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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제 대중화 시대 여나

나준호 | 31호 (2009년 4월 Issue 2)
대부분의 아날로그 매체가 디지털화에 밀려 ‘마지막 숨결’을 몰아쉬고 있다. 비디오와 카세트테이프는 이미 ‘멸종’ 직전이며, 최근에는 CD도 MP3 같은 디지털 음원에 밀려나는 추세다. 하지만 유독 책만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떨치며 아날로그의 ‘마지막 성역’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책도 디지털 기술을 앞세운 신 매체의 도전을 받았다. 소니 등 전자 기업들은 2000년대 초반 의욕적으로 전자책 단말기(e-Book Reader)를 내놓으며 종이책을 대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전자책은 주류 시장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종이책에 비해 가독성과 사용 편의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가격도 비쌌고, 콘텐츠마저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첨단 기술을 자랑했던 전자책은 ‘구닥다리’ 종이책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캐즘(chasm)’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마존의 킨들, 전자책 부활의 불 밝히다
종이책은 앞으로도 계속 디지털의 공격을 막아내고 지배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전자책이 다시 주류 시장에 도전하고, 전자책 콘텐츠 매출이 증가하는 등 상황이 크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책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주인공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2007년 1월 전자책 단말기 ‘킨들(Kindle)’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전문가들의 부정적 예상을 뒤엎고 멋지게 성공해 다소 비싼 가격(350달러)에도 불구하고 2008년 한 해 동안 무려 50만 대가 팔려나갔다. 디스플레이 제작사 PVI가 패널 공급 부족 문제를 겪지 않았다면 더 많이 팔릴 수도 있었다.
 
관련 매출도 호조세다. 2008년 킨들용 전자책 콘텐츠 매출액은 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같은 기간 단말기 매출은 1억7000만 달러) 이런 성공에 고무된 아마존은 2009년 2월 업그레이드판인 ‘킨들2’를 시판했다.
 
시장의 호의적 반응을 감안할 때, 킨들의 성공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씨티투자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킨들의 2010년 판매액은 8억9000만 달러(350만 대)에 이를 전망이다. 전자책 판매 전망치도 무려 6억1000만 달러나 된다.
 
킨들의 성공은 전자책에 대한 시장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많은 해외 기업들은 이미 발 빠른 행보로 다양한 단말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말기 시장에서는 경쟁 체제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전통의 강자’ 소니는 2008년 10월 새로운 단말기 PRS-700을 발표하며 과거 실패를 설욕할 채비를 갖췄다. 후지쓰는 흑백의 한계를 넘어 컬러 구현도 가능한 단말기를 공개했고, 필립스에서 분사한 아이렉스(iRex)는 A4 문서를 실제 크기로 볼 수 있는 10.5인치 단말기를 내놓았다. 유럽의 벤처 기업 폴리머비전과 플라스틱로직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단말기를 개발 중이다. 삼성전자도 올해 6월경 전자책 ‘파피루스’를 내놓을 예정이다.
 
전자책 콘텐츠 시장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우선 아마존의 공격적 사업 확대에 자극받은 업계 2위 반즈앤노블이 전자책 시장을 새롭게 주시하고 있다. 반즈앤노블은 온라인 전자책 기업인 픽션와이즈(Fictionwise)를 인수했으며, 전자책을 블랙베리 스마트폰 용도로 개발·공급하는 등 나름대로 차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 업계의 강자 구글도 전자책 콘텐츠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구글은 이미 2004년부터 디지털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700만 권이 넘는 콘텐츠를 확보해놓았다. 또 올해 2월 소니와 전자책 제휴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인 사업화 행보를 보이고 있다.
 
e-Book이 재조명 받는 이유
이처럼 전자책이 다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단말기의 발전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인 킨들을 살펴보자. 킨들은 가독성과 사용 편의성 부족이라는 기존 전자책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우선 e-잉크(e-ink)라는 신기술을 적용해 가독성을 크게 높였다. e-잉크는 전기 자극에 따라 검은색과 흰색 잉크 알갱이를 적절히 섞어 나타내는 신기술이다. 기존 LCD 화면은 장시간 이용하면 사용자의 눈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었지만, e-잉크는 마치 진짜 책을 읽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킨들은 폰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하고, 무선으로 책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는 장점도 가졌다.
 
