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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림한 것이 아름답다… 제품 수를 줄여라

안상훈 | 35호 (2009년 6월 Issue 2)
어리석은 농부’라는 우화가 유대인에게 전해 내려온다. 한 농부에게 두 마리의 닭이 있었다. 한 마리는 매우 건강하게 잘 자랐지만, 다른 한 마리는 늘 비실비실하기만 했다. 농부는 어떻게 하면 쇠약한 닭을 잘 키울까 고민한 끝에 나름 기발한 해결책을 떠올렸다. 건강한 닭을 잡아 죽을 끓여 병약한 닭에게 먹이기로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다. 많은 기업들이 범하고 있는 전략적 오류를 날카롭게 풍자한 블랙 유머라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제품들을 생산 판매하기 위해 우량 제품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재 기업인 A사를 보자. 이 회사는 총 200여 개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판매량 상위 5개 제품의 매출 합은 7000억 원에 이르는 반면, 하위 150개 제품의 매출액은 3700억 원에 불과하다. 즉 상위 5개 제품의 품목당 매출액은 1400억 원이지만, 하위 150개 제품의 품목당 매출액은 약 25억 원밖에 되지 않는다.
 
혹자는 하위 150개 제품도 적지 않은 매출을 창출하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을 세심히 살펴보면 여러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열등 제품이 우량 제품의 매출을 잠식한다. 고객은 동일한 카테고리 내에서 하나의 제품만을 선택해 구매한다. A사에는 특정 카테고리 내에 신규 수요를 창출할 만큼 충분히 세분화되거나 차별화되지 않은 제품들이 다수 존재한다. 고객에게 너무 많은 선택 가능성을 주면 이에 따른 혼란이 생긴다. 고객이 구매를 포기하거나, 우량 제품 대신 열등 제품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때 우량 제품의 매출이 줄어든다.
 
둘째, 우량 제품이 창출한 이익을 열등 제품이 소진한다. 열등 제품은 적은 판매량 때문에 개발, 생산, 물류, 판매에서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기 어렵다. 마진 또한 극히 낮아 상당수가 적자를 면치 못한다. 때문에 우량 제품이 창출한 이익의 일부는 열등 제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셋째, 열등 제품의 판매를 위해 우량 제품이 희생된다. 기업이 경쟁력이 낮은 제품을 도소매점을 통해 유통시키려면 유통업체들에게 그만큼의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당연히 유통업체들은 고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우량 제품의 가격 할인이나 끼워팔기 등의 판촉 지원을 반대급부로 요구한다. 이는 우량 제품의 수익성과 브랜드 가치를 훼손한다.
 
넷째, 마케팅 자원의 분산으로 우량 제품의 육성이 어렵다. 제한된 마케팅 예산이나 인력으로 200여 개에 달하는 제품을 세심히 관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관리의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는 우량 제품에 대한 마케팅이 안일하게 전개되기 쉽다. 광고 및 판촉 예산 등이 제품별로 잘게 쪼개지고 나누어짐에 따라 실효성 없는 마케팅 활동이 남발된다. 결과적으로 영업 사원이나 고객 모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제품들이 늘어나는 악순환 구조가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림1>은 어떤 이유로 제품 품목이 난립하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모든 기업은 성장 및 수익 극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신규 사업에 진출하고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문제는 이런 활동이 고객 가치 혁신보다는 단순한 외형 확대나 경쟁 제품 모방에 그칠 때가 많다는 점이다. 150개에 달하는 A사의 열등 제품들 중 상당수는 경쟁사의 혁신 제품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반사적 모방 제품이거나, 고객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확장 제품이다.
 
