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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대신 집중’ 21세기 日국토 정책 혁신

김제국 | 39호 (2009년 8월 Issue 2)
세계화는 우리 의식 속에 다양한 형태로 이미지화돼 있다. 농촌 어른들은 자식들이 보내주는 해외여행을, 대학생들은 ‘취업 수단’의 하나인 해외 어학연수를, 기러기 아빠는 환율 변동으로 매달 달라지는 송금액을, 기업은 환율에 따른 손익이나 가격 경쟁력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개인 주식거래자는 24시간 쉼 없는 세계 주식시장을 세계화의 이미지로 생각할 것이다.
 
세계화와 세계 도시화의 이면에는 국제 금융자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008년 엘렌 브라운은 <달러>라는 책에서 세계화의 동력인 국제 금융의 이면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한 이후, 신용 창출의 자유화와 화폐의 상품화를 통해 금융시장의 세계화를 촉발했다.
 
금융시장의 자유화와 세계화와 맞물려 1980년대 이후 ‘세계 도시(World City)’ 논의도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메가시티리전(Mega City Region·MCR), 즉 초광역적 대도시권(광역경제권)이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해 국토 정책의 기조를 균형 정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성장으로 바꿔 국토 개발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와 글로벌컨설팅사인 모니터그룹이 최근 실시한 20개 메가시티리전 경쟁력 평가에서 도쿄와 오사카경제권은 각각 종합 순위 3위와 10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도시 간 경쟁 촉발
1873년 쥘 베른이 발표한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프랑스 출신의 하인 파스파르투와 함께 런던을 떠나 수에즈에서 인도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80일 만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20세기 후반에는 그 시간이 3일로 단축됐다. 극단적으로 말해 19세기 세계를 횡적으로 관리하는 데 약 80개의 세계 도시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은 3개로 충분하다. 향후 교통 통신의 발달로 세계 일주가 하루로 단축된다면, 세계 도시는 뉴욕 하나만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코모리(小森正彦)는 <아시아의 도시 간 경쟁>(2008년)에서 도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본인의 우려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는 동북아시아 시간대의 국제 금융거래를 좌지우지하는 세계 도시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시간대가 비슷한 싱가포르가 가세한 형국이다. 서울은 아쉽게도 국제 금융의 둥지를 차지하기 위한 동북아 도시 간 경쟁 구도에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위기감은 도쿄에 이어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간사이경제권(關西經濟圈)의 거점인 오사카권은 도쿄권과 경쟁하던 과거 전략에서 벗어나 한국 부산권, 중국 상하이권 등 인접 국가의 대도시권과 연계하는 세계화 전략으로 전환했다.


 
국토 균형 정책의 포로가 된 1980년대
21세기 일본 국토 정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대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총리의 세계 도시화 전략 실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維新)이 1980년대 일본 국토 정책, 즉 수도 이전과 테크노폴리스 등 국토 균형발전 정책이 남긴 유산을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가 본격화한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은 나카소네의 세계 도시화 전략을 실패하게 만든 국토 균형 정책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 관료, 정치인, 지방 건설 토호 등 이권의 해체를 뜻한다.
 
나카소네는 1970년대 다나카 내각에서 통산산업성과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세계 경제의 변화를 체감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홍콩의 중국 반환 일정이 가시화하자, 도쿄를 홍콩을 대신하는 국제 금융도시로 키우기 위한 세계 도시화 전략을 모색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제4차 전국 종합계획(1981년 착수, 1987년 승인)에 세계 도시화 전략을 담아 그 밖의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은 대외적으로 1985년 이후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 및 내수 확대 요구가 강화되는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사무실 면적 부족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는 등 건설 자본의 규제 완화 압력도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카소네 총리는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해 기존의 국토 균형 정책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정할 수 없었다. 다나카(田中角榮) 전 총리의 영향 아래 있는 인물로 내각을 채워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까지 자초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970년대 초반 국정 방향을 성장 노선에서 균형 노선으로 전면 전환하고, ‘일본열도 개조론’을 국토 균형 정책으로 발표한 인물이다. 그는 1972년 아동 수당제 도입, 1973년 노인 의료비 전액 지원, 1974년 종신 고용제 도입 등 전방위적인 균형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자민당 일당 지배 체제의 대외적·정치적 기반이 안정됐고, 내부적으로는 자민당 내 파벌 균형이 무너져 다나카 파의 당 지배가 강화됐다.
 
