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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환 세라젬 헬스&뷰티 사장 인터뷰

“작은 시장이 가장 큰 시장... 벙벙한 시장 조사는 집토끼마저 쫓아낸다”

하정민 | 55호 (2010년 4월 Issue 2)

훌륭한 시장 조사는 의미 있는 시장 세분화(se-gmentation)를 도와주는 조사입니다. 특히 이렇게 좁은 시장을 공략해서 과연 무슨 이익이 남겠느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핵심 고객 집단을 쪼개고, 또 쪼갤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합니다.”
 
마케팅 전문가인 조서환 세라젬 헬스&뷰티 대표이사 사장은 시장 조사가 세분화의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사장은 1981년 애경산업에 입사한 뒤 ‘하나로 샴푸’, ‘2080 치약’ ‘마리끌레르’ 등의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마케팅 능력을 인정받아 2001년 KTF로 옮긴 뒤에는 여성을 겨냥한 ‘드라마(Drama)’,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나(Na)’, 3세대 휴대폰인 ‘쇼(Show)’ 등으로 잇따라 마케팅 돌풍을 일으키며 KTF가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겉으로 작아 보이는 시장이 사실은 가장 큰 시장”이라며 시장 조사를 기획하거나 시행할 때 목표 고객 집단(target consumer)을 최대한 좁게 설정하라고 말했다. 20대 초반 여대생이라는 작은 고객 집단을 공략하기 위해 출시한 마리끌레르 화장품이 정작 옛날을 그리워하는 30대 미시족과 여대생을 선망하는 여고생들에게 더 인기가 높았듯, 자사 제품의 소구력이 큰 고객 집단만 잘 발굴하면 그 집단의 규모가 아무리 적어도 높은 이익을 올릴 수 있으며, 고객층 또한 저절로 넓어진다는 설명이다.
 
쪼개고 또 쪼개면 길이 보인다”고 거듭 강조하는 그를 만나 시장 조사의 의미와 활용 노하우를 들어봤다.
 
일각에서는 시장 조사의 무용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시장 조사를 해보거나 그런 조사 결과를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훌륭한 시장 조사란 뭘까요.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대상으로 한 조사인지, 어떤 방식으로 한 조사인지에 관계없이 시장 세분화의 극한에 성공한 조사입니다. 더 이상 좁힐 수 없을 만큼 소비자 집단을 세밀하게 규정해야 시장 조사를 통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그 어떤 산업의 어떤 제품이라도 엄청난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사실상 블루오션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시각각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주 좁은 시장에 들어가 그 시장을 제대로 확실히 장악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장 조사는 이 좁은 시장을 규정하고, 이 시장에서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기준이 돼야 하는 겁니다.
 
화장품 신제품을 테스트한다고 가정해보죠. 어떤 소비자층을 집중 조사하고 발굴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인 여성’이라는 모호한 답이 나왔다면 거기서부터 실패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신제품의 콘셉트나 이미지가 모던한 느낌이라면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파트에 거주하는 20대 초중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조사하겠다’라는 식으로 세분화를 거듭하는 겁니다.
 
1990년대 중반 애경에서 근무할 때 화장품 사업에 도전했습니다. ‘트리오 세제를 만들던 애경이 무슨 화장품이냐. 소비자들은 애경에서 만든 화장품에 세제 냄새가 난다고 여길 거다’라며 우려가 컸습니다. 하지만 당시 출시했던 최초의 여대생 전용 화장품 ‘마리끌레르’, 여드름 전용 화장품 ‘a솔루션’, 모공 축소 전용 화장품 ‘B&F’ 등이 모두 크게 히트했습니다. 그 배경에 극한적 시장 세분화가 있었습니다.
당시 화장품 시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후 일단 시장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를 보니, 예상대로 화장품 시장이 포화 상태여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만 일방적으로 믿었다면 시장에 진입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저는 다른 내용에 주목했습니다. 피부 문제로 괴롭다는 응답자의 의견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드름과 모공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각각 25% 정도 있었습니다. 그 외 피부 톤이 검어서, 기미 주근깨가 많아서, 민감성 피부라서 괴롭다는 의견도 제법 있었고요.
 
