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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上

속도 조절과 브랜드 관리로 베토벤, 음악을 독립시키다

김혜옥 | 109호 (2012년 7월 Issue 2)








1793, 비엔나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이는 홀로 분을 삭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나타, 협주곡, 교향곡 등 배워야 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조그마한 관심조차 베풀어주지 않았다. 당대 음악계의 원로였던 스승은 연일 계속되는 연주 스케줄과 후원자들과의 교제에 바빴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는 자신의 사부를 제쳐두고 다른 선생들을 기웃거리며 지휘법 레슨을 청강하고 성악 작곡법을 지도받기에 이른다. 불과 1년 전 자신을음악의 수도로 이끌었던 스승은 이제불성실한 노인, 의뭉스러운 영감으로 비하되는 대상이 되고 만다. 여기서 젊은이는 신출내기 작곡가로 데뷔하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고 스승은 모차르트, 살리에리에게 공히 존경받던 명인 하이든(Haydn)이었다.

 

시간이 지나 베토벤이 한참 비엔나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을 1806년의 일이다. 당시 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대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어느 날 베토벤의 강력한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프랑스 외교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당대 최고의 명인에게 작품을 들려주십사 청원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베토벤은 강하게 거절하며 공작을 세게 노려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주변의 귀족들이선생님에게 공작의 체면을 보아 한번만 연주해달라고 부탁해도 베토벤은 타협하지 않았다. 천재 작곡가의 자부심과 자기애를 볼 수 있는 일화다.

 

만약 베토벤이 하이든이나 리히노프스키에게 충실한 제자와 친구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교향곡 5번이나 오페라 피델리오처럼 변혁적인 작품들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No’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베토벤을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그의 반골 성향이 그를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카핑 베토벤(Copying Bethoven, 2006)’에서 표현됐던 것처럼 지나칠 만큼의 자유로운 영혼과 자기애적 요소가 창의성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라는 관점이다.1

 

그러나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토벤의 삶은 여러 가지 역설(Paradox)과 입체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한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원숙한 청년 예술가 대접을 받는가 하면 노년에는 작품의 잔금을 치르지 못하는 귀족들에게 소송까지 걸어 받아내고야 마는 괴짜 작곡가의 면모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음악의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블랙박스의 내용을천재성이라고 결론짓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뿐일까?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천재는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신뢰’와매력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서부 독일에 위치한 영방 국가(선제후(選帝侯)가 다스리는 곳으로 19세기 초까지 독일은 수십여 개의 영방으로 분리돼 있었다) 중 하나인 본 지역에서 태어났다. ‘(Van)’은 원래 네덜란드 귀족 가문의 남자에게 붙는 표현이다. 독일어로(Von)’,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의(De)’ 또는에 해당하는 수식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비교적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귀한 핏줄에 속했던 베토벤의 출신 성분이 훗날의 독자적이고 올곧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대 당시 베토벤의 집안은 이미 몰락해 있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궁정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결국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비상한 계기를 잡는 것이 절실했다. 흔히 베토벤의 평전이나 그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에서불행한 유년기’ ‘암담했던 시기에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음악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삶을 사료에 입각해서 추정해 나가는 이들은 조금 견해가 다르다. 사회학자이자 음악학자인 티아 드노라(Tia Denora)는 베토벤을 가리켜진지하고 사고가 싶은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고관이 칭송받던 시절이 지나가고 깊은 사유와 고민을 통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진지한 예술을 할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인간을 원했던 것이다.2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트렌드에 가장 부합하는, 신뢰성 있고 매력적인 인재였다. 베토벤은 친구였던 의사 베겔러의 소개를 받아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가문의 식객으로 초청받았다. 여기서 베토벤은 적은 급료를 받고도 성심 성의껏 자녀들을 지도했고 세심한 테크닉까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폰 브로이닝 가문 사람들은 젊은이의 태도에 반해버렸다. 단순히 기량 있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사람이 됐다고 평가받은 셈이다.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 가문으로부터 교육 지원과 함께 생계를 감당할 수 있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으며 연주 기회도 제공받았다. 부유했던 이 집안은 당시 중서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왕족이었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 테레지아(Marie Theresia)의 아들인 막시밀리안(Maximilian)에게까지 베토벤을 소개했다. 궁중이나 지역 제후의 가문에 소속된 예술가만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시기에야인베토벤에 대한 지원은 거의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마케팅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반 덴 불트(Chrostoph Van den Bulte) 교수도 비슷한 논지를 남긴 바 있다. ‘연결망의 허브(Hub)’에 위치한 사람과 가치를 교환할 때에 비로소 네트워크의 덕을 보게 된다는 요지다.3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발판을 마련하다

