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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It),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유혹

심정희 | 40호 (2009년 9월 Issue 1)

‘잇(It)’은 패션계에서 매 계절 가장 주목받는 아이템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대명사다. 1990년대 생겨난 ‘잇’의 개념은 어떤 물건을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물건을 갖지 못하면 시대에 뒤처지는 듯한 불안감을 소비자에게 안겨준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보다 훨씬 강력한 느낌을 주는 단어다.


최근에는 ‘잇 슈즈’ ‘잇 스타일’ ‘잇 걸’ 등 다양한 단어와 함께 쓰이고 있지만, ‘잇’이 최초로 붙은 아이템은 핸드백이었다. 1990년대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새로운 디자인의 핸드백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을 무렵, 자본가들은 핸드백의 위력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몸매가 모델만큼 좋지 않으면 소화할 수 없는 옷과 달리, 핸드백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다. 게다가 핸드백엔 사이즈도 없어 사놓고 들지 못하는 상황도 안 생긴다. 생산자 입장에서도 의류처럼 재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더할 나위 없는 아이템이었다


 

눈치 빠른 명품 브랜드들은 핸드백이야말로 엄청난 부를 안겨줄 금광임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대규모 자본을 들여 매 시즌 새로운 핸드백을 쏟아내고, 유명 인사에게 핸드백을 들게 함으로써 사람들 눈에 더 자주 띄도록 만들었다. 자사의 핸드백만 있으면 매 계절 새로운 옷을 사지 않고도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는 기사를 싣도록 패션 잡지들을 부추기기도 했다. 최대 광고주인 명품 브랜드들은 얼마든지 패션 잡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제품이 바로 ‘잇 백(It bag)’이다. 펜디의 바게트백, 디오르의 가우초백, 클로에의 패딩턴백, 발렌시아가의 모터사이클백(모터백), 이브생로랑의 뮤즈백, 샤넬의 2.55백 등 수많은 잇 백들은 엄청난 대히트를 쳤다. 특히 사라 제시카 파커가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들고 나와 더욱 유명해진 펜디의 바게트백은 국내에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패셔너블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의무적으로 계절마다 잇 백을 사들였다. 200만∼3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루이비통, 디오르, 펜디 같은 명품 브랜드에서 어떤 백을 내놓을 건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예약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한시라도 빨리 신제품을 보유하려 애쓰기도 했다.


문제는 높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 잇 백의 생명이 너무 짧다는 데 있었다. 계절마다 워낙 다양한 잇 백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한두 계절만 지나도 비싼 돈을 주고 산 과거의 잇 백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부담을 줬다. 지난 계절의 잇 백을 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행에 뒤처진 여자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2007년 이후 패션계에서는 ‘잇 백’ 열풍이 주춤해지기 시작했다. 매 계절 광고에 등장하는 ‘잇 백’ 후보 대신 유행을 타지 않고 로고도 없는 가방에 관심을 갖는 여자들이 하나 둘 늘어났기 때문이다. 핸드백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신발로 옮겨간 영향도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잇 백 열풍을 잠재운 가장 큰 원인은 잇 백 자신의 ‘한시성’이었다.

 

더욱 신기한 현상은 잇 백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명품 브랜드의 파워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잇 백의 인기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해당 명품 브랜드의 파워 또한 함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샤넬이나 루이비통처럼 자본력을 갖춘 거대 브랜드야 별 피해가 없었지만 중소 브랜드, 특히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2000년대 초반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는 패딩턴백으로 설립 이후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낸 클로에는 패딩턴백의 인기 하락과 함께 브랜드 전체의 인기도 시들해지는 비운을 맛봤다. 발렌시아가 또한 모터백의 인기 하락과 동시에 트렌디한 브랜드에서 ‘그냥 그런 브랜드’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결국 ‘잇’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때문에 지갑을 열었던 여성들이나 그 여성들의 돈을 긁어간 브랜드 모두에게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이었던 셈이다.

 

‘잇’이라는 늪의 위험성을 깨달은 명품 브랜드들은 결국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제품을 직접적으로 광고하는 대신 더욱 은근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알리려고 애썼다. 즉 우리 회사의 핸드백은 ‘트렌디하지 않고 특별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총력을 다했다. 펜디가 올해 초 선보인 피카부백이 대표적 예다. 펜디는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 고급 핸드백’을 피카부백의 콘셉트로 잡았다. 이에 따라 소비자의 직업과 교육 수준까지 따져가며 적당한 사람들에게만 이 백을 판매한다고 홍보했다.

 

이제 명품 브랜드들은 너도나도 ‘잇’ 이후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 새로운 대안이 무엇이건 간에 ‘잇’보다는 훨씬 강력해야만 한다. 이미 ‘잇’이라는 늪에 한 번 빠졌다가 살아 나온 소비자들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현명해졌기 때문이다.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는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와 여성 패션지 <W Korea> 패션 에디터를 거쳐 현재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10아시아>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패션 관련 글을 기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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