시장 세분화라는 화두를 감안한 후 이 조사 결과를 본다 해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이는 여드름을, 어떤 이는 검은 피부 톤을, 어떤 이는 기미 주근깨에 주목하겠죠. 저는 처음부터 여드름에 주목했습니다. 까만 얼굴과 기미 주근깨는 가릴 수는 있어도 화장품으로 치료하기는 어렵죠. 반면 여드름은 화장품으로 치료가 가능합니다. 게다가 당시 여드름 전용 화장품이라는 시장 자체가 없었어요. ‘아주 좁은 시장에 들어가 그 시장을 확실히 먹어버리겠다’는 전략이 가능한 시장이었죠.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품명에도 솔루션(solution)을 넣었고,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두 번째는 모공, 세 번째는 여대생이라는 한 단어만 엄청나게 깊게 파서 모공 전용 화장품 ‘B&F, 여대생 전용 화장품 ’마리끌레르’를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끌레르의 성공은 KTF로 이직한 후 ‘나(Na)’의 성공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당시 이동통신 업계에는 대학생 전용 포지셔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여드름 전용 화장품? 모공 전용 화장품? 그게 무슨 창의적인 발상이야’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진정한 창의성은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존재해왔지만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시장을 발굴하는 게 아닐까요.

편익 세분화 (Benefit Segmentation)
 
고객 세분화를 이용한 상품 개발 전략을 세우거나 마케팅 전략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실행 가능성이다. 고객 세분화는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분류를 행했을 때, 그 결과를 통해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식의 행동 방침을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단지 분류만 해놓고 고객을 이렇게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 실행 가능성을 높이려면 세분 시장을 구체적으로 구분할 수 있느냐는 문제부터 고려해야 한다. 즉, 분류 기준이 감각적이거나 추상적이면 조사 결과에 대한 해석이 중구난방일 수 있으므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세분시장을 구별 짓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세분화의 기준은 나이, 소득, 라이프스타일 등 고객의 특성과 관련된 변수다. 하지만 조서환 사장은 남들처럼 표면적인 고객 특성 변수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양한 고객 행동 변수에도 관심을 보여 여러 성공을 이뤄냈다. 즉, KTF의 Na(대학생)와 드라마(여성 전용), 마리끌레르 화장품(여대생) 등은 인구통계학적 변수를 사용한 세분화지만 여드름 전용 화장품 a솔루션과 모공 전용 화장품 B&F는 소비자가 어떤 제품을 소비하면서 그 안에서 어떤 혜택을 얻느냐는 점을 기준으로 고객 집단을 나눈 편익 세분화(Benefit Segmentation)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편익 세분화는 미국 뉴햄프셔대 교수였던 러셀 헤일리가 <저널 오브 마케팅(Journal of Marketing)>에 기고한 논문 ‘Benefit Segmentation : A Decision-Oriented Research Tool’에서 최초로 사용한 개념이다. 헤일리 교수는 세분화의 변수로 크게 고객 행동 변수와 고객 특성 변수를 언급했다. 고객 행동 변수는 고객의 구매 행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변수로 고객이 추구하는 편익, 구매 시점의 사용 상황(비사용자, 최초 사용자, 규칙적 사용자), 사용량(heavy user, medium user, light user), 충성도 등을 포함한다. 고객 특성 변수는 고객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변수로 인구통계학적 변수(나이, 성별, 학력, 소득, 종교, 인종, 국적, 사회 계층, 키 등), 지리적 변수(거주 지역, 도시 규모, 인구 밀도, 기후), 심리적 변수(라이프스타일, 개성, 가치관 등)를 지칭한다.
치약을 소재로 편익 세분화의 개념을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다.(표1, 2)
헤일리 교수는 또한 여러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세분시장과 소비자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표3)
편익 세분화의 개념을 잘 이용한 기업으로는 필립스가 꼽힌다. 필립스는 소비자가 면도를 하면서 원하는 편익별로 다양한 제품을 내는 전략을 사용해 성공을 거뒀다. 필립스의 면도기 제품명 RQ1095는 목까지 완벽한 밀착 면도를 원하는 소비자, HQ9190는 닿기 힘든 부위까지 완벽한 밀착 면도를 원하는 소비자, HQ8150는 빠른 면도를 원하는 소비자, HS8020는 건강한 피부와 보습 기능을 중시하는 소비자 등을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다.
헤일리 교수가 정의한 내용과 조서환 사장의 경험을 통해 편익 세분화의 성공 비결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운 세분시장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있는 세분시장을 이용하는 게 더 쉽다. 많은 사람들이 상품 차별화의 전략으로 경쟁사와 다른 상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내는 일만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 조사를 통해 새로운 시장, 남들이 공략하지 않는 시장을 파악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둘째, 기존 제품이건 신제품이건 제품은 한 세분시장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상품들이 2개 이상의 세분시장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다 어느 한 시장에서도 최대의 매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모공 전용 화장품 브랜드가 색조 제품까지 출시해 실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셋째, 편익 세분화를 이용하는 마케터는 분명한 경쟁 우위에 있다. 예를 들어 경쟁자가 나이, 소득 등 고객 특성 변수에만 기인한 전통적인 세분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시장을 쉽게 공략할 수 있다.
넷째, 어떤 브랜드도 모든 소비자에게 매력적일 수는 없다. 모든 세분시장을 다 공략하려면 여러 개의 브랜드로 접근해야 한다.
지나치게 좁은 시장만 집중해 큰 시장을
놓치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을 듯합니다.
그 어떤 마케팅 교과서에도 ‘시장이 좁으면 좁을수록 오히려 더 큰 시장’이라는 말이 안 나올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좁은 시장에서 확실한 1위를 하면 애초에 우리가 목표하지 않았던 고객 집단까지도 우리 쪽으로 넘어오게 돼 있어요. 겉으로는 작고 좁은 시장처럼 보여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거죠.
 
