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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디자인 캠페인

디자인 경영, CEO 넥타이까지 바꿔라

하정민 | 47호 (2009년 12월 Issue 2)
1997년 기아자동차의 부도는 전대미문의 외환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보나 진로의 부도는 외환위기의 예고편이었다. 여기에 당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의 부도가 가져온 파문은 엄청났다. 정부는 기아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이 와중에 기아차 경영진, 정치권 및 사회 일각에서 기아를 회생시키기 위해 공기업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결국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1997년 10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했다. 2달 후 한국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당시 기아의 부도 원인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꼽는 이유는 디자인 역량 부족이었다. 당시 기아차가 수천억 원의 개발비를 투입해 야심 차게 출시한 ‘크레도스’와 ‘아벨라’는 디자인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고 결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다. 표류하던 기아차는 1998년 현대차에 합병됐다.
 
이후 11년이 흘렀다. 이제 ‘기아=외환위기’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쏘울’ ‘포르테’ ‘모닝’ ‘로체이노베이션’ 등 최근 기아차가 내놓은 신모델들은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힘입어 기아차는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누계 영업이익 7327억 원을 기록했다. 창사 이후 최초로 영업이익 1조 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시장점유율 또한 1995년 이후 14년 만에 다시 30%대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2009년 11월 19∼24일 마케팅 교수와 전문가 및 대학생 1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기아차는 ‘가장 혁신적(창의적)인 마케팅 콘셉트를 보여준 브랜드(상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케팅으로 가장 높은 고객 만족을 이끌어낸 브랜드(상품)는 무엇입니까?’ ‘앞으로도 장기간 마케팅 활동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브랜드(상품)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들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한 요인이 바로 디자인 경영이다.
 
 
외국인 최고디자인책임자(CDO) 영입
2005년 11월 기아차는 옵티마에 이어 5년 만에 야심 찬 신작 로체를 출시했다. 현대 ‘쏘나타’와 같은 엔진을 사용하면서 가격은 100만 원 이상 쌌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당시 국내 경기 상황이 좋았지만 판매 부진은 이어졌다. 기아차는 쏘나타에 비해 브랜드 경쟁력이 떨어지고 차별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진단했다. 이를 단시일 내에 극복하려면 디자인 역량부터 끌어올려야 한다고 판단, 본격적으로 디자인 경영의 시동을 걸었다.
 
디자인 경영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를 최고디자인책임자(CDO·Chief Design Officer) 및 부사장으로 영입하는 일이었다. 2006년 초 기아차에 합류한 슈라이어는 폭스바겐와 아우디에서 CDO를 지냈으며 BMW의 크리스 벵글, 아우디의 월터 드 실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힌다.
 
최고 경영진 9명 중 6명이 외국인인 LG전자, HR 최고 책임자를 외국인으로 두고 있는 (주)SK나 SK텔레콤 사례에서 보듯 최근 외국인 최고위 임원을 뽑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불과 3년 전만 해도 최고위 임원을 외국인으로 영입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었다. CDO라는 직책을 만든 사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현대 특유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감안할 때 과연 외국인이 한국 회사에 얼마나 잘 적응하겠느냐, 얼마 있다 떠나갈 얼굴 마담에 불과한 거 아니냐는 우려 또한 팽배했다.
 
