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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패션, 대형 매장 고집하는 이유는?

홍성용 | 35호 (2009년 6월 Issue 2)
해외여행 기간은 주요 의류 브랜드의 세일 기간과 겹친다. 그래서 파리나 도쿄 등 대도시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자라(ZARA)나 H&M, 갭(GAP), 유니클로 매장에 들르면 사방에서 한국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브랜드들은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혹은 ‘SPA(제조 직매형 의류 전문점, DBR TIP 참조)’로 불린다. 

[DBR TIP] SPA란?
 
SPA는 ‘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의 약자다. 미국 청바지 회사 갭이 1986년 도입한 개념으로, ‘전문점(speciality retailer)’과 ‘자사 상표(private label)’ 및 ‘의류(apparel)’의 합성어다. 의류를 중심으로 기획부터 생산과 소매 활동까지 일관된 시스템을 갖춘 기업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매장의 공통점이다. 글로벌 SPA 브랜드들은 한결같이 초대형 매장을 갖고 있다. 1층짜리 건물을 사용할 때에는 건물 전체를 매장으로 꾸미기도 한다. 실제로 영국 SPA 브랜드인 톱숍(Top Shop)의 단독 매장 규모는 9200㎡(2780평)에 달한다. 

하지만 SPA들이 대형 매장을 고집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보통 6, 7주 만에 한 상품의 기획부터 판매까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다.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에 집중적으로 제품을 판매해 이익을 얻는 게 이들 브랜드의 핵심 전략이다. 따라서 재고를 얼마나 신속하게 없애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다. 특정 상품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팔아야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대형 매장을 운영하면 수많은 상품을 함께 진열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제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기가 쉽지 않다. 대형 매장을 운영하다 자칫 특정 제품의 재고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도 있다. 대규모 재고가 생기면 SPA 브랜드는 치명타를 입는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결같이 대형 매장을 고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치밀하고 전략적인 대형 매장 운영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VMD(Visual Merchandizing Display)를 적극 활용한다. 많은 한국 기업들은 VMD를 단순히 예쁘게, 혹은 독특하게 매장을 구성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이에 대해 훨씬 전략적이고 치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SPA 브랜드들은 대형 매장의 VMD로 고객을 감동시킨다. 첫째, 수백 평에 이르는 대형 매장을 마련하면 고객들이 잠깐 들렀다가 나오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아무리 성격이 급한 고객이라도 최소 몇 분은 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고객들의 체류 시간이 늘어나면 당연히 상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진다.
 
둘째, 이들 업체들은 고객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 전시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매장 입구에 별도의 디스플레이 테이블을 두고, 고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이곳에 다양한 상품을 전시한다. 전시 방법도 접어두거나, 옆으로 걸거나, 정면을 드러내는 등 다양한 형태를 활용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는 매우 치밀한 의도를 담고 있다. 같은 상품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노출해 고객들의 구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흥미로운 점은 수백 평 이상의 면적을 채워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열되는 상품 숫자는 적다는 사실이다. 단위 면적당 상품 종류를 비교해보면,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국내 브랜드보다 훨씬 적은 수의 디자인을 진열하고 있다. 자라는 평균 스타일 수가 매일 1800∼2000여 가지다. 숫자만 보면 적지 않다. 하지만 남성복과 여성복을 동시에 판매하는 데다 매장의 크기가 무려 3400평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숫자라고 보기 어렵다.
 
셋째는 매장 디자인이다. 자라 등 SPA 브랜드 대부분은 중저가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매장에 산처럼 물건을 쌓아놓는 할인점이나 가판대 형식은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자라는 패션 브랜드들이 두려워하는 ‘블랙’을 매장 색상으로 선택했으며, H&M도 고급 매장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즉 제품 가격과 어울리지 않지만 매장만큼은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중저가 물건을 팔면서도 매장은 고급스럽게 꾸며놓아 성공한 이마트의 사례가 있다. 마찬가지로 SPA 브랜드들은 빽빽하지 않게 상품을 진열해 결코 품질이 떨어지는 옷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넷째, 이들은 상품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매장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우선, 상품에 대한 고객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조명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통상 최고급 패션 매장들은 고가 상품 특성상 매장에서 한정된 상품만 진열한다. 고객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전체 조명은 줄이면서 특정 상품에 집중적으로 빛을 투사하는 스폿 방식을 선택한다. 많은 한국의 중저가 매장들은 상품의 숫자를 줄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런 방식을 피한다. 그러나 자라는 매장이 넓어 충분한 상품 수를 진열하면서도 동시에 스폿 조명을 사용해 특정 상품의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SPA의 선두주자인 갭도 전반적인 조도를 은은하게 하면서 집중적인 스폿 조명을 하여 넓은 매장을 순회하는 고객들이 특정 상품에 주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넓은 매장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제품의 재고를 빠르게 소진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스폿 조명이다.
 