마리끌레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 거주 20대 초반 여대생을 대상으로 내놓은 제품이었지만 정작 이 제품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자 30대 미시족, 여고생들이 이 제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나중에 조사해보니 구매 금액만으로 따져봐도 미시족과 여고생의 구매액이 20대 여대생보다 더 많았습니다. 미시족 45%, 여고생 35%, 여대생 25% 정도였습니다. 일종의 워너비(wanna-be) 효과가 발생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소비자들까지 장악할 수 있었던 겁니다.
 
대학생 전용 화장품이라고 해서 신분을 확인하고 팔지 않습니다, 대학생도 아니면서 대학생 화장품 쓴다고 누가 흉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품의 콘셉트를 단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잡고, 이 콘셉트가 가장 잘 먹히는 좁디 좁은 고객 집단만 발굴하면 고객층은 저절로 넓어지게 돼 있습니다.
 
‘a솔루션’도 마찬가지에요. 여드름이 가장 많은 10대 후반 청소년들은 해마다 생기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는 어떻게 해도 계속 여드름이 날 수밖에 없어요. 작고 좁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시장이 존재하는 셈이죠. 이런 시장에서 1위를 하는 게 넓지만 우리 제품이 특별한 차별화를 가지지 못하는 시장에서 3∼4위를 하는 일보다 훨씬 나은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뛰어난 마케터는 시장 조사를 할 때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좁은 세분시장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 세분시장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뚜렷한 고유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고, 당초 목표했던 핵심 고객군이 아닌 다른 고객군조차 저절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런 시장 확대가 가능해집니다.
 
세분화에 성공하면 경영자에게 시장 조사 결과를 보고하고 허락을 얻어내는 과정도 쉬워집니다. 사실 아직도 경영자 중 시장 조사 결과를 불신하거나, 시장 조사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이런 분들을 설득하는 게 마케터의 핵심 업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리끌레르 브랜드에서 새 립스틱을 출시할 때 일입니다. 임원 회의 때 장영신 회장께서 ‘내가 발라봤는데 새 립스틱이 다소 뻑뻑하던데’라고 하셨습니다. 신제품 개발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을 못 하더군요. 저는 제품 개발자는 아니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질문이었죠. 60대인 회장님의 입술에 있는 수분의 정도와 핵심 고객인 20대 여성의 수분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물론 회장님께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제가 나섰습니다. “회장님. 목표 고객이라는 게 있는데 이 제품의 목표 고객은 서울에서도 아파트에만 거주하는 20대 초반의 여대생입니다. 소비자층이 아주 좁고, 그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시장 조사와 실험을 거친 결과, 립스틱의 농도가 아주 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좁은 소비자층에게만 팔 제품이므로 지금의 농도를 유지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회장님도 동의하셨죠. 이런 대답이 없으면 회장님은 답답하고, 제품 개발팀은 기껏 좋은 제품 만들어놓고 CEO에게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양쪽 다 속병만 들 뿐이죠. 세분화를 생각하면 답은 금방 나오죠.
 
