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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표준과 통상

기술 표준 잡으면 세계 시장 장악한다

안덕근 | 30호 (2009년 4월 Issue 1)
필자는 어렸을 때 마시는 물을 휘발유보다 비싸게 파는 나라가 있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이후 오랫동안 2가지 의문을 가졌다. ‘봉이 김선달보다 한술 더 떠 물을 휘발유보다 비싸게 파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와 ‘휘발유보다 비싼 물을 사 먹는 사람들도 정말 있을까’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필자 말고도 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지천에 널린 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봉이 김선달을 역사적 사기꾼이라 비난했던 우리가 생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된 건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이제는 물이 공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휘발유보다 비싼 물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던 필자 역시 요즘은 생수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에 출장 가면 매우 불안해하곤 한다.
 
우리 정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일시적으로 생수 판매를 허용했다. 그러나 수돗물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판매를 금지했다. 1994년 3월 대법원은 이 금지 조치가 국민의 행복 추구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정부는 곧 ‘먹는 물 관리법’을 제정해 1995년 1월부터 생수 판매를 허가하고, 5월부터는 수입 생수의 시판도 허용했다.
 
세계 대부분 국가의 생수 유통 기한은 제조업자들이 자율 결정한다. 보통 약 2년 정도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오존 살균 처리를 화학 처리로 간주해 수입 생수의 유통 기한을 6개월로 제한했다. 주로 프랑스와 캐나다에서 생산되는 수입 생수가 생산국에서 국내 소매점까지 도달하는 기간을 감안하면 6개월이라는 기간은 매우 짧다. 때문에 생수 생산국들은 이 조치가 사실상의 수입 봉쇄라고 반발했다. 결국 캐나다는 1995년 우리 정부의 이 조치가 기술 장벽 협정 위반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생수 유통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해야 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결국 생수 유효 기한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그 결과 한국산 생수의 유효 기간은 6개월에서 2년으로 늘었다. 까다로운 한국 위생 기준을 충족한 수입 생수도 2년 이상의 유효 기간을 얻었다.
 
이 유효 기간 연장은 국내 생수 시장 규모를 대폭 키웠다. 특히 고가품인 수입 생수의 점유율이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생수 시장 판도가 대거 바뀌었다. 결국 우리 정부는 2006년 2월 생수 관련 각종 기준을 국제 기준에 맞춰 국산 생수 제조 기술을 수십 조 원 규모의 세계 시장에 진출시키려는 ‘물 산업 육성 방안’도 발표했다. 올해 국내 생수 시장 규모는 45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백두산, 금강산 생수까지 들어오는 마당이니 대동강 물을 파는 진짜 봉이 김선달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기술 표준과 무역 제한의 상충은 왜 발생하는가
최근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이러한 기술 표준을 정책적으로 활용할 태세다. 때문에 이 문제가 주요 통상 화두로 부상 중이다. WTO 회원국 정부는 국가 안보, 국민 생명과 건강 보호, 환경 보호, 소비자 기만 행위 방지 등 타당한 정책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 규정 및 표준을 채택할 수 있다. 단, 그 기술 규정이나 표준은 국내외 제품에 대해 비차별적으로 적용돼야 하며 불필요한 무역 제한을 유발해서도 안 된다.
 
과도한 기술 표준 때문에 불필요하게 무역 및 시장을 제한한 대표 사례가 한국의 디젤(경유) 승용차 시장이다. 이산화탄소(CO) 배출 주범이라 평가받는 자동차에는 특히 엄격한 환경 규제가 많이 적용된다. 국제 규제 수준도 계속 강화되는 추세다. 최근 주목받는 것이 휘발유 자동차에 비해 CO 배출이 적은 디젤 승용차다. CO 배출 문제에 민감한 유럽 소비자들이 특히 디젤 승용차를 선호하므로 유럽의 디젤 자동차 점유율은 전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2008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디젤 점유율은 68%, 벨기에는 63%, 프랑스는 62%에 달한다.
 
하지만 디젤 자동차가 무조건 환경 친화적이지는 않다. CO 배출이 적은 대신, 기타 배출 가스는 오히려 휘발유 자동차보다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기 오염 문제에 민감한 미국 소비자들은 여전히 휘발유 자동차를 선호한다.
 