물론 모든 새로운 시도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시도가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향후에도 성과를 내기 어렵거나, 비효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시행하는 기업은 드물다. 150개에 달하는 제품군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보고에 A사 담당 임원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아, 그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일단 다른 신제품을 내놓고 그 제품의 영업 실적을 관리하는 일이 더 급하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립하고 있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우량 제품 위주로 재정비하는 일은 기업의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제품 품목 최적화는 최고경영자(CEO)의 강력한 의지와 체계적인 실천 방안이 없으면 현실화되기 어렵다. 경영진의 강한 의지가 없으면, 이를 시행해야 할 일선 관리자가 자신의 시급한 일상 업무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하기 쉽다.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접근 방법이 없으면, 조직 내외부의 이해관계자들을 충분히 설득시키기 어렵다. 그렇다면 제품 품목 최적화를 위한 체계적 접근 방법은 무엇일까? 단계별로 살펴보자.
1단계 전사적 관점에서 자사 제품의 총 현황을 가감없이 진단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이 분석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사업부 담당 임원은 카테고리 단위 관점에서 총량 성과를 관리하고, 제품 및 브랜드 관리자는 개별 제품 단위 관점에서 성과를 관리할 때가 많다. 때문에 정작 전사적 관점에서 자사가 보유한 다수 제품의 존재 이유와 시장 성과를 성찰해보는 기업은 많지 않다. CEO가 제품 품목 최적화를 주도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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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는 제품 품목 최적화 진단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제품 포트폴리오 지도를 완성하는 일이다. 카테고리, 제품, 브랜드별로 해당 제품이 어떤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있으며 매출, 원가, 손익 관점에서 어떤 성과를 창출하고 있는지, 시장점유율 등 성장성 추이나 수익성 추이는 어떤지, 경쟁자와의 차별 요인은 무엇인지 등을 낱낱이 분석해야 한다. 이 분석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카테고리 및 제품 간 잠식, 성과가 미흡한 군소 제품이나 브랜드 난립 등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선(카테고리)을 재편하고, 병사(제품)를 정비하며, 무기(브랜드)를 고도화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2단계 고객 지향적 관점에서 카테고리 재구성
많은 사람들이 카테고리를 단순히 생산 방식이나 판매 방식이 비슷한 제품의 집합 정도로 인식한다. 하지만 고객 요구가 세분화되고 제품 간 융합 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제품끼리 겹치거나 내부 경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활가전 업체가 에어컨, 선풍기, 공기청정기라는 3개의 카테고리를 운영한다고 가정하자. 사업 초기에는 3가지 제품군의 성격이 명확히 다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각 카테고리별 제품 종류가 늘어나면서 여러 문제점이 생긴다. 공기청정 기능이 있는 에어컨 제품이나, 냉방 기능을 장착한 공기청정기가 등장함에 따라 카테고리 간 내부 경쟁과 자기 잠식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각 카테고리가 제품 크기를 대형화 혹은 소형화하거나, 디자인을 달리하거나, 구매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내부 경쟁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제품의 복잡도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이 문제를 개별 제품이 아니라 카테고리 재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기업은 미래 사업 전략에 기초해 카테고리를 재정의, 세분화, 통폐합해야 한다.
 
3단계 ‘선택과 집중’에 기초해 제품 품목 최적화
새롭게 정리한 카테고리나 현재의 카테고리 밑에서 각 제품의 매출, 손익, 성장 잠재력을 평가해보자. 적지 않은 제품들이 타성적으로 생산, 판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사 매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제품을 없애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매출과 수익을 늘리려면 제품을 혁신해 성장 잠재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든지, 제품 품목을 과감히 줄여야 한다. 이를 통해 확보한 자원과 기회 비용을 성장 잠재력이 높은 다른 제품에 몰아줘야 한다.
 
유럽 최고의 트레일러 제조업체인 슈미츠 카고불은 지난 10년간 제품 가격을 30% 내렸다. 그럼에도 이 회사의 마진율은 같은 기간 2%에서 7%로 3배 이상 늘었다. 가격을 내리면 판매량은 늘어날지 몰라도 마진율 자체는 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슈미츠 카고불은 어떻게 성장과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을까?
 
