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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컴퓨터의 미래

나준호 | 10호 (2008년 6월 Issue 1)
1981년 IBM이 PC를 선보인 이래 컴퓨터는 인간의 삶과 산업 전반을 크게 변화시키며 대표적인 하이테크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컴퓨터 산업은 2000년대 들어 기존 기술 패러다임의 한계 봉착, 시장 성장성 둔화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었다. 컴퓨터 산업의 ‘원조’인 IBM이 PC 사업부를 중국 레노보에 매각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제 컴퓨터는 단순한 범용품으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 컴퓨터 기술의 진화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컴퓨터 기술의 사회적 파급력은 점점 약화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최근 세계적으로 새로운 컴퓨터 기술의 진화 방향성이 나타나면서 터널 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입는(wearable) 컴퓨터나 광(光)컴퓨터 등 오랜 기간 기술적 지향점으로만 존재하던 개념들이 속속 현실화하고 있다. 또 사회적 가치 중심의 컴퓨팅이나 산업 특화 컴퓨터 등 새로운 미래상이 정립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2020년의 컴퓨터는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까? 최근 산업계의 다양한 논의를 종합해볼 때 컴퓨터의 미래상은 크게 형태, 용도, 기반기술의 면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컴퓨터가 사물 및 인간과 결합하며 이 과정에 컴퓨터의 형태는 지금과 판이하게 변화할 것이다. 둘째, 컴퓨터는 새로운 과학과 창조의 도구가 될 것이다. 컴퓨터가 생활과 업무의 보조 수단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과 생활양식을 창출하는 핵심 수단으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컴퓨터를 정의한 반도체 및 전자의 기술 패러다임이 무너질 것이다. 현재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컴퓨터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반기술의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사물 및 인간과 결합한다
2020년까지 전개될 컴퓨터 산업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는 수십 명이 1대의 컴퓨터를 공동으로 이용한 메인프레임 시대였다. 1980년 이후에는 한 사람이 1대의 컴퓨터를 이용하는 PC 시대가 열렸다. 2000년대는 한 사람이 여러 장소에서 여러 대의 컴퓨터를 이용하는 모바일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20년경에는 한 사람이 수백 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무르익을 것으로 예상된다.

< MS의 차세대 PC 디자인전에 출품된 컨셉트 디자인 사례>
1. The Cup: 컵처럼 쉬운  사용법을 강조한 PC
2. Heartfarer: GPS에 의한 멀티미디어 송수신 기능
3. DNA: 개인 취향대로 구성 가능한 모듈러 PC
4. Backpacker’s Diary PC:다이어리의 외관으로 기능별페이지를 구매해 구성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온 세상에 두루 존재한다는 의미다. 즉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에는 다양한 사물에 컴퓨터가 내장되고,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사물에 부여되는 컴퓨팅 능력은 제품의 특성이나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처럼 소형 컴퓨터와 비슷하게 발전하는 제품도 있겠지만, 인공지능 세탁기처럼 본래 용도를 유지하되 편의성만 좀더 개선되는 것도 많을 것이다.
 
미래의 컴퓨터는 이렇게 여러 가지 사물과 결합하면서 지금의 박스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MS)가 시판한 서피스(Surface) 컴퓨터는 탁자를 닮았다. 또 미국의 벤처회사 플라이펜탑(Flypentop)이 2006년 내놓은 교육용 컴퓨터는 펜 모양이다. 올해 MS가 주최한 차세대 PC 디자인전(www.nextgendesigncomp.com)에는 컵, 냅킨, 다이어리 형태의 컴퓨터까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앞으로는 시계, 액세서리, 헬멧은 물론 심지어 옷처럼 생겨 몸에 걸치거나 부착하는 웨어러블 컴퓨터도 많이 개발될 것이다.
 
이런 변화에 따라 일반 소비자 영역에서 미래 컴퓨터의 진화 방향성과 경쟁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2000년대 이전에는 PC의 고성능화, 표준화, 생산비용 절감이 산업계의 최우선 목표였다. 중앙처리장치(CPU) 속도 경쟁은 이런 시대의 유산이다. 이후 모바일 시대가 되자 소형화, 저전력화, 새로운 모바일 사용 환경의 개발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됐다. 인텔이 저전력 CPU 개발로 방향을 튼 것도, 애플이 득세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2020년대의 유비쿼터스 시대에는 만물의 지능화와 상호 연결이 기업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기업들은 크게 세가지 영역에서 경쟁을 벌일 것이다. △시장에서 먹히는 컴퓨팅 사물 설계를 선점하려는 지배적 디자인 경쟁, △컴퓨팅 사물의 공통 부품과 소프트웨어 기반을 장악하려는 표준 경쟁, △디지털 사물 생태계를 활용한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해 ‘제2의 구글’이 되려는 경쟁이 그것이다.    
 