1974년 퇴임한 다나카 총리는 1976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후 성립된 오히라, 스즈키, 나카소네 내각에도 미쳤다. 다나카는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의 공공사업 확대를 통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자민당에 대한 지배력마저 확보했다. 그 결과 중앙 관료의 예산 책정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됐고, ‘예산의 정치화’가 심화됐다. 경제의 공공사업 의존성이 강화돼 노동계와 재계의 견제력도 약해졌다.
 
나카소네 총리는 이러한 정치 경제적 여건 아래서 1987년 확정된 제4차 전국종합개발계획을 통해 도쿄의 세계 도시화 전략과 지방의 발전 열망을 대변한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2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세계 도시화 전략 외에 수도 이전 계획, 26개 테크노폴리스 건설 계획, 정비 신칸센, 42개 리조트 건설 계획 등 국토 균형발전 정책의 종합선물세트를 마련한 것이다. 재정 적자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민간 자본을 활용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확정 후 불과 4년 만에 종료됐다.
 
1985년 이후 국가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 1990년대 재정 적자가 GDP의 70%에 이르렀다. 1990년 3월 대장성이 부동산 관련 대출의 총량 규제 방침을 밝히자 엔화, 채권, 주식, 지가(地價)가 동시에 대폭락했다. 이에 앞서 금리 인상까지 단행되자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의 3배로 늘어난 지가와 주가는 1990년 붕괴되기 시작해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한 2001년 그동안의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21세기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
2007년 부동산 조사기관인 모리빌딩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 23구에서만 바닥 면적 1만㎡ 이상의 대규모 빌딩이 119만㎡ 공급됐다. 빌딩은 1986∼2006년 연평균 약 105만㎡씩 공급됐는데, 600여 개의 초고층 빌딩이 도쿄 만에 집중 건설됐다. 과거 공장이 있던 지역이 집중적으로 고층 맨션과 오피스 등의 주거지로 전환된 것이다. 2009년 도쿄를 방문한 이방인에게는 600여 개의 초고층 빌딩이 위용을 자랑하는 도쿄 만이 미국 뉴욕 맨해튼과 다를 바 없었다.
 
2001년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1980년대 4%의 성장을 유지하던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 후 1%로 주저앉았다. 지가와 주가의 폭락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비율을 8%까지 끌어올렸다. 2001년 고이즈미 총리는 제1차 내각을 구성하면서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를 경제재정장관과 금융청장관에 동시에 임명했다. 정치 연고가 전혀 없는 그를 선택한 것은 연고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선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타협 없는 금융 개혁을 상징하는 결정이었다. 구조 개혁은 금융 정책, 국토 정책, 그 외 각종 정책을 배경으로 구축된 이권의 먹이사슬을 해체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케나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외톨이였던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조건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은 악역(?)을 담당할 인물로 그들을 선택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기존의 국토 균형발전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요 법률을 없애고 바꿨다. 1960년대 국토 균형발전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된 신산업도시건설촉진법과 공업정비특별지역정비촉진법이 2001년 폐지됐다. 이듬해에는 대도시권 성장을 막아온 도쿄권과 오사카권 공장등제한법도 사라졌다. 같은 해 세계 도시화 전략의 기치 아래 구조개혁특별구역법과 도시재생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대도시권의 규제를 완화했다. 2003년 중앙 부처의 공공사업 남발을 막기 위해 사회자본정비중점계획법을 제정했고, 2005년 지방 주도의 광역경제권 개발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토형성계획법을 만들었다. 2006년 다나카 총리의 공업 분산 정책의 핵심 수단이었던 공업재배치촉진법 폐지를 끝으로, 국토 균형발전 정책을 배경으로 한 이권의 삼각구조가 해체됐다.
 