 

그러나 매력 발산 한 가지만으로 작곡가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훌륭한 음악가는 넘쳐났다. 명망가들의살롱가족 음악회에서 수많은 예술 영재들이 기량을 겨루고 있었다. 계속되는 국가 간의 갈등과 국지전으로 경제기반이 약화돼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귀족들은 저마다 취미를 과시할 수 있는 연주회와 모임을 만들었다. 1780년대 후반의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 가문의 소개를 받아 자신의 대표적인 피아노 소나타(Sonata)를 헌정할 주인공을 만났다. 바로 발트슈타인(Waldstein) 백작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척으로 비엔나에서 본으로 파견됐던 이 젊은 귀족은재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에게 후원을 했고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했다. 후원 결정을 한 이유는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영재의 재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의 작곡가들과 달리 발트슈타인이 베토벤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취향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까웠다. 명문 귀족으로서 그 이름을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고 사회가 주목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길 원했던 것이다. 음악사학자 줄리아 무어는 베토벤이 귀족들과 대화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고 지적한다. 비록 동시대의 예술가였던 괴테, 브렌타노처럼 고등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수사학, 문학과 같은 분야에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용어와 맥락을 꾸준히 학습하고 읽어낼 만큼 성실하고 명석하다는 증거였다. 플라톤(Plato)을 주제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논할 수 있었고 라틴어 시구를 인용하면서 인문정신을 피력할 수 있었던백작의 친구는 작품마다 후원자의 이름을 붙이며 특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변방이 아니라 주류 문화계를 선도하는 천재상을 원했던 발트슈타인은모차르트의 음악을 하이든의 손에 담아 자네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네4 라고 말하며 애석하지만가장 소중한 친구를 비엔나로 보내는 데까지 일조했다.

 

베토벤은 작품의 의도를 언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고 있었다. 유년기의 그가 처음 사사했던 오르가니스트 네페(Neffe)는 유난히 소통을 강조했다. 베토벤의 10대에 만들어진 첫 작품 키보드변주곡집(WoO 63)과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선제후(Elector)’는 초연 때부터 궁중에 헌정됐다. 작곡가들은 외부에 곡을 선보이기 전에 계약주의 궁정이나 관청에서 시연을 통해 점검을 받았다.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곡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계약주가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은 거의 무시당하거나 대가를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버려지기도 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새롭게 설명할 능력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타인의 검증을 받은 감성을 일반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결국 베토벤은 단순히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을 후원자들에게 제대로 셀링(selling)하고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코드(code)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던 셈이다.

 

당시 작품의 생산 구조와 비교해 보면 분석력이나 언어 구사 면에서 탁월했던 베토벤은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당시 베토벤의 선배였던 모차르트는매우 신선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작곡가로 낙인 찍히곤 했다. 왕실의 인증과 탁월한 경력으로 명사가 됐던 살리에리는 이미 식상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장이 냉정하게 비평(Critic)을 통해 창작의 가치를 재단하고 계약주가 특유의 감식안으로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던 시기에 베토벤은그들의 언어’로 작품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을 비롯해 그의 후원자 친구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매력이라 불렀다.

 

속도 조절의 미학

 