컴퓨터가 새로운 과학 및 창조의 도구가 된다
2020년경 컴퓨터의 또 다른 발전 방향은 컴퓨팅 능력의 극대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컴퓨터의 연산능력 강화는 전문 영역을 대상으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기상 예측 등에 쓰이는 슈퍼컴퓨터는 현재 페타(peta) 컴퓨팅 시대에 접어들었다. 페타란 1초에 10의 15승, 즉 1000조 번의 연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2018년에는 그 다음 단계인 엑사(exa, 10의 18승, 즉 100경 번의 연산) 컴퓨팅 시대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천문학적인 슈퍼 컴퓨팅 능력은 왜 필요할까? 컴퓨팅 능력의 강화는 무엇보다도 바이오, 지구·우주, 에너지 등 첨단 과학혁명의 제반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다. MS가 2006년 발간한 ‘2020년의 과학을 향해(Toward 2020 Science)’라는 보고서는 과거 미적분학이나 전자현미경이 새로운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미래에는 초고성능 컴퓨터가 새로운 과학혁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구생태계, 시스템 생물학, 국제 전염병의 전파 시뮬레이션, 신약 개발, 우주의 이해, 미래 에너지 등 다양한 첨단 연구 주제의 해결에 극한의 컴퓨팅 능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설명이다.
 
물론 컴퓨팅 능력의 향상에 상업적인 목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련 기업들은 범용화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PC 중심의 시장구도를 벗어나, 첨단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고수익 신시장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인텔이 페타급 연산 컴퓨팅을 강화하고 바이오 분야를 연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BM이 소니와 함께 병렬형 컴퓨팅에 최적화한 셀(Cell) 프로세서를 개발한 이유도 새로운 블루오션인 슈퍼 컴퓨팅 시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컴퓨팅 능력의 극대화는 일반인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컴퓨팅 능력의 고도화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컴퓨터의 용도 도 크게 확장할 것이다. 1990년대만 해도 일반용 컴퓨터는 생활 및 업무의 보조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생활의 비중이 커지면서 컴퓨터는 그 자체로 여가, 쇼핑, 금융, 교육, 친교 등 생활과 업무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선 미래의 컴퓨터는 본격적인 창조의 도구로 탈바꿈할 것이다. 예술, 교육, 놀이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들이 독자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개발, 배포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고도화하고 일반화할 것이란 의미다. 현재 손수제작물(UCC)의 약점은 조악한 품질이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쉽게 스튜디오 수준의 동영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용자 니즈는 더욱 커질 것이다. 3차원 게임을 스튜디오 삼아 동영상을 만드는 머시니마(Machinima)는 이런 필요의 반영이다. 창조 관련 니즈의 충족을 위해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레고 스타일(조립식)의 고품질 개발도구가 개발·공급될 것이며, 이런 도구의 원활한 구동을 위해서는 더욱 강화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해질 것이다.
 
기업의 업무용 컴퓨터도 한층 창조적인 방향으로 역할을 바꿔나갈 전망이다. 업무용 컴퓨터는 전략 수립 및 미래 예측의 도구로 변화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물류, 금융,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데이터 분석에 기반을 둔 전략 수립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명 받고 있다. 1∼2년 전 서구에서 ‘Super Cruncher’나 ‘Competing on Analytics’ 같은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이런 추세를 잘 보여준다. 향후에는 미래 예측에도 컴퓨터가 활용될 것이다. 현재 증권가에서 이용하는 각종 기술적 분석이나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들은 미래 예측의 초보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반도체·전자 패러다임’이 무너진다
현재 컴퓨터의 기술적 기반은 실리콘 반도체, 근본적으로는 전자 기술이다. 모든 데이터를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바꾸어 전자의 이동을 통해 반도체에 기록, 연산하는 방식이란 말이다. 물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기존 패러다임 하의 기술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반도체 기술은 서서히 공정 미세화의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컴퓨터의 진화방향(사물과의 결합, 컴퓨팅 능력의 극대화)을 현실화하려면 기술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실리콘 기반의 반도체는 무엇보다 휘거나 구부릴 수 없어 웨어러블 컴퓨터에 이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업계에서는 대안으로 유기체 방식의 플렉서블(flexible) 또는 플라스틱 반도체를 개발중이다.
 