사용 편의성도 뛰어나다. 킨들은 연필만큼 얇고, 책보다 가벼우며, 매뉴얼을 읽지 않고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사용법이 쉽고 직관적이다. 최신 시판된 킨들2는 텍스트를 읽어주는 TTS(Text-To-Speech) 기능도 갖추고 있다.
 
구매 경제성 역시 좋은 편이다. 킨들 단말기 가격은 350달러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전자책 콘텐츠 가격은 종이책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20달러 정도 하는 종이책 대신 10달러짜리 전자책을 3040권만 사면 단말기 가격이 빠진다는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전자책 콘텐츠의 공급량 증가다. 요즘에는 국내 출판사들도 책의 마지막 프로모션 단계에서 전자책 포맷을 많이 이용한다. 책이 나온 지 1, 2년이 지나면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재고 부담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근에는 구간(舊刊) 도서의 전자책 콘텐츠가 많이 늘었다.
 
요즘 미국에서는 아예 신간 서적의 종이책과 전자책을 함께 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자책은 제반 비용(제조, 유통, 마케팅)이 종이책보다 훨씬 적게 든다. 따라서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최종 이익은 종이책과 비슷해진다. 아마존이 킨들용으로 판매하는 전자책은 신, 구간을 통틀어 2007년 시판 당시 8만8000권에서 2009년 3월 현재 24만5000권으로 크게 늘었다. 소니도 구글과 제휴해 50만 권 분량의 전자책 콘텐츠를 확보했다.
 
세 번째 이유로는 전자책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 변화를 들 수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모니터로 문서를 읽는 것을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문서나 신문을 PC 모니터뿐만 아니라 PDA와 휴대전화를 통해서도 읽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자책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자책은 지식 정보 시대에 강조되는 효율적인 독서에도 적합하다. 현대의 책은 마음의 양식보다는 실용 정보나 기술을 습득하는 정보 채널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이런 맥락에서 원하는 곳을 찾아 필요한 부분만 읽는 효율적인 독서에는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훨씬 편리하다.
 
e-Book, 향후 2, 3년이 중요한 전환점
전자책 시장은 앞으로 2, 3년 내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할 전망이다. 전자책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2008년 1분기 이후 전자책 콘텐츠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미국의 전자책 콘텐츠 시장은 2008년 1년간 5240만 달러에 이르러, 유례없는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전년보다 65%나 성장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질적 전환이다. 전자책 시장은 앞으로 경쟁의 양상과 킬러앱(killer application·시장을 재편하고 경쟁 제품을 완전히 몰아내는 압도적인 제품이나 서비스) 측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구도로 흘러갈 전망이다.

먼저 시장 경쟁은 앞의 <표>에서처럼 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가치 사슬이 형성되면서, 단말기 경쟁에서 종합 솔루션 경쟁으로 모습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업이 가치 사슬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단말기보다는 서비스·플랫폼과 비즈니스 모델에 좀더 무게중심을 둬야 할 것다. 이런 측면에서 선두주자인 아마존은 분명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후발 기업들의 도전도 만만치는 않을 전망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구글과 소니가 올해 2월 결성한 연합 전선이다. 구글의 방대한 콘텐츠와 편리한 검색 서비스, 그리고 소니의 하드웨어는 아마존에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하다. 애플이 새로운 다크호스가 될 가능성도 있다. 사실 콘텐츠-서비스-단말기의 트로이카형 솔루션 사업은 애플의 주특기다. 아이팟(iPod) MP3 플레이어나 아이폰(iPhone)도 이 방식으로 성공했다. 이미 애플의 아이튠스 서비스는 전자책도 소량이나마 팔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애플의 차세대 제품은 저가형 노트북(넷북)이 아니라 컬러 터치스크린을 장착한 전자책 단말기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킬러앱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 전망이다. 현재 전자책 콘텐츠 시장의 주력 품목은 텍스트 위주의 소설과 에세이 등이다. 그러나 전자책 단말기의 화면이 커지고 컬러 구현 능력이 진행되면, 만화나 교과서가 새로운 킬러앱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먼저 저렴하고 재미있는 만화는 ‘소일거리용’ 수요가 급증할 것이다. 교과서는 또 다른 ‘블루오션’이다. 학생들은 무겁고 비싸며 검색 기능도 없는 종이책 교과서를 가방에 여러 권 넣고 다니는 것보다, 수백 권의 책을 저장할 수 있는 전자책을 더 좋아할 것이다.
 