잃어버린 10년에 21세기 준비
일본 국토 균형 정책의 이면에는 지대 추구를 매개로 한 이권의 삼각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21세기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은 바로 이러한 이권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 밑그림은 1998년 확정된 ‘21세기 국토의 그랜드 디자인’에 담겼다. 이 계획은 그동안 일본 국토 정책의 최고 목표였던 ‘균형’이란 용어를 과감히 삭제했고, 격차의 불가피성을 전제한 후 선택과 집중에 의한 성장을 분명히 밝혔다. 계획 방향에 “기업은 최적 입지를 찾아 해외로 나가고, 국경을 넘어선 지역 경쟁이 심화돼 경제의 효율화, 기술 혁신의 촉진, 국토 기반 투자의 중점화와 효율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명시해 기존에 추진하던 각종 균형발전 사업을 유보한다고 선언했다. 대표적으로 국회가 주도하던 수도 이전 계획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지역 정책은 중앙 집권적 추진이 아닌 민간과 지방정부의 역할 분담 속에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토 기반 정비 사업에서 의사결정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중점적·효율적으로 기반 투자를 하며, 건설 비용을 줄이고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1990년대에 일본은 21세기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라는 전환기에 대비하는 국가 생존 전략이었다.
 
21세기 지속 가능한 세계 도시화 전략
일본 내에서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논의도 적지 않다. 특히 쇠퇴하는 제조업을 대신해 국제 금융자본, 즉 자본 축적의 법인구조(각종 금융기관)를 유치하려는 세계 도시화 전략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세계화가 지역·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사회복지 수요의 증가 및 초고층화 등 세계 도시화를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 투자 등으로 재정 부담이 가중되고, 국제 금융자본 유치를 명분으로 규제를 완화하며, 환경 파괴를 불러온다는 반박이다.
 
일본에서 이런 문제가 부분적으로 현실화된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부동산 버블의 붕괴와 함께 대도시권의 경제가 침체되면서 지역 간 격차는 물론, 계층 간 소득 격차도 완화됐다. 반면 고이즈미 정권의 세계 도시화 전략, 더 정확히는 대도시권 중시 정책 아래서 이들 격차는 경제 성장과 함께 다시 확대됐다.
 
하지만 21세기 일본의 세계 도시화 전략이 1980년대 나카소네의 세계 도시화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요컨대 경제 성장, 환경 보호, 사회 통합을 추구하는 조화롭고 지속 가능한 세계 도시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첫째, 지방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둘째, 이전과 달리 각 대도시권이 독자적인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고 기술력 제고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넷째, 환경 위기 및 고령화 등의 여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다섯째,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교육 및 보건 등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고 있다.
 
긴 안목으로 미래 준비
이전 정부의 국토 정책은 우리에게 무거운 유산을 남겼다. 현 정부 역시 30년 전 일본이 밟아갔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980년대 나카소네 내각은 세계 도시화 전략을 천명했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공간적 균형발전 전략을 버리지 못했다. 상반되는 두 전략은 공교롭게도 ‘과도한’ 지대 추구가 가능하다는 비합리적 기대를 증폭시킴으로써, 즉 일종의 공진(共振) 현상을 일으킴으로써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모모세 타다시(百瀨格)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1997년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책을 썼다. 그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경쟁자를 짓밟고 내쫓는 우리들끼리의 유치한 경쟁의식을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한국 경제가 국내에서 인접한 동업종 회사와 아이들같이 신경전을 벌이는 유치한 경쟁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은 아시아의 리더가 된다든지, 아시아 전체의 공존공영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세계화의 한복판에 서 있는 지금, 자신들끼리의 소아병적 경쟁의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됐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정책을 만들고 다음 날 실행한다. 혹자는 이것을 ‘다이내믹 코리아’라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뒤집어보면 소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큰 배는 항로를 함부로 돌리지 않는 법이다.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면 멀리 내다봐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깊이 숙고하고 긴 안목으로 준비하는 태도다. 우리의 문제를 솔직히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고난의 시기에 일본이 미래를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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