다섯째, SPA 업체들은 가격이 싼 제품을 대규모로 구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대다수 SPA 업체들은 여러 벌의 옷을 샀을 때 카운터에서 쉽고 빠르게 계산하고 포장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많은 고객들이 편안하게 옷을 입어볼 수 있도록 특정 장소에 꽤 큰 탈의 공간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브랜드 가치와 매장 크기의 상관관계
이런 업체들이 대형 매장 대신 다른 선택을 하면 어떨까? 국내에 들어온 망고(Mango)의 사례가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망고는 대형 단독 매장 대신 백화점 판매를 선택했다. SPA 업체들의 핵심 장점으로 여겨졌던 대형 매장을 과감히 포기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국내 백화점 매장들은 매출 실적을 분석해 계절별로 매장의 위치를 조절한다. 따라서 망고는 계절에 따라 자주 매장의 위치를 바꿔야 했다. 게다가 매장 면적도 수시로 변했다. 공간이 바뀌면서 기본적인 마케팅 전략도 매번 수정해야 했다. 특히 스페인 본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으면서 매장당 입점비를 매번 지불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4만5000∼5만5000유로의 지출이 생겼고 수익은 악화됐다.1
 
필자는 한 남성 패션 브랜드의 매장 개념 및 디자인을 10년째 담당해왔다. 이 과정에서 패션 브랜드의 가치와 매장 크기의 관계를 직접 현장에서 체험했다.
 
처음 이 브랜드를 만났을 때, 평균 매장 면적은 10∼13평에 불과했다. 이런 매장 규모에서는 아무리 상품의 가치를 드러내려 해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 이런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필자는 상품 수를 제한하는 대신, 강한 디자인을 통해 고객들이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받도록 유도했다. 2001년부터는 이 업체와 상의해 백화점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면적을 받아내도록 유도했다. 이 브랜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제품 경쟁력을 이미 확보했기 때문에 30평 정도의 매장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경쟁 브랜드들과 명확한 차별화가 진행됐다. 매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장이 크고 성과가 좋다 보니 백화점 내부 공간 개편 때마다 자리를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이로 인한 비용도 줄어들었다. 일부 매장은 7, 8년째 한곳에서 그대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후 강력한 상품 경쟁력, 스타 패션 디자이너, 매력적인 매장은 선순환의 삼각 구도를 형성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브랜드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비단 SPA 브랜드가 아닌 고가의 브랜드도 매장 면적이 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그림1)
  
매장은 곧 브랜드
구찌를 부활시켰던 도메니코 데솔레 전 최고경영자(CEO)가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전략이 브랜드 관리였다. 이를 위해 그는 매장 관리에 주력했다. 변호사 출신의 데솔레는 모든 매장을 직접 관리했다. 그는 ‘매장 = 브랜드’로 이해했다. 고가의 패션 브랜드들은 브랜드 가치를 잃는 순간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미 구찌는 집안싸움으로 브랜드 가치가 급격히 하락했고, 매출도 급감한 바 있다.
 
데솔레는 브랜드 관리를 위해 매출에 도움을 주지 않는 매장은 가차 없이 없앴다. 대신 직영 매장을 확장했다. 2003년 자료에 의하면 구찌 매장의 80%가 직영점이며, 나머지 20%가 백화점 같은 편집 매장에 속했다. 그는 매장 크기를 더욱 넓고 크게 만들고, 진열하는 상품 수는 오히려 줄이면서 브랜드 가치와 연계한 고가 상품 중심으로 진열했다. 매장이 넓어지면서 판매점은 갤러리 분위기를 연출했고, 모든 상품이 고객에게 직접 노출됐다. 이에 따라 고객들의 구매 욕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데솔레의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구찌는 살아났다. 직영점을 넓히는 방식은 브랜드 가치 증대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미 스타벅스 같은 다른 업종의 기업들도 큰 효과를 보고 있다.
 
패션 기업에 있어 직접적인 고객 접점인 매장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 때로는 패션 브랜드의 흥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 패션 브랜드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매장 전략을 짜기보다 단기적 매출 증대나 원가 절감에 치중하고 있다. 때로는 매장이 소모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매장 숫자 늘리기에 집착해 10평 안팎의 소규모 매장을 고집하는 기업도 있다. 단기적인 매출 증대나 원가 절감에만 치중하면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기업은 이제 고객과 상품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공간을 새롭게 재조명해야 한다.
 
편집자주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공간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공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직원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객과 만나는 소중한 접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영학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합니다. 이 분야의 개척자인 홍성용 모이스페이스디자인 대표가 공간의 경영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필자는 모이스페이스디자인(www.moi-n.com) 대표이며, 홍익대 및 계원디자인예술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영화 속의 건축 이야기> <건축가의 특별한 여행법> <스페이스 마케팅>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다양한 공간 기획과 건축 설계 및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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