이때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직접 슈라이어 영입에 팔을 걷어붙였다. 슈라이어는 기아차가 제시한 파격적인 대우와 거듭된 영입 요청에도 결정을 망설였다. 하지만 2006년 5월 한국을 방문해 정의선 당시 최고경영자(CEO)를 만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후 기아에 합류했다. 그가 온 후 기아차의 디자인 부문은 회사 내 위계질서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별도 조직으로 기능하며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슈라이어는 기아차 부임 후 가장 먼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표현하는 데 매달렸다. ‘무난하고,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차’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었던 기아차에 고유의 색깔을 입히는 게 시급하다는 이유다. 그가 내세운 콘셉트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라인을 만들겠다는 ‘직선의 단순화(simplicity of the straight line)’였다. 현대차의 아류로 취급되는 기아차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면 젊고, 빠르고, 생동감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순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디자인을 채택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세계적인 고유가로 차 크기를 줄이고 불필요한 사항을 없애려는 화두가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기아라는 명칭의 음성학적 어감 또한 짧고 강렬하다는 점에서 직선의 단순화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차의 ‘아반떼’ 쏘나타의 디자인은 곡선을 많이 강조한 반면 뉴모닝, 로체이노베이션, 포르테, 쏘울 등 기아차의 최근 제품들은 직선을 강조한다. 기아차가 경쟁력을 지닌 소형차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차별화 무기로 내세우는 회사가 많다. 이 시장에서 디자인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다는 점 자체가 시장을 새로 규정한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기아차는 20, 30대 젊은 층이 선호하는 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실히 구축했다.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하기 전 기아는 뚜렷한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장 내 위치도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다(everywhere but nowhere)’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좋건 나쁘건 이미지를 갖는 게 무색무취한 것보다 훨씬 낫다. 디자인 경영으로 현대차의 자매 브랜드라는 인식을 떨쳐내고 기아만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디자인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 확립
과거 기아차에는 판매 부문이 연구개발(R&D) 부문이나 생산 부문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디자인 부서는 연구개발 부서의 권력 피라미드에서도 하위에 있을 때가 많았다. 모델 품평회 등에서도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제안에 경영진이나 기술, 제조, 판매, 재정 부문의 부정적 반응이 등장하면 이를 번번이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일도 많았다. 2005년 출시됐던 로체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사내 품평회를 가지기 전만 해도 날렵한 디자인의 차였다. 그러나 품평회를 거치면서 ‘트렁크를 크게 하자, 뒷좌석을 넓히자’는 식의 주문이 쏟아졌고 결국 차별화 요인이 별로 없는 평범한 디자인의 차가 나왔다.
 
하지만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한 후에는 기술적, 재정적 제약 때문에 디자인 부서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 다른 부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신차 기획 단계에서부터 신차 출시 전 6∼7개월간의 시험 생산 기간 중 크고 작은 수정 문제에서도 디자인 팀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기아차 경영전략실의 기세범 부장은 “최근 신차를 개발하면서 배터리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디자인 부서에서 원한 배터리에 대해 R&D 부서에서 난색을 표했다. 기존 설계 및 생산 프로세스로는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디자인 부서가 원했던 배터리가 폐기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결국 R&D 부서는 디자인 부서가 원하는 대로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사실 디자인 경영을 도입한 후 기술자들은 예전보다 많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편이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경영진의 의지가 워낙 강한 만큼 다른 부서가 이런 변화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링 부서와 디자인 부서의 갈등은 어느 조직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를 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결국 CEO가 어느 한쪽에 우선순위를 부여해줘야 한다. 디자인 경영을 전사적 목표로 내걸었다면 기아차처럼 당연히 디자인 쪽에 우선권을 주는 게 맞다. 어설픈 타협과 조정은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디자인 우선 방침이 시행되면서 품평회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위에서 지시한 1가지 안만 품평회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 이제는 여러 팀에게 이를 맡겨 사내 경쟁을 유도한다거나, 여러 안을 제시한 후 이를 품평회에 모두 등장시켜 그중 가장 좋은 안을 고르고 있다. 디자인 부서의 최고 책임자 급만 참석하던 품평회 형식이 다양한 직급의 디자이너가 동석하는 걸로 바뀌었다. 말단 직급의 디자이너가 최고위 임원들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디자인 부서에 물리적인 독립성도 부여했다. 슈라이어 부사장의 영입 전 기아차 디자인센터는 남양에 위치한 현대기아차 연구소 내에서 현대차 디자인 팀과 한 건물을 썼다. 슈라이어가 온 후 인력을 대폭 늘린 기아차 디자인센터는 별도 건물을 마련해 이사했다. 기아차 디자인센터 직원이 아니면 아무도 출입할 수 없도록 신분 인식 출입 통제 장치를 마련해 철저한 보안도 유지했다. 해외 사무소도 마찬가지다. 판매 팀과 한 지붕을 썼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디자인센터도 별도 사무실로 분리했다. 2007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유럽 총괄 법인 사옥을 완공하면서 유럽 디자인센터도 판매 팀과 별도의 사무실을 갖게 됐다.
 
