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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묵자> 혹은 사랑, 그 험난한 길

강신주 | 63호 (2010년 8월 Issue 2)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를 아는가? 나치즘을 추앙했던 독일 사람들이나 나치즘을 혐오했던 사람 모두에게 그는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됐다. 그가 정치, 국가, 그리고 전쟁의 논리를 아주 냉정하게 해명했기 때문이다. 1927년에 출간된 작은 책,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은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통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인 것’이란 기본적으로 ‘적과 동지’라는 범주로 작동한다고 규정한다. 슈미트의 ‘적과 동지’라는 범주는 전쟁 상태에 있는 두 국가 사이에서 가장 분명하게 작동한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의 범주는 종교와 종교, 지역과 지역, 자본가와 노동자, 가족과 가족, 혹은 대중스타에 열광하는 팬클럽과 팬클럽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 편이야’, 혹은 ‘그는 우리와 달라’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인 판단’을 수행한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냉소주의는 그가 인간은 결코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다. 만약 그의 냉소주의가 옳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무서운 일 아닌가? 세계평화와 인류애는 단지 꿈으로만 남을 뿐인가? 그러나 슈미트는 역설적으로 세계평화와 인류애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적과 동지’가 갈등과 대립의 근원이라면,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제거하면 평화와 공존은 가능한 것 아닌가? 이미 이 사실을 2000여 년 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Jesus Christ)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무력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에게 모든 타인은 동지, 즉 친구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는가? 예수보다 먼저 동양에서는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폐기하는 인류애의 길을 제시했던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바로 묵자(墨子, BC470?∼BC 390?)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전쟁으로 얼룩진 혼란과 살육의 시대였다. 이때 묵자는 핏빛 세계를 구제하는 원칙으로 사랑의 길을 역설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핍박할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비천한 자를 경시할 것이고, 약삭빠른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를 기만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대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겠는가? 묵자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는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묵자(墨子) <겸애兼愛·>-
 
갈등과 대립에 대한 묵자의 진단은 단호하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당연히 그는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안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묵자는 인류애를 외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학파는 몸소 인류애,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겸애(兼愛)의 길을 실천했다. 강자와 약자가 전쟁을 치룰 때, 묵자는 약자를 도와주었다. 묵자는 약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도와주는 약자가 겸애 정신을 수용하리라 기대했다. 묵자가 약자의 편을 든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강자는 약자뿐만 아니라 묵자마저도 전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자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인류애의 제단에 바쳐버렸다. 헌신적이고 초인적인 묵자의 인류애는 장자(莊子)의 제일 마지막 <천하(天下)>편에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이익을 말하고 투쟁에 반대했으니 그는 서로 분노하지 않을 것을 설파했다. … 묵자(墨子)는 자신의 도()를 설명한다. “옛날 우() 임금이 홍수를 막고자 양자강과 황하의 물줄기를 터놓아서 사방의 야만족과 구주(九州)를 소통시켰다. 그 때 큰 강이 300이요, 지류는 3000이나 됐고, 작은 물 흐름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우 임금 스스로 삼태기와 보습으로 천하의 물줄기를 서로 이어놓고 갈라놓았다. 장딴지는 마르고 정강이에는 터럭이 없었다. 폭우에 목욕하고, 강풍에 머리 빗으며, 모든 거주 지역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우 임금은 큰 성인이면서도, 천하를 위해 몸을 수고롭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도다!” 후세의 묵자(墨者)들은 대부분 천한 짐승가죽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과 짚신을 신고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의 고생을 철칙으로 삼고서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 임금의 도를 실현할 수 없으며 묵자라 할 수 없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우 임금은 치수(治水) 사업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군주였다. 군주였음에도 그는 궁정 생활의 매혹적인 쾌락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몸소 치수 사업에 헌신한다. 반복되는 홍수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 임금의 장딴지는 마르고 정강이에는 터럭이 자랄 틈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비바람이 불어도 치수 사업 현장을 떠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자신의 삶을 돌보는 만큼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우 임금의 실천을 자신의 행동 모토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천한 옷과 가장 거친 음식을 먹으며 휴식마저 거부했다. 자신이 고생스러울수록 그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정치’가 ‘사랑’을 압도하는 시대다. 우리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의 위치를 잡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위치를 잘못 잡으면 불행이 찾아오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삶은 결코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줄 수 없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건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져 가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동물세계에 근접하고 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자연스러운 길은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기 때문이다. 이성복(李晟馥, 1952∼ )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힘들지만 사랑을 통해 ‘적과 동지’라는 해묵은 대립과 갈등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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