또 기존의 복잡한 회로 설계 방식으로는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요구하는 초저원가 반도체를 대량생산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은 아예 회로를 인쇄해 버리는 형태의 프린티드(printed) 반도체를 RFID와 차세대 반도체, 디스플레이용으로 활발하게 연구중이다. 프린티드 반도체 방식을 본격 도입하면 RFID는 대량 생산을 위한 장애물인 ‘개당 5센트의 벽’을 깰 수 있을 것이다.
 
극한 컴퓨팅의 세계에 전자기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패러다임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이다. 소재의 저항 문제나 이진법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광자, 분자, 양자 등 다양한 대안 패러다임이 계속 연구되고 있다.
 
광자 컴퓨팅에서는 회로 구성상 저항이 많은 구리선 대신 유리섬유를 써서 전달 속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또 데이터 저장에 있어서도 홀로그램 형태로 3차원 저장이 가능해 테라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기술은 이미 HDDS(Hologram Digital Data Storage) 형태로 상용화가 시작됐다.

 
분자나 양자는 전자의 이진법적 한계를 극복하는 개념이다. 분자 컴퓨팅에서는 나노기술을 이용해 먼지처럼 작은 분자 회로를 구성할 수 있고, 양자 컴퓨팅에서는 양자의 특징인 불확정성을 이용해 동시에 수십 번의 연산을 수행하고 컴퓨터의 크기를 극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분자 및 양자 컴퓨팅의 상용화는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이처럼 반도체·전자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미래 컴퓨팅의 세계에서 기업은 다음 두 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차세대 기반 기술 확보 및 사실상의 표준 장악이다. 이를 위해 기업은 연구 단계에서의 성과를 미리 확보해야 하며, 한국의 경우 선진국과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정책 지원도 필요하다.
 
둘째, 미래기술의 현실적 적용처를 확보해야 한다. 기반 기술 확보만으로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끌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이익을 중시하는 기업으로서는 신기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사업 지속성 확보가 가능하다. 따라서 기업은 기술적 불완전성과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초기 수요를 충족해줄 니치 마켓을 찾아 적합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HDDS가 방송국용 동영상 스토리지를, 양자 기술이 군사용 데이터 암호화 등을 초기 시장으로 삼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의 인텔, MS는 산업 경계에서 나온다
과거 PC 시대에는 PC 플랫폼의 표준을 사실상 확보한 인텔과 MS가 시장을 지배했다. 2000년대 웹 2.0과 모바일 시대에는 인터넷 플랫폼을 사실상 장악하고, 새로운 사용자 경험 창출에 성공한 구글과 애플이 승자 기업이 됐다.
 
그렇다면 미래 컴퓨터 산업에서는 어떤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2020년에는 산업간 융합의 플랫폼과 새로운 사회적·인간적 가치의 창출에 성공한 기업이 새로운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컴퓨팅 능력의 극대화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보편화하는 미래에는 산업간 융합을 통해 새로운 산업이 나타날 것이다. 컴퓨터와 자동차가 만나 새로운 자동차 부품 산업이 만들어지고, 컴퓨터와 생물학이 만나 디지털 생물학과 바이오 신약 산업이 형성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산업간 융합에 있어 컴퓨팅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며, 컴퓨팅 능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플랫폼과 지배적 디자인을 창출하는 기업이 세계 경제의 새로운 승자가 될 것이다. MS가 로봇 플랫폼 사업에 공을 들이고, IBM이 서비스 사이언스 분야를 강화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2020년대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사물 생태계가 공존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소비자 니즈와 가치관, 윤리의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컴퓨터-사물 네트워크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소비자 가치, 근원적으로는 새로운 인간 가치에 부응하는 기업이 승기를 잡을 것이다.
 
대만의 아수스텍이 최근 300달러대의 초저가 노트북 PC를 통해 급부상한 것은 이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회사는 선진국과 저개발국 간의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evide) 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인간 가치에 주목해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움켜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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