천재적인 한 개인이 조직 전체의 디자인 역량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기아차의 사례를 보면 디자인 이슈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갖추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능과 필요가 아니라 감성적 이유 때문에 소비를 결정하는 21세기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조직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피터 슈라이어라는 유명 디자이너의 영입도 중요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경영진이나 다른 부서의 간섭이 적어진 게 디자인 부서의 자신감을 북돋우고 창의성을 높여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디자인 이슈에 특화된 조직 구조를 만든 기업의 예는 파나소닉이다. 파나소닉은 2002년 조직 내·외부에 흩어져 있던 디자인 인력들을 모아 ‘파나소닉 디자인’이라는 기업으로 분사시켰다. 디자인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파나소닉 디자인에는 본사 직제와 다른 인사 제도를 도입했고, 이 회사 경영진의 권한 또한 대폭 강화했다. 과거에는 디자이너가 사업 부서장에게 디자인 안을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 개발, 제조에 나섰다면 파나소닉 디자인을 설립한 후에는 중요 디자인 검토 회의에 본사 사장 및 임원, 파나소닉 디자인 사장, 제조 및 부품업체 사장까지 함께 참여해 디자인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내의 디자인 안을 특A, A, B, C, D의 5단계 등급으로 구분해 특A와 A등급 안은 반드시 중요 디자인 검토 회의에 회부하고 있다.
 
 
패밀리 룩(Family Look)의 도입, 디자인 명가(名家)를 꿈꾼다
패밀리 룩은 같은 회사에서 생산하는 일련의 제품에 일관된 디자인을 적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 특정 자동차를 봤을 때 해당 자동차의 이름과 크기는 잘 모를지라도, 어떤 업체가 만들었는지는 한 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요소다. 같은 업체에서 내놓은 차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차체 디자인은 계속 바뀐다. 하지만 패밀리 룩은 마치 몸속의 DNA처럼 유전된다. 때문에 자동차 업체들은 패밀리 룩을 통해 디자인 일관성을 지키고, 해당 업체가 추구하는 전략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정체성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고급 자동차 업체들이 수십 년 전부터 패밀리 룩을 적용하는 이유다.
 
BMW의 전면 그릴은 2개로 나뉘어 있다. 2개의 신장을 단 모습과 비슷해 ‘키드니(kidney) 그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무려 80여 년 전인 1933년 베를린 모터쇼에 소개된 303 시리즈에 처음 적용한 키드니 그릴은 지금도 BMW를 대표한다. 은빛 날개로 불리는 윙 로고와 보통 차의 2배는 될 법한 육중한 크기의 사각형 그릴을 가진 크라이슬러, 중세 기사의 방패 모양에서 따온 폭스바겐의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까지 내려오는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의 아우디 등도 유명하다. 푸조는 고양이의 우아함과 날렵함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의미하는 ‘펠린 룩(Feline Look)’을 고수한다. 모든 제품에 고양이 눈을 연상시키는 크리스털 헤드라이트를 적용해 펠린 룩의 일관성을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자동차업체들도 가세했다. 도요타는 렉서스 라인, 닛산은 인피니티 라인에 패밀리 룩을 도입해 고급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기아차는 국내 자동차업체 중 본격적인 패밀리 룩을 시작한 최초의 업체다. 기아차는 2007년부터 출시한 로체이노베이션, 포르테, ‘소렌토R’ ‘오피러스 프리미엄’ 등에 ‘슈라이어 라인’을 적용했다. 슈라이어 라인은 기아의 상징인 호랑이의 코와 입을 형상화해 라디에이터 그릴에 적용한 패밀리 룩이다. 차종에 관계없이 라디에이터 그릴만 봐도 그 차가 기아차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기아차는 국내 자동차업체 중 본격적인 패밀리 룩을 시작한 최초 업체다.
 
