자인 안목과 강력한 의지를 가진 CEO가 있어야 한다.
 
앨런 래플리 P&G 회장은 2000년 취임과 동시에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는 와중에도 디자이너의 수를 4배로 늘렸다. ‘디자인 사고’의 확산은 히트제품의 양산으로 이어졌고, 성장이 정체되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던 P&G는 다시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디자인 경영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CEO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디자인은 21세기 최후의 승부처”라는 말을 늘 강조했으며, 구본무 LG 회장은 “고객의 생각보다 한 발 앞서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출하라”고 주문했다.
 
중소기업이지만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루펜리의 이희자 사장은 디자인 경영으로 설립 5년 만에 회사를 음식물처리기 시장 점유율 90%의 ‘작은 거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회사 제품은 ‘쓰레기통’과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물건이란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깜찍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 사장은 고정관념을 깨는 참신한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시장조사에 나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1월 이 사장에게 ‘디자이너가 주는 CEO상’을 준 디자이너협회는 “아무리 훌륭하고 특이한 디자인이라도 CEO가 재가를 하지 않아 사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 사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 혁신적인 디자인을 개발한다는 점에서 모범이 된다”고 밝혔다.
 
이안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디자인에 대한 CEO의 의지가 확고해야 조직과 실무자들이 디자인 마인드를 가지게 된다”며 “CEO의 의지는 개발이나 마케팅 등 다른 부서의 ‘태클’로부터 디자인 아이디어를 보호해 창의적 혁신을 돕는 구실도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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