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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한 가게, 팝업 스토어

심정희 | 44호 (2009년 11월 Issue 1)
1990년대 후반 이후 많은 명품업체들은 플래그십 스토어(가두점)를 통한 세력 확장 및 이미지 통합에 공을 들여왔다.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은 고객이 브랜드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장소인 만큼 브랜드 경영진들은 렌조 피아노(에르메스), 헤르초크 & 드 뫼롱(프라다)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를 고용해 건물을 짓고, 최대한 고급스럽고 화려한 자재들로 그 안을 채워 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이런 플래그십 스토어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지닌 가게들이 가장 ‘힙’한 패션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바로 팝업 스토어다. 팝업 스토어는 온라인 상에서 사용자가 어느 웹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이벤트나 특별한 공지사항 등을 알리기 위해 조그맣게 떴다가 사라지는 ‘팝업(Pop-up)’ 창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해당 브랜드가 존속하는 한 10년이건 100년이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듯한 플래그십 스토어와 달리 팝업 스토어는 1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하다 사라진다. 외관이나 인테리어 역시 전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철거 직전의 건물이나 오랫동안 임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적한 지역의 건물을 임대해 최소한의 인테리어 공사만을 거친 뒤 고객을 맞기 때문에 매우 거칠고 초라한 느낌을 준다.

패션계에 팝업 스토어의 유행을 몰고 온 브랜드는 일본의 꼼 데 가르송이다. 전위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꼼 데 가르송은 2004년 패션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베를린을 기점으로 헬싱키, 베이루트, 홍콩에 ‘게릴라 스토어’를 열었다. 뉴욕과 파리가 아닌 패션계의 외곽 도시에 문을 연 이 게릴라 스토어들은 잠깐 동안 비어 있는 건물을 임대하거나 철거 직전의 건물 등을 싼 값에 빌려 거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지 않은 채 운영됐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깬 신선한 발상이라는 이유에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나이키, 프라다, 샤넬 등 다앙한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팝업 스토어의 개념을 잇따라 도입하면서 이제 팝업 스토어는 패션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패션 브랜드의 입장에서 볼 때 팝업 스토어가 가진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일반 매장과 달리 대규모의 공사 비용과 임대료가 필요치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특이하게도 이런 팝업 스토어는 고유의 한시성과 독특한 콘셉트 덕에 굳이 ‘목’이 좋은 자리가 필요 없다. 해당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가진 고객이나 트렌드세터라면 물어서라도 그 가게를 찾을 테니 말이다.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돈을 쓸 필요도 없다. 독특하고 젊은 분위기만 발산할 수 있다면 허름한 내외관이 오히려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다른 매력도 있다. 팝업 스토어는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장소가 아니다.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와 아이덴티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다. 꼼 데 가르송이나 나이키 같은 브랜드들은 팝업 스토어를 통해 젊고, 실험성이 강하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브랜드,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 있는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확립했다. 샤넬이나 프라다 같은 명품업체들은 팝업 스토어를 몇몇 이벤트에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리 방돔 광장이나 밀라노 비아 델라 스피가에만 머무르는 고루하고 답답한 브랜드가 아님을 만천하에 증명할 수 있었다.
 
팝업 스토어의 한시성은 팝업 스토어가 존재하는 동안, 오직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제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꼼 데 가르송은 몇 개 매장에 ‘숍인숍’ 개념으로 팝업 스토어를 만든 뒤 18개월 동안만 판매했다. 이런 전략이 소비자들을 더욱 안달하게 만들어 제품 구매 열풍을 불러일으켰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에도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디자이너가 있다. 정구호의 매장 구호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딱 한 달간만 판매하는 ‘9
+’ 제품들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팝업 스토어를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침체의 늪에서 더 이상 건물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운 패션 브랜드들이 찾아낸 자구책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또 어떠랴. 끊임없이 새로움을 원하고 지루함이라면 질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순식간에 생겨났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숍’이라는 이름과 달리, 팝업 스토어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는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와 여성 패션지 <W Korea> 패션 에디터를 거쳐 현재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10아시아>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패션 관련 글을 기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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