실제로 아마존도 대학 교재 전자책 시장 진출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바클레이 증권은 아마존이 대학 교재 시장에 진출하면 관련 매출이 2010년 2억 달러, 2013년 9억7000만 달러로 늘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e-Book 부활, 기회인가, 위협인가
전자책의 부활은 디스플레이 등 관련 IT 기기는 물론 출판과 미디어 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MP3가 음악 시장을 크게 변화시킨 것처럼 말이다.
 
전자책 단말기는 무엇보다 디스플레이 업계에 커다란 신규 시장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플렉서블 디스플레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전자종이(e-paper) 등 3개 기술은 그동안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거론돼왔지만, 그 상품화는 의외로 더디게 진행돼왔다. 수익을 창출할 만한 차별적 수요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자책은 3가지 기술이 진가를 발휘할 좋은 미래 수요처가 될 수 있다. 시장조사기관 나노마켓은 전자책 시장에서 전자종이가 2015년 기준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전자책 단말기는 모바일 기기 분야에도 매력적인 틈새시장이 될 수 있다. 특히 전자책 도입기인 향후 2, 3년은 상당히 큰 시장 기회를 가져올 것이다. 이에 따라 조만간 지배적 제품 디자인(dominant design)을 만들어내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한편 전자책은 출판이나 신문 등 인쇄 미디어의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신문 유통이 활성화되면 신문사들은 편집, 인쇄, 배달을 포괄하는 수직 통합 사업 구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즉 규모의 경제와 전국적 배달 시스템 등 오프라인 유통망에서의 강점과 전단지 배포 등에서 오는 수익이 없어질 우려가 있다. 또 투자비를 뽑아내지 못한 인쇄 윤전기 태반이 놀 수밖에 없는 상황도 올 수 있다.
 
결국 정보 미디어 시장의 게임 룰은 부수 판매 경쟁에서 양질의 콘텐츠 창출 경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바로 해외 언론사들이 킨들을 통한 인터넷 배급 실험에 적극 동참하는 이유다. 킨들로 배포되는 신문·잡지는 올해만 해도 1월 45개에서 3월 59개로 크게 늘었다.
 
종이책은 없어질 것인가
전자책 시장이 빠르게 성장한다고 해서 종이책이 당장 없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종이책이 주류를 형성하고 전자책이 이를 보완하며 양자가 공존하는 시대가 전개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부활은 ‘종이책은 장기적으로 없어질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책은 TV, 인터넷, 비디오 게임 등의 등장과 함께 이미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식의 보고로서, 마음의 양식으로서 수백 년 동안 지켜왔던 문화계의 ‘왕권’을 다른 매체들에 서서히 이양해왔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호주 맥쿼리대 셔먼 영 교수(미디어학)는 “책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책은 21세기 전자책의 부활과 함께 물리적 형태를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지식과 통찰, 즐거움을 전달하는 매체다. 매체는 시대와 기술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음악의 전달 매체인 카세트테이프나 CD가 그랬던 것처럼 종이책도 장기적으로 점차 위세를 잃어갈 것이다. 하지만 책은 인터넷과 전자책 단말기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인간의 지적 욕구를 풀어주는 동반자 위치는 변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LG경제연구원에서 미래 연구 및 신사업 분석 업무를 진행하면서 미래 예측과 기업 경영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국제재무분석사(CFA) 자격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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