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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최고와 손잡는 루이비통

심정희 | 33호 (2009년 5월 Issue 2)
2009
년 2월 초 전 세계 루이비통 매장에는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질문은 단 하나였다. “스티븐 스프라우스의 그래피티(스프레이 등으로 벽에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는 거리 예술)가 들어간 가방이 대체 언제 나오는 거죠?”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문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내용만 달라졌을 뿐이다. “소피아 코폴라가 디자인한 가방이 나왔나요? 가격은 얼마죠?”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절로 떠오를 만하다. ‘스티븐 스프라우스와 소피아 코폴라가 누구지? 왜 그들이 루이비통 제품을 디자인한 걸까?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는 마크 제이콥스 아니었나?’
 
질문에 차례대로 답해보자. 스티븐 스프라우스는 1990년대 뉴욕을 주름잡던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였다. 그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그래피티와 길거리 감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의상들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패션계 및 예술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유명 인사(셀러브리티)였다.
 
소피아 코폴라는 영화 ‘대부’ 시리즈를 만든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마리 앙투아네트’ ‘처녀 자살 소동’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영화감독이다. 또한 전 세계 20∼30대 여성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패셔니스타이자 마크 제이콥스의 뮤즈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왜 루이비통 제품을 디자인했을까를 논하기 전에 마크 제이콥스라는 디자이너와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부터 살펴보자.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1997년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뽑혔다. 제이콥스는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악동’ ‘장난꾸러기’의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고 ‘전통’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루이비통이 그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례적인 일이 밥 먹듯 일어나는 패션계에서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젊은 마크 제이콥스에게 루이비통의 왕관을 씌워준 사람은 루이비통의 모기업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었다. 아르노가 제이콥스에게 한 요구는 짧고 간단했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루이비통의 주 고객인 중장년층마저 구태의연하다고 여기는 루이비통의 대표 가방 ‘모노그램 캔버스’의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변화시키라는 주문이었다.
 
너무 유명해져 소비자들이 식상해 하는 모노그램 캔버스를 어떻게 하면 ‘새롭고 신선하며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잇백(it bag)’으로 바꿀 수 있을까. ‘잇백’은 패션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꼭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할 최신 유행의 가방이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 have item)’ 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보유해야 할 제품이다.
 
방법을 고심하던 마크 제이콥스는 친구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스티븐 스프라우스를 떠올렸다. 제이콥스는 스프라우스의 장난기 가득한 그래피티가 모노그램 캔버스를 변신시켜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 결과 탄생한 제품이 2001년 등장한 그래피티 백이다. 그래피티 백은 유행에 민감한 젊은 소비자, 젊어 보이고 싶은 중장년층, 그리고 아르노 회장을 두루 만족시켰다.

그래피티 백의 외양은 모노그램 캔버스에 장난스러운 글자를 더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은 변화로 젊은 세대는 루이비통을 ‘우리 엄마와 할머니가 좋아하던 브랜드’가 아닌 ‘내가 갖고 싶어 하는 브랜드’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피티 백은 같은 디자인의 모노그램 캔버스보다 30% 이상 비쌌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히트를 쳤다. 그래피티 백의 대성공으로 루이비통은 아티스트의 작품을 장인 정신과 결합시킬 줄 아는 ‘쿨’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통해 콜래보레이션(협업)의 위력을 깨달은 마크 제이콥스는 또 다른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와도 손잡고 ‘모노그램 라인’ ‘체리 백’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낸다. 이에 사람들은 루이비통 가방을 아티스트의 예술품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아티스트의 창조적 손길이 더해진 가방을 사기 위해 꾸준히,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루이비통은 영리하게도 아티스트와 협업해 만든 제품들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만 한정 판매했다.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루이비통이 올해 내놓은 스티븐 스프라우스 라인은 200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존 그래피티의 컬러를 형광 컬러로 바꿔 ‘캐주얼하지만 고급스러운 가방’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만족시켰다.
 
반면 소피아 코폴라가 만든 제품들은 캐주얼한 분위기가 아니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 하는 고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자신을 소피아 코폴라와 동일시하려는 여성, 즉 패션 센스뿐 아니라 지적 소양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루이비통은 오는 6월 미국의 힙합 뮤지션 카니예 웨스트의 이름을 붙인 카니예 웨스트 라인을 출시한다. 이 제품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의 고객들을 강하게 끌어들일 가능성이 높다. 카니예 웨스트라는 뮤지션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할렘 가의 흑인 청소년들이 루이비통 가방과 신발을 사기 위해 적금을 들 날이 머지않았다.
 
최근에는 루이비통뿐 아니라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아티스트 및 유명 인사들과 속속 손잡고 있다. 프라다는 일러스트레이터 제임스 진과 손잡고 독특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새겨진 가방, 신발, 의류 등을 선보였다. 에르메스도 추상화의 대가 조셉 앨버스의 작품을 재현한 ‘사각형에 대한 경의’라는 실크 스카프를 내놓았다. 질 샌더는 마크 로스코의 회화에서 영감을 얻은 의상을, 돌체 앤 가바나(D&G)는 비주얼 아티스트 줄리앙 슈나벨로부터 영감을 받은 의상을 출시했다.
 
이런 협업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외부 인사에게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어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신선하게 바꾸고 매출을 늘리는 일은 콜래보레이션의 기본 장점에 불과하다. 콜래보레이션은 성장기와 성숙기를 거친 후 쇠퇴하기 마련인 브랜드의 수명 주기를 바꿀 뿐 아니라, 계절 변화에 따라 신상품을 내놓는 패션계의 제품 공급 주기까지 무너뜨리는 위력을 지녔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겠는가.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는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와 여성 패션지 ‘W Korea’ 패션 에디터를 거쳐 현재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10아시아’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패션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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