후원자들은 23세 이후의 베토벤에게 프로젝트나 활동을 사실상 백지 위임했다. 발트슈타인의 소개로 비엔나의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문객으로 살롱에 들어간 베토벤은 어린 나이에 평균 이상의 급료를 제시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에 베토벤이 받았던 연봉은 600플로린가량인데 이는 궁중에서 활동하는 카펠마이스터(지휘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공작은 서자 문제로 인한 부인과의 갈등 등 복잡한 가정사에도 꾸준히 베토벤을 지원하려고 애썼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금요일 아침 음악회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꾸준히 친구들을 모아 베토벤을 소개시켜줬고기사 협회를 결성해서 베토벤의 소중한 작품들을 컬렉션으로 표집해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다.5  공작은 러시아의 압제하에 있던 폴란드에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보편적인 예술을 통해 유럽 전역을 풍미할 것이라 기대되는 베토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자만하거나 자신을 과시했다면 장기적으로 이런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분석한다. 베토벤은속도조절에 능했다. 빠른 출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할 만큼 그는 현명했다.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고 영향력을 입증받았다고 해서 금세 대작(大作)의 길로 이행하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1790년대에 비엔나의 명망가들이 개최하는 살롱에서 자주 초청받던 연주자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도 베토벤은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다녔다. 이미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었지만 기꺼이 학생이 됐다. 아직 하이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792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슈판치히(Schuppanzigh)가 이끄는 4중주단에 들어가 청강생으로서 기악 연주법을 배웠다. 또 권위 있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하이든의 친구였던 알브레히츠베르거(Albrechtsberger)에게 대위법(Counterpoint)을 배우면서 큰 흐름으로 작품의 철학을 표현할 줄 아는 자세를 체득했다. 훗날 베토벤은 알브레히츠베르거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인내, 성실, 불굴의 자세, 그리고 내면의 진지성에 호소하는 작업이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6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의 포지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알았다. 왕족이나 명문가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금세카펠마이스터(kappelmeister)’가 되려고 단꿈을 꾸는 이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젊은 베토벤은충실한 건반 연주자이자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다. 출판 시장에서도 그의 피아노 소곡집들이나 트리오들은 절찬리에 판매됐다. 출판업계가 작곡가의 노고를 좀체 인정하지 않던 시절에 보기 드문 대접이었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공개 연주는 대부분 바흐를 비롯해 지나간 시대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을 선보이거나 자신이 신중하게 고른 작품 중 일부를 시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795년이 돼서야 기사협회의 후원을 받아 자신을 후원한 명문 귀족들의 친구로서 피아노 콘체르토를 대중에게 선보인다. 그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했거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결국 진가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의 패러다임이진지한 음악과 진지한 천재를 점점 원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그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으로 청중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베토벤의 속도조절 전략은 작품의 타깃 설정 과정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작곡가들이 듣기 쉬운 음악을 지향했다면 1790∼1800년대 초반 문화계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청중들끼리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즐기는 장르를 선호했다. 실제로 베토벤은 음악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파했다. 고트프리트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과 로보코비츠(Von Lobkowitz) 공작이 대표적인 청자였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서 계몽주의 철학과 진지한 고민을 강조하는 북독일 철학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괴테를 비롯해 독일어권의 청중은 원숙한 천재의 등장을 원했다. 베토벤은 이들의 취향을 집중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내놓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략은 많은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설득력을 얻는 데 공헌했다. 1800년이 되자 남독일의 시골에서 이사한 천재 작곡가는 비엔나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예술가의 철학을 필요로 하는 시대

 