고객이 겉으로 말하지 않거나,
고객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내면의 욕구를
파악하려면 어떤 조사 방식을 써야 할까요.
샴푸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생각하면 소비자가 머리 감는 동안의 해당 샴푸가 어떤 향을 내는지가 중요한 듯 보이죠.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샴푸를 집으면 바로 코에다 갖다 대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정한 구매 의사결정은 소비자가 매장에서 그 제품을 접하는 순간, 어떤 향이 느껴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제품이 맘에 안 들면 아예 코에 갖다 대지도 않습니다. 또 막상 샴푸를 사용할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샤워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향을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즉, 소비자가 해당 제품을 코에 갖다 댔다는 점은 만일 이 샴푸의 향이 맘에 들면 사겠다는 뜻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말로는 아무런 신호가 없을지 몰라도요. 세정 기능, 가격, 제품 디자인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매장에서 소비자가 이를 코에 대는 순간의 향입니다. 단선적인 시장 조사를 하고, 마케터가 그 결과를 평면적으로만 해석하면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 여러 차례 조사한다 해도 결코 이런 점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대부분의 시장 조사 결과는 소비자들이 샴푸를 고를 때 ‘아름다운 향이 오랫동안 머리에 남았으면 좋겠어요’라는 수준의 요구 사항만 알려주겠지요. 그 의견을 따라 향기가 오래가면서 휘발성이 없는 향을 첨가했다고 치죠. 원가도 비쌀뿐더러, 샴푸의 강한 향이 스프레이 등 스타일링 제품의 강한 향과 섞이면 이상야릇한 향으로 변해 불만만 높아질 겁니다.
 
뛰어난 마케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시장 조사의 결과를 독특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이 말하지 않는 내면의 욕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조사에서 소비자들이 ‘현 제품보다 머리에 좋은 향이 더 오래 남는 제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고 치죠. 평범한 마케터는 ‘향이 더 오래가는 제품? 어떤 향을 쓸까? 라벤더? 로즈마리? 그 향을 오래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식으로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건 어떤 향을 보강할 거냐는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에 샴푸 그 자체의 향이나 소비자가 샴푸를 사용할 때 쓰는 향보다 코에 갖다 댈 때 느껴지는 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겁니다.
시장 조사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막상 실행해보면 실패하는
제품들도 많습니다.
역시 세분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제품의 품질이 우수하고, 테스트 결과 소비자들의 반응이 호의적이라고 해도 핵심 콘셉트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제가 애경에서 KTF로 이직한 후 앞서 언급한 화장품 3개 브랜드가 다 위기를 맞았어요. 모공 전용 화장품 브랜드가 립스틱과 아이섀도 제품을 출시하는 식으로 무리하게 제품 콘셉트를 확대하려 했기 때문이죠.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건 핵심 콘셉트는 단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공 전용 화장품은 제품 라인을 확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가 모공이 잘 안 보이도록 해주는 파우더나 트윈케이크 정도죠. 하지만 여기서 립스틱과 아이섀도가 나오면 ‘모공’이라는 핵심 콘셉트가 사라집니다. 당연히 핵심 고객 집단도 없어지죠. 그렇게 어렵게 발굴한 세분시장을 단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겁니다. 집토끼를 잘 지켜야 산토끼도 불러들일 수 있는 거지, 산토끼를 데려오기 위해 집토끼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시장 조사를 수행하면서 경영진의 불신,
다른 부서와의 갈등 등을 겪은 적은 없으신가요.
제가 경영자라 해도 당장의 재무 이익과 연결되지도 않는 시장 조사에 많은 돈을 쓴다고 하면 좋아할리 만무하겠죠. 문제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입니다. 설득의 핵심은 자신감이죠. 결재를 받을 때 “회장님. 조사비를 너무 많이 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사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여기에다 싸인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임원과, “회장님. 비록 조사비가 많이 들었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신제품이 시장에서 먹힐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믿으십시오”라고 하는 임원 중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죠.
 