물론 BMW나 아우디와 달리 역사와 전통이 부족하고, 아직 고급차가 주력 모델도 아닌 기아차가 패밀리 룩을 시도하는 게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중소형차가 위주인 회사가 패밀리 룩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칫 식상함을 주거나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스타일의 차를 내놓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관해 기아차는 고급차만 패밀리 룩을 시도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
 
기아차처럼 명확한 세분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인 브랜드 인지도는 높지 않은 업체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패밀리룩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도요타나 현대차처럼 자동차의 전 차종을 고루 생산하는 대형 브랜드에는 패밀리 룩을 적용하기가 더 어렵다. 기아차 디자인 경영의 핵심이 확고한 브랜드 이미지 확립에 있는 만큼, ‘움직이는 광고판’이나 다름없는 자동차의 전면 디자인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패밀리 룩을 통해 잠재 고객에서는 강한 이미지를, 기존 고객에게는 기아차가 속해 있는 세분시장 특유의 만족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릴이나 전조등의 일방적인 통일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차량 전체의 입체적인 부분에서 기아차만의 특성을 선보일 수 있는 패밀리 룩을 선보여 장기적으로는 세계적인 고급차업체들과 경쟁하겠다는 뜻이다.
 
 
영업점, 전시회장, 명함, 컵, 결재판, CEO 넥타이까지 “다 바꿔라”
모 카드회사의 CEO는 최근 본사와 영업점 내에 걸려 있는 동양화를 다 모던한 느낌의 서양 추상화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던’을 콘셉트로 내세우면서 동양화를 걸어두면 안 된다는 이유다.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라도 그게 회사의 핵심 전략과 어긋나면 해당 전략 자체를 직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기아차 역시 단순히 제품에만 디자인 경영을 도입하는 게 아니라 디테일한 부분에도 이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7년 10월 기아차는 3만3000명에 달하는 임직원들의 명함을 모두 교체했다. 새로 바뀐 명함 뒷면에는 짙은 빨간색 바탕에 ‘DESIGN’이란 글자가 쓰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S’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물음표 기호 ‘?’로, ‘I’는 창의성을 뜻하는 전구로 표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이컵, 결재판, 서류철, 봉투, 키홀더 등 직원들의 사무용품들과 이메일 개인 서명 양식, 전산 문서 양식, 보고서 표지 양식에도 모두 디자인 슬로건을 도입했다.
 

디자인 경영에 맞게 재단장한 기아차 잠실점 
 
영업점, 직영 서비스센터, 설문 조사 장소 등 소위 4S(sales, spare parts, service, survey)라 불리는 고객과의 주요 접점 장소에도 대대적인 인테리어 변화를 꾀했다. 영업 본부의 압구정 사옥, 잠실점, 분당점의 주요 거점에는 기아차의 강렬하고 단순한 명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 리노베이션을 단행했다. 고객이 직접 찾지 않는 곳도 마찬가지다. 수원 프레스 공장 건물은 한쪽 벽면 전체를 ‘디자인 기아’의 로고인 물음표로 채워 직원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기름칠 분위기가 풍기는 생산 현장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공간의 느낌이 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자동차산업학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경영학과 주우진 교수는 매장 고급화가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3000cc 이하급에서는 국산차와 외제차의 성능 및 디자인 차이가 거의 없다. 결국 매장 차이가 고급차와 중급차를 가른다. 강남의 외제차 매장은 매장 인테리어부터 호텔급이다. 영업 사원들의 태도나 옷차림새 또한 럭셔리한 분위기가 풍긴다. 좁고 지저분한 매장에 꾀죄죄한 직원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차가 있어도 고급차로 보일 리 만무하다. 한국 자동차업체들이 매장 인테리어 투자에 인색해선 안 된다.”
 