한국 정부는 2005년 디젤 승용차에 대한 배출 가스 규제 기준을 유럽 각국이 채택하는 ‘유로3’로 바꿨다. ‘유로3’는 경유차의 대표적 오염 물질인 질소산화물 배출 한도를 0.50g/km(1km 주행 시 자동차가 배출하는 오염 물질 무게)로 제한한다. 기존 디젤차 배출 가스 기준은 이보다 훨씬 엄격한 0.02g/km였다. 이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어서 사실상 국내에서는 외국산 디젤 승용차 판매가 불가능했다. 즉 ‘유로3’ 채택으로 수입 디젤차 판매가 가능해진 셈이다.
 
2005년 이전 이 문제는 유럽과의 단골 통상 마찰 소재였다. 우리가 생산한 디젤 승용차를 유럽에 수출하면서도 국내에는 유럽산 디젤차가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이 기준을 변경한 것은 유럽 각국의 압력도 있었지만, 카렌스나 트라제 등이 다목적 차량에서 승용차로 분류되면서 국내 생산업체들이 기준 완화를 요구한 탓도 컸다.

디젤차의 환경 규제가 완화되면서 디젤차의 국내 시장점유율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 업체의 디젤차 생산 기술도 부쩍 늘었다. 특히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유럽 시장의 10% 자동차 관세가 철폐되면, 디젤차는 우리의 주력 수출상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올해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협약회의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 대해 새로이 CO
감축 의무를 부과할 예정이다. 이때 국내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디젤차 수요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
 
정보통신 산업과 기술 표준
최근 기술 표준 문제를 놓고 정부와 기업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곳이 정보통신 분야다. 하루가 다르게 시장을 주도하는 기술이 바뀌는 통신 산업의 속성상 정부가 선정하는 표준과 관련 기업의 기술 전략은 업계 판도를 바꾸는 절대적 역할을 한다.
 
우리 정부는 2005년 4월부터 신규 출시된 모든 국내 단말기에 와이파이(WIPI)라는 표준 플랫폼을 탑재하도록 규정했다. 당시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3대 이동통신회사에서 사용한 콘텐츠 플랫폼의 수는 모두 5가지로 이동통신사의 수보다 많았다. 통신사가 다르면 사진과 벨 소리 등을 서로 교환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분산돼 있던 플랫폼을 WIPI 하나로 단일화하면서 휴대폰 서비스 간 호환성도 대폭 늘어났다. 이는 국내 모바일 콘텐츠 시장 규모를 본격적으로 확장시키는 계기였다. WIPI 표준 의무화로 컴투스, 게임빌과 같은 모바일 게임 개발회사들도 급성장했다.

문제는 WIPI 의무화가 시행되면서 해외에서 개발된 콘텐츠의 국내 진출이 사실상 막혔다는 점이다. 그러자 국내에서 개발되는 콘텐츠들의 수준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IT 강국을 자처하던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온실 속 화초로 전락했다. 이에 방송통신위원회는 4월 1일부터 WIPI 의무화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편의성과 다양성을 앞세우고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아이폰, 블랙베리, 구글폰 등이 곧 국내 시장에 진출함을 뜻한다. 폐쇄적이고 고립된 표준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성장 전략을 만들 수도, 펼칠 수도 없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의 모바일 콘텐츠 산업은 지금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이 시기를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면 국제 경쟁에서 고사할 것이다. 거꾸로 위기를 헤쳐나간다면 국내 시장을 테스트베드 삼아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제품 표시(labelling)
제품 규격이나 안전 기준 외에 제품 이름을 어떻게 표시하느냐는 문제도 국제 경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 라벨링 문제는 특히 식품 산업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미국과 베트남의 메기 분쟁이다. 메기는 1970년대까지 미시시피, 앨라배마, 아칸소 등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애용되던 생선이었다. 이후 꾸준히 수요가 늘면서 2000년에는 미국 내에서만 연간 5억 달러의 시장을 형성했다. 1995년 메기 양식법을 개발한 베트남에서는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메기 생산량을 대폭 늘렸다. 대미 수출도 급증했다. 2001년 12월 미국과 베트남의 양자 무역협정이 발효되면서 1996년 45만 달러였던 베트남산 메기 수출이 2001년 3800만 달러로 늘었다.
 
수입이 급증하자 2001년 11월 미국 메기생산협회는 의회에 압력을 행사해 ‘메기(catfish)’라는 상품명 표시를 미국 내 생산품에 국한한다는 농업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베트남에서 수입한 메기는 미국산 메기와는 전혀 다른 상품이므로 ‘catfish’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에서는 베트남산 메기를 메기의 베트남어인 ‘바싸’ 혹은 ‘트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메기 표시를 둘러싼 양국 간 통상 마찰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도들은 미국 소비자에게 베트남산 메기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주는 결과만을 낳았다. 2002년 베트남산 메기 수입액은 한 해 전보다 2배가량 증가한 6300만 달러에 달했다.
 