이 회사의 CEO는 ‘포기를 통한 성장’이 비결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제품 품목의 90%를 줄이고, 오로지 4가지 기본 제품만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제품군을 4가지로만 한정하자 생산성은 4배 증가했고, 판매도 60% 늘었다.
 
제품 품목을 대거 줄인 후 10년간 슈미츠 카고불의 매출은 3억5000만 유로에서 13억 유로로 늘어났다. 시장점유율도 20%포인트 이상 증가했다. 이전에 해당 시장을 선도했던 경쟁 기업은 아예 사업을 철수했다.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제품 품목 최적화가 생존 위기에 놓여 있던 기업을 시장 지배 기업으로 변모시킨 셈이다.
 
개별 제품의 선택 사양도 합리적으로 줄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고객에게 많은 선택권을 주면 판매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정 수준을 넘어선 과도한 선택권 부여는 고객이 구매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제조업체가 높은 원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 유통업체가 초콜릿 제품 종류를 10개 진열했을 때와 3개 진열했을 때의 매출을 비교해보니, 3개 진열했을 때의 매출이 훨씬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4단계 브랜드 구조와 종류도 최적화
최근 KT는 ‘쿡(QOOK)’이라는 새로운 대표 브랜드를 내놓았다. KT가 그간 많은 돈을 들여 육성해온 메가패스, 메가티브이, 안(Ann) 등의 제품 브랜드를 폐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브랜드 통합으로 결합 상품의 판매를 늘리고, 광고비 등 관련 비용을 줄여 마케팅 투자수익률을 높이려는 목적이다.
 
대다수 기업들은 제품과 브랜드를 동일시한다. 즉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고객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인식한다. 따라서 브랜드 최적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브랜드 난립 현상이 일어나 기업이 저조한 판매 성과와 과도한 마케팅 비용 부담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고객은 고객대로 너무 많은 브랜드에 혼란을 느껴 그 회사의 대표 브랜드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웨덴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는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던 작은 회사들을 꾸준히 인수해 총 15개의 브랜드를 보유하게 됐다. 그런데 이 브랜드들을 각각의 회사별로 운영하다 보니 마케팅 투자수익률이 크게 떨어졌다. 이에 일렉트로룩스는 브랜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고객 조사를 통해 회사가 집중 공략해야 할 3개의 목표 시장을 정의하고, 브랜드 개수를 15개에서 3개로 줄였다. 아울러 일렉트로룩스라는 기업 브랜드가 이들 3개 제품 브랜드를 떠받치는 구조를 만들었다. 1996년 마이너스(-) 상태였던 이 업체의 영업이익률은 브랜드 구조조정 5년 만에 8.1%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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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은 브랜드 최적화 방법을 알려준다. 보유 브랜드의 개별 경쟁력과 각각의 역할을 분석해 정리할 브랜드를 골라내고, 남은 브랜드를 재배치해 역할과 기능을 최적화한다. 브랜드라는 무형 자산을 평가하고 조정하는 일이므로 계량적인 방법으로 정리할 브랜드를 골라내야 한다. 직관이나 근시안적 관점에서 브랜드를 줄이면 큰 낭패를 본다.
 
세계적 소비재 업체인 유니레버는 거듭된 사업 확장과 인수합병(M&A)으로 제품 구조가 상당히 방만해졌다. 1990년대 말 유니레버는 자사 브랜드들의 수익성을 검토한 결과, 1600개에 달하는 브랜드 중 1200여 개의 브랜드 매출이 전체 매출의 8%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1999년 ‘Path to Grow’라는 브랜드 합리화 전략을 마련하고, 브랜드의 수를 1600개에서 750개로 대폭 줄였다. 이후 5년간 유니레버의 매출은 11%, 영업이익률은 4.6%포인트 늘어났다.
 
불황기에는 특히 제품 품목을 최적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비용 절감 효과도 크고, 불황 이후를 대비한 성장 잠재력을 확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다다익선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 ‘비움을 통한 성장’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이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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