CEO의 넥타이에도 디자인 경영을 가미했다.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한 정의선 사장은 기아차 CEO로 재직할 당시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빨간색은 기아차의 상징색이다. 광고 내용도 영업 사원, 엔지니어, 연구원 등이 모델로 등장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디자인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만들었다. 영업도, 생산도, 연구도 디자인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직원들의 행동 양식도 바뀌고 있다. 과거 현대의 기업 문화는 유달리 불도저 이미지가 강했다. 추진력은 강하지만 세련미가 떨어지고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디자인 경영이 정착되면서 일방적인 상명하달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 기세범 부장은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올해 기아타이거즈 야구단이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10번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기아가 페넌트레이스 하반기부터 1위를 달려 야구장에서 직접 응원하는 직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기아 V10을 디자인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가더군요. 그때 많은 감동을 받았고, 디자인 경영이 직원들의 자발적인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준까지 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DBR TIP 디자인 경영이 왜 중요한가?
 
투자 대비 효율이 높다
디자인 투자는 생산, 마케팅 등 다른 분야에 같은 액수를 투자하는 일에 비해 훨씬 높은 효과와 빠른 결과 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자인 경영의 대명사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등 미려한 디자인의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2007년 브랜드 가치와 매출액이 각각 2003년 대비 2배, 1.7배씩 늘었다. 영국 디자인협회가 선정한 디자인 선도 기업(디자인상을 자주 받은 63개 회사)의 주가는 1994년 FTSE 100 기업(런던 국제증권거래소에 상장된 100대 기업)과 유사한 수준이었지만 2007년에는 2배로 높아졌다.
 
자동차에서도 가격, 안전성, 연비, 운전 재미, 우수한 애프터서비스 등 다른 분야를 개선시키려면 디자인 부문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든다. 투자비가 가장 적은 편이면서 소비자 불만족도가 높아 투자 대비 효과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분야가 디자인이다.
 
기술이 아닌 디자인이 업체 간 차이를 규정한다
제품의 수명주기가 성숙기에 접어들수록 디자인의 역할이 커진다. 일례로 전자산업에서 초창기에는 기술이 우수한 업체가 시장을 좌우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기술(IT) 발달로 각 업체의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소비자가 차이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이 고도화됐을 때에는 기술만으로 차별화가 어려워진다. 이때 소비자가 그 차이를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디자인이 핵심 경쟁력이다. 때문에 디자인 차별화에 성공하면 시장을 평정할 수 있다. 2005년 세계 LCD TV 시장점유율이 4위에 불과했던 삼성전자는 와인 잔 이미지를 형상화한 ‘보르도 TV’를 선보여 불과 1년 만인 2006년에 세계 1위로 부상했다. 직선 디자인 일변도의 평판 TV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우수한 대박 상품의 판매 기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80년대 소니의 ‘워크맨’은 13년 반 만에 1억 대가 팔렸다. 반면 2000년대 애플의 ‘아이팟’은 불과 5년 반 만에 1억 대가 팔렸다. 자동차도 시장 포화기에 접어들면서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며 디자인이 좋은 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도호가 높아지고 있다.
 
기능보다 감성이 중요한 사회가 도래했다
베스트셀러 <드림 소사이어티>의 저자이자 세계적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은 현대 사회에서는 기능이 아니라 고객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줄곧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과거 가난의 정의가 ‘필요해도 물건을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현대의 가난이란 ‘단순히 기능, 필요 때문에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몇 천 원짜리 천 가방과 수백만 원에 달하는 샤넬 핸드백의 기능은 정확히 똑같지만 한쪽은 필요 때문에, 다른 한쪽은 꿈과 아름다움 때문에 핸드백을 산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소비 목적이 기능과 필요가 아니라 정체성 표현, 차별화 및 개성 추구로 바뀌면서 소비자들은 디자인이 우수한 제품에 비싼 돈을 지불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기술적 장애가 있으면 소비자가 원한다고 해서 당장 그 제품을 만들어낼 수 없지만, 디자인은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비교적 바로 반영할 수 있다. 고객이 제품에 ‘자신의 경험’이라는 가치를 추가하기 쉽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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