제품 표시 제한만으로는 수입 저지 시도가 먹혀들지 않자, 미국 메기생산협회는 2002년 6월 덤핑 조사를 신청했다. 미국 정부는 이 제소를 받아들여 60%가 넘는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농업 특별법을 만들 때 베트남산 메기는 ‘catfish’가 아니라고 강변하던 미국 정부가 반덤핑 조사 때는 입장을 바꿔 ‘두 상품이 같은 메기이므로 미국 식품 산업에 피해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샀다.
 
유럽 각국도 제품 표시로 종종 식품 수입을 제한한다. 프랑스 전채 요리인 ‘코키유 생 자크(coquille Saint-Jacques)’는 조개 껍질에 가리비 관자를 담아 화이트 와인, 레몬, 버터 등으로 조리한 음식이다. 이때 캐나다, 칠레, 페루산 가리비가 주로 쓰인다. 1996년 프랑스 정부는 수입 가리비에 대해 ‘코키유 생 자크’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가리비의 생물학적 명칭인 ‘petoncle’만을 사용토록 했다. 미각을 돋우는 고급 전채 요리가 아니라 이상한 해양 생물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캐나다, 칠레, 페루는 WTO에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1989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도 주로 페루에서 수입되는 외국산 정어리 제품에 대해 ‘정어리(sardine)’라는 표현을 금지하고, 정어리의 학명인 ‘sardinops sagax’를 사용하도록 했다. EC 역시 WTO 소송에서 패소한 후 이를 시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독일은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특정 성분을 포함하지 않은 소시지에 ‘소시지’라는 표현을 금지한 적이 있다. 대신 ‘돼지고기가 담긴 비닐봉지(pork filled offal tube)’라는 이상야릇한 명칭을 허가했다. 이탈리아 역시 자국에서 생산한 듀럼(durum) 밀로 만든 파스타에만 ‘파스타’라는 명칭을 허용했다. 기술 표준 통상 규범이 강화되면서 이 조치들은 모두 사라졌다.

국제 기준과 기술 표준
‘Codex Stan 223-2001.’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바로 2001년 7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김치(Kimchi)’에 대해 확정한 국제 표준 규격이다. 이는 한국이 식품에 대해 확보한 유일한 국제 표준 규격이기도 하다. 한국의 고유한 전통 음식인 김치는 한때 세계 시장에서 일본산 ‘기무치’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일본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기무치를 공식 식품으로 신청했고, 1997년에는 Codex에도 기무치에 대한 국제 표준 규격을 신청했다.
 
화들짝 놀란 우리 정부는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2001년 김치의 국제 표준 규격을 확보했다. 김치의 정의도 ‘절임 배추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무 등 여러 양념을 혼합해 저온에서 젖산 생성을 통해 발효시킨 식품’으로 확정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세계 시장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김치는 사라지고 식초로 절인 이상한 기무치만 난무했을 것이다. 한국 음식의 세계화가 가져올 산업 및 문화적 파급 효과를 감안할 때 김치는 당연히 그 선봉장에 서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김치가 기무치로 대체될 뻔한 순간이 있었다니, 지금도 간담이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술 표준 문제에 관한 기업 대응 전략
기술 표준은 기술 발전과 산업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기업이 기술 표준 변화에 대처하려면 우선 관련 기술과 산업 여건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아직 많은 기업이 경쟁사나 동종업계 기업의 기술, 관련 산업의 발전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 변화된 기술 환경에 적합한 표준 체계를 선도하고 대비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기업이 갖춰야 할 핵심 경쟁력이다.
 
WTO 체제 도입 후 Codex,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국제 표준 관련 기구에서의 표준 수립 및 확정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기업들은 이런 국제 기구가 어떤 기술 표준을 수립하는지를 파악하고, 정부 부처 및 유관 기관과 협력해야 한다. 김치 수출이 늘어난 것도 Codex가 한국 김치를 국제 표준으로 인정한 후다. 기술 표준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세계 시장의 판도가 즉각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국내나 해외 시장에서 기술 표준 도입 및 변화로 피해를 입을 경우에는 WTO 규범을 적극 활용해 불이익의 소지를 줄여야 한다. 기술 표준으로 인한 무역 장벽 피해는 WTO 법규를 통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 한국 정부도 이제 그 정도의 역량은 갖추고 있는 만큼 정부의 도움을 적극 요청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 안덕근 | - (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세계무역기구(WTO) 근무
    - 스위스 세계무역연구소(WTI) 근무
    -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역임
    dah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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