조직경제학을 연구하는 피에르 아출라이 MIT 교수는 천재의 영향력에 대해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영재 과학자가 죽게 되면 작업을 함께하던 연구자의 논문 생산성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당사자와 관련 없는 다른 이들의 연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천재가 죽으면 친구의 친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가장 큰 영향인자는 죽은 이의 풍부한 자금이나 인맥이 아니라 연구의 저간에 흐르는 철학적 문제였다.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사상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베토벤에게는 지나간 시대의 빈자리가 일종의 기회였다. 과거의 스타들은 저마다 커다란 빈자리를 만들고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교향곡과 협주곡 분야에서 새로운 금자탑을 쌓았지만 자신의 작곡법을 이론으로 체계화해서 설파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신의 음악이 당대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제대로 청중을 설득하기 전에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음악계에 던졌던 여러 실험적인 작품들이 이렇다 할 만한 해석 기준이나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디터스도르프(Dietersdorff)를 비롯해 다른 작곡가들도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모차르트가 제시했던 혁신 코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정의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시대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터키 전쟁이 일어났고 인플레이션으로 작곡가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안정적으로 기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베토벤의 사부들도 뚜렷한 입장을 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이든은 한참 런던과 비엔나를 오가며 자신의 오라토리오 작품 흥행에 몰두했다. 훗날 베토벤이 그를 회고했을 때처럼 하이든의 교향곡들은 주제가 다르고 진행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 대부분의 동기 표현이나 악상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살리에리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1800년대 이후부터 말년까지는 거의 제자 양성이나 교회음악계에 봉사하기 위한 작품을 썼다. 결국 베토벤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지나간 시대의 패러다임이 밝고 경쾌하고 듣기 쉬운 음악이었다면 앞으로는 어떤 작품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그가 가진 본연의 성품이 중요한 실마리가 됐다. 그는 항상 큰 스케일의 작업을 거쳐서 악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일종의숙고주의(Deliberation)’인 셈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표현 이상으로 거대한 모티브를 중시했다. 우선 한번 완성한 다음에 여러 차례에 걸쳐 부분을 수정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악장 전체를 새로 작곡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청중들도 큰 차원의 스케일에서 완결 구조를 가지려는 작곡 방법에 동감을 표했다. 확실히 그의 구상은 실험적이었다. 과거 작품들이 모듈화된 부분을 반복하면서 친숙함을 확보하려고 애썼다면 베토벤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통짜 이론(Overarching Theory,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물을 하나로 설명하는 이론)’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대 리더들은 더 이상 모방과 반복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위대함’ ‘진지함’ ‘새로움과 같은 거대 담론을 뒷받침할 만큼 큰 스토리를 가진 작품을 원했다. 결국 베토벤은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자신의 작품이 갖고 있는 구조와 표현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해나갔다.

 

이런 노력을 기반으로 탄생된 작품이 피아노 트리오 1(Op.1)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 중에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작품 중 하나다. 2, 3부 이상 구매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대 비엔나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들이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 킨스키 백작, 하이든을 후원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물론 연주하기 쉽고 가볍고 대중적인 작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귀족들은 살롱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다. 사회학자 티아 드노라(Tia Denora)는 이러한 베토벤의지식계층을 위한 음악에 대해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답변과 설명을 갖춘 경우라고 지적한다. 결국 사람들은 베토벤의 표현과 기량뿐만 아니라 철학과 가치를 함께 사고자 했던 것이다.

 

추천 음반 

1770-1800 베토벤의 생애전반기’(前半期)를 대표하는 작품들

 

피아노 트리오 작품번호 1(Op.1),

수크 트리오(Suk Trio), DENON, 2008.

 

1795년 출판된 이 작품은 베토벤의 가장 대표적인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의 음악 살롱을 위해 헌정한 것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알레그로/아다지오/스케르초 또는 미뉴엣/프레스토 또는 프레스티시모의 순서로 완료되는 전형적인 구성을 띤다. 후일 베토벤은 이 작품을 수정해서 C 단조 스트링 콰르텟(String Quartet Op. 104)에 반영했다.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인 수크 트리오가 1984년 작업했던 하모니가 잘 반영돼 있다.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퀸텟, E-Flat, Op.16.

피아노 알프레드 브렌델 외 3, 필립스

 

1796년 작곡된 것으로 모차르트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 진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과 동일한 세팅의 현악 트리오(바이올린/비올라/첼로) 구성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바로크 음악과 낭만음악 모두에서 기량을 선보였던 하인츠 홀링거, 권위 있는 베토벤 해석자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 브랜델이 함께한 음반으로 특정 악기를 중심으로 초점화된 하모니를 원했던 베토벤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해석이다.

 

베토벤 교향곡 1,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푸르트 벵글러 지휘, Naxos

 

베토벤 음악의가장 진지한 후원자중 하나인 고트프리트 폰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사실상 그는 현악 4중주, 피아노 콘체르토, 각종 소곡집 등에서 동원된 다양한 악기와 관련된 스킬이 오케스트라 표현을 통해 집약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동원된 악기군만 해도 플루트, 클라리네, 파곳, 오보에, 호른, 트럼펫, 팀파니, 현악기 등의 세팅으로 당대로서는 역동적이고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당시 비평가 베버는불같이 격정적인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2차대전 전/후 교향악단의 전통을 보존한 명 지휘자로 평가받는다.

 

베토벤, 지휘자가 되다

 

그렇다면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인으로 인식되게끔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오케스트라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베토벤은 활동 초창기에 피아노를 중심으로 일부 악기 간의 조화를 확인하는 곡을 썼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악기를 통해 역량을 발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알브레히츠베르거를 비롯한 대가들에게 배운 작곡 기법이 누적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집대성할 만한 큰 스케일의 교향곡에 관심을 가졌다.

