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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깊숙이 새겨진 ‘컬처 코드’를 읽어라

정재승 | 31호 (2009년 4월 Issue 2)
2008년, 화려한 색깔의 플라스틱 블록과 막대, 톱니바퀴를 끼워 맞춰 온갖 건축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린이 조립식 완구 ‘레고’가 탄생 50주년을 맞았다. 1958년 1월 28, 덴마크의 목수 고트프레트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블록을 서로 맞물리게 해 어린이 완구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으로 특허를 제출하고 ‘나무 장난감’을 처음 만들었다. 이후 지난 50년간 이 단순한 조립식 블록은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난감으로 자리잡았다.
 
2006년 통계에 따르면 130개국에서 78억 크로네(약 1조8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레고는 전 세계적으로 1초에 7박스가 팔리고 있으며, 매년 190억 개의 블록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지구 표면을 5번이나 가득 채울 만한 양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 4억 명의 어린이들이(사실 많은 어른들도) 매년 50억 시간 동안 레고 블록을 갖고 놀았다는 통계도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본사가 있는 레고 그룹은 이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완구업체가 됐다.
 
레고는 덴마크어로 ‘레그 고트(leg godt)’ 즉 ‘잘 논다(play well)’는 뜻이다. 디지털 게임기가 아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레고의 매력은 ‘단순한 블록들의 조합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다양한 건축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레고는 어른들에게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난감으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마케팅 전문가인 클로테르 라파이유의 저서 ‘컬처 코드’(리더스북, 2007)에는 레고에 관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레고는 독일로 수출하는 자신들의 완구 제품에 ‘상세한 조립법’을 담은 설명서를 넣었다고 한다. 그 결과 판매는 대성공이었다. 독일의 어린이들은 설명서에서 지시하는 대로 조립만 하면 자동차나 우주선이 되는 레고에 열광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설명서를 담은 레고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 어린이들은 조립 설명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를 ‘풀어야 할 숙제’처럼 여겨 부담스러워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컬처 코드의 힘
라파이유 박사는 이것을 ‘컬처 코드’로 설명한다. 그는 컬처 코드를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일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로 정의한다. 이 코드는 각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경험한 문화를 통해 얻게 되며, 주로 어린 시절을 어떤 문화 속에서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독일인의 컬처 코드 중 하나는 ‘질서’다. 유달리 질서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설명서에 맞춰 블록을 나열하고 배치하는 레고 놀이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미국인의 컬처 코드는 ‘자유’다. 개척 정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유를 건국 이념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놀이는 그 자체로 ‘상상력’이어야 하는데, 설명서를 주며 조립하라고 했으니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레고는 한동안 미국 어린이들에게 생각만큼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처럼 컬처 코드는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쇼핑, 건강, 음식 등 삶의 곳곳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특히 구매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라파이유 박사의 주장이다. 그래서 ‘제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의 오랜 문화적 전통에 바탕을 둔 ‘집단 무의식’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
 
여기서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레비스트로스적인 개념, 즉 원형 혹은 구조로서의 무의식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며 “구조가 곧 메시지”라고 구조주의자다운 말을 한다. 개개인의 발언과 행동은 제각기 다른 내용과 형식을 띠기 마련이지만, 그들이 동일 문화권 내에 속해 있다면 무수한 개별적 언행을 관통하는 구조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컬처 코드라는 문화적 무의식은 제3의 무의식으로서, 인간의 뇌 중에서 생존과 생식을 관장하는 ‘파충류 뇌’에 감춰져 있다. 따라서 컬처 코드는 이성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각인’된다. 컬처 코드는 인류의 보편적인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주고 있으며, 비즈니스 성공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업 마케팅이 성공하려면 고객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욕망’을 읽어야 한다.
 
이 책에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라파이유 박사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비결을 컬처 코드와 관련짓고 있다. 미국에서 품질은 ‘작동’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완벽한 품질은 죽음처럼 지루하게 여겨진다. 현대차는 “우리 자동차가 특별할 건 없지만… 당신의 차는 계속 달리게 할 것”이라고 소비자들에게 공언하고, 이를 위해 ‘10년 무상 수리’ ‘긴급 출동 서비스’ 등을 도입했다. 라파이유 박사는 “이런 정책은 품질과 완벽함이라는 두 컬처 코드를 절묘하게 꿰뚫은 마케팅 전략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소비자 마음속 욕망 찾아야
요즘 미국에서는 컴퓨터로 조종되는 레고 블록인 ‘레고 마인드 스톰스’가 과학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로봇 개발 키트’의 하나인 레고 마인드 스톰스에는 블록마다 컴퓨터 칩, 첨단 센서, 적외선 송수신기, PC카메라가 들어 있다. 원하는 모양으로 조립한 뒤 특정 동작 패턴이 담긴 프로그램을 컴퓨터 칩에 입력하면 그대로 움직인다. 센서를 통해 직접 길을 찾고 장애물도 피한다. 이 키트의 개발 단계에서 시연에 참가한 아이들은 이것이 학교 수업에 사용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쓰기에는 너무 재미있다’가 학생들의 답이었다나! 영국의 저명한 신경과학자 수전 그린필드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쓴 미래학서 ‘미래’(지호, 2005)에서 “미래의 교실 풍경은 놀이터를 방불케 할 것”이라며 레고 블록을 앞으로 수업 교재로 사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뉴스와 함께 얼마 전 한 기사를 보니, 최근 불황에도 불구하고 레고의 미국 내 판매율이 급증했다고 한다. 2008년 레고의 미국 내 판매율은 38% 늘었고, 미국 조립장난감 시장 내 점유율은 73%로 지난 1992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부모들이 저렴하면서도 내구성이 높은 장난감을 찾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제 미국 사회에서 레고가 ‘창의적 교육’이라는 컬처 코드를 조금씩 얻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정재승 정재승 | - (현)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부교수
    - 미국 컬럼비아의대 정신과 교수
    -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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