애경에서 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신 장영신 회장님도 시장 조사 관련 보고를 드리면 “이거 외국인들이 시킨 거 아니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시 애경이 외국업체와의 합작 회사였는데 외국인들 말만 듣고 괜한 일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하셨나 봐요. 그럴 때 저는 “회장님. 제가 이 제품의 모든 걸 다 알아도 제가 알고 있는 사안이 소비자 생각과 같은지 거듭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조금 비용이 들지 몰라도 위험을 가장 줄일 수 있는 게 이 방법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한 후 당당히 결재를 받았습니다.
 
모 광고 대행사의 사장의 일화입니다. 광고주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광고주가 “메시지가 너무 단순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곧바로 광고주를 일으켜 세운 후 광고주에게 미리 준비해간 테니스 공 두 개를 한꺼번에 던지면서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광고주는 하나도 못 받았죠. 그 후 하나만 던질 테니 잘 받아보라고 말하자 광고주가 그 공을 아무 말 없이 받더랍니다.
 
이 일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뭘까요. 앞서 언급한 왜 극도로 좁은 세분시장만을 공략해야 하느냐는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광고주를 일으켜 세워 공을 던질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입니다. 누가 감히 하늘 같은 광고주에게 프레젠테이션 도중 공을 받아보라고 하겠어요. 물론 광고주가 기분 나쁘고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겸손하게 “죄송합니다. 아까는 프레젠테이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떤 사람이 나무라겠습니까. 오히려 대부분의 광고주는 ‘이 사람에게는 무슨 일을 맡겨도 될 것 같다’고 신뢰할 겁니다.
 
다른 부서와의 갈등도 물론 많았죠. 특히 재무부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돈 쓰는 거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잘 설득하지 못하면 훌륭한 마케터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반대하는 건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죠. 저의 임무는 그들을 설득시키는 거고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내 생각과 의견에 100% 찬성해주지는 않습니다. 반대해줄 사람은 반대를 하고 딴죽을 걸어줄 사람은 딴죽을 걸어줘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큰 발전이 생깁니다.
 
외주 업체에게 시장 조사를 맡길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조사 대상과 규모를 잘 선정하는 업체를 골라야 합니다. 애경에서 트리오 관련 시장 조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갓 출시한 제품이었는데 우리 제품의 점유율이 55%, 경쟁 제품의 점유율이 45%더군요. 이상하다 싶어 샘플 선정이 어떻게 됐는지 가져오라고 했더니 애경의 주부 모니터 요원, 그분들의 친구 뭐 이런 식으로 이뤄졌더군요.
 
둘째, 끊임없이 외주 업체에게 재확인을 요구하고, 관리하는 일에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0명의 응답자를 가지고 어떤 조사를 의뢰했다고 할 때, 외주 업체가 처음 결과를 가져오면 ‘잘 보겠다’고 하고 결과를 해석하는 일에 주력합니다. 그 후 불시에 ‘그 때 1000명 조사했는데 이런 특징을 가진 고객 몇백 명의 결과를 좀 다시 보고 싶다’고 하면 제대로 조사한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의 차이가 확 납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한 외주 업체 관계자가 저처럼 재확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시장 조사 역시 이처럼 아주 작고 미묘한 차이가 승패를 가릅니다. 비즈니스 격언 중에도 열 번 회의보다 저녁식사를 한 번 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외주 업체에게 시장 조사를 맡기면 조사 시작 전에 전체 비용의 절반을 지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주 업체를 시시각각 감독하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신뢰할 만한 결과를 얻기가 힘들겠죠.
 
셋째, 조사 업체마다 특성이 다 다릅니다. A업체는 전화 조사에, B업체는 집단 면접에, C업체는 관찰 조사에 뛰어난 식이죠. 그 특성에 맞게 일을 발주해야 합니다. 비용을 좀 아끼겠다고, 안면이 좀 있다고 해서 해당 업체의 강점을 무시한 조사를 맡기거나 일을 몰아주면 사단이 납니다. 특히 인간관계 때문에 일을 발주하는 건 최악입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현정은씨(24, 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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