 

여기에도 친구들이 한몫했다. 자신의 작품이 갖고 있는 실험성과 성공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구독자들과 공연기획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리히노프스키 공과 그 주변의 명문 귀족 후원자들이 그 주역이었다. 이들은알타리아라는 출판사와 베토벤의 작품을 전속 계약하기로 하고 전문 구독자들이 자유롭게 베토벤의 작품을 향유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구상했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후일 베토벤이 알타리아뿐만 아니라 각각 지적 재산권의 표준이 달랐던 독일과 영국, 프랑스 곳곳에서 작품을 출판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비엔나의 귀족들은 작품의 구독과 구매/공연장 섭외와 연주회 콘셉트 기획을 통한 한정된 청중의 선정/공연 시연 후 의견 교환 및 각종 미디어를 통한 여론 조성 등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베토벤은 이러한 플랫폼에 힘입어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이 시중에 유포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전까지 곡을 지도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감독(Director)이 자신의 작품 구상과 방향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앞에서 직접 지휘(Conducting)를 하는 관행이 생겨난 것이었다. 콘서트 지휘자(Concert-Conductor)의 탄생이다. 이는 과거의 탈중심화된 작품 생산 방식(Decentralized Production)에서 벗어나 집중화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산업의 구조로 진화하는 원동력이었다. 지휘자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자 작곡가나 연주자가 자신의 의도와 메시지에 맞게 청중이 감상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7  극장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과거의 연주회는 사교의 장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조용한 감상이나 집중을 요하지 않았다. 공연장 내에서 식사를 하면서 곡을 듣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러나 심각하고 진지한 음악을 했던 베토벤과 그의 친구들은 이제 공연장 안에서 음악이라는 독립적인 아이템을 감상하면서 그 순간 자체에 집중해 명상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음악 작품이 이제 일상의 맥락에서 독립돼 하나의 생산 시스템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제품으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있었던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이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그리고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청중에게 전달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1800 4월 비엔나의 부르크 극장에서 열렸던 교향곡 1번 초연은 슈비텐 남작 일가의 지원하에 성공리에 연주될 수 있었다.

 

1800년부터 1801년까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하는 대작 2(교향곡 1번과 교향곡 2)을 남김과 동시에 인생의 색깔도 점점 짙어져 갔다. 유명한 소나타월광(Sonata quasi una fantasia, Moonlight)’을 작곡하는가 하면 흥행 무용가이자 발레단 감독이었던 살바토레 비가노(Salvatore Vigano)의 리브레토를 기반으로프로메테우스의 창조라는 발레 서곡도 흥행시켰다. 1799년부터는 유명한불멸의 편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안나 브룬스빅과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기도 했다. 아직 그에게청력 상실이라는 불행이 닥치기 전의 일이었다.

 

‘단계 전략을 통해 성장했던 오피니언 리더

 

베토벤의 57년 생애에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명문 귀족들 사이에서 천재로 호평받았던 나날도 있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어려움과 전란으로 인해 사회가 피폐해지자 사교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평면적으로 베토벤을 괴팍한 천재라거나 막연히 낭만파의 대부라고만 조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은 생각보다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네트워킹 시스템에서 추구되던 상식을 기반으로 한 음악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음악을 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상이 당대의 문화인들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만약 베토벤이 스스로 이슈를 셀링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금세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외면했을 것이다. 베토벤이 활동했던 시기부터 음악인은 더 이상 상류층이 원하는 결과물을 제조해 내는직인이 아니라 고유의 영혼과 작품관을 지닌창조자(creator)’로서 존중받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원동력에는 베토벤처럼 자신의 내공을 갈고 닦기 위해 긴 기간 고도의 집중력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외부 환경과 소통하고자 했던 노력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려는 모든 리더는 처음에는 점진적인 성과의 축적과 자기 표현을 통해 정당성을 입증받아야 한다.

 

이제 30, 비로소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속 깊은 예술가는 그렇게 차분하게, 그리고 서서히 다가올운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혜옥 연세대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김혜옥 교수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천영준 선임연구원은 연세대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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