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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신사’ 로열 댄디가 뜬다

김경훈 | 30호 (2009년 4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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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자들의 멋 내기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과 꽃미남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예쁜 남자’ 또는 ‘꾸미는 남자’가 유행의 주요 키워드가 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흐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로열 댄디(royal dandy)’로 불리는 새 트렌드는 남성들의 멋 내기가 한층 더 성숙한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로열 댄디는 화려한 외모나 물질적 과시를 넘어 정통성이나 안목, 태도 등의 성숙함과 세련됨을 기본 콘셉트로 한다. 마치 예전의 영국 신사들처럼 말이다. 이전의 메트로섹슈얼이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다면, 로열 댄디는 브리티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허세 대신 품격 추구
로열 댄디 트렌드의 주인공들은 유행을 좇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패션과 스타일을 통해 차별화를 시도하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좀더 세련되고 품격 있는 패션이나 태도를 통해 우월성을 과시하고, 패션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여자들에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마니아적 성향이 약하기 때문이다.
 
로열 댄디들은 자신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다는 데서 정신적 우월감을 느낀다. 돈을 들여 치장한다고 해서 아무나 다 멋있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무언의 과시다. 어떻게 보면 여성성에 조금씩 침식당해온 남자들이 여성의 멋에 비견되는 ‘남성의 멋’을 대항마로 내세우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과 뚜렷이 차별화되고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스타일을 통해 로열 댄디들은 진지하게 남성적인 멋을 추구한다.
 
로열 댄디 트렌드의 전 세계적 부상을 알린 상징적 사건은 비스포큰(Bespoken)이라는 고급 남성복 브랜드가 미국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에 점포를 낸 일이었다(비스포크[bespoke]는 ‘been spoken for’의 줄임말로 ‘고객이 말한 대로 만드는 옷’이라는 뜻이다). 비스포큰은 턴불&아서라는 영국의 셔츠 메이커가 만든 브랜드로, 영국식 취향이 진하게 배어 있다. 윈스턴 처칠과 찰스 왕세자, 그리고 숀 코너리 등 ‘제임스 본드’ 역 배우들이 모두 턴불&아서의 단골 고객이다. 뉴욕타임스는 비스포큰의 뉴욕 론칭을 소개하면서 “브리티시 스타일의 침공이 시작됐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로열 댄디의 2가지 키워드와 사례
로열 댄디의 흐름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허세를 버리고 품격을 찾는, 다시 말해 마치 유럽의 전통 귀족처럼 클래식한 품격을 추구하는 흐름이다. 이를 ‘패션 노빌리티(fashion nobility)’라고 하자. 이 흐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맞춤복 거리를 동경하고 최고급 수제화에 눈길을 보낸다. 당장 살 수는 없더라도 꿈은 버리지 않는다.
 
두 번째 흐름은 ‘매너 매터(manner matter)’다. 한마디로 겉모습뿐만 아니라 안목과 태도, 생각까지 댄디하고 싶은 남자들의 트렌드다. 그들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의 행위에서 품격을 찾는다. 그리고 내면에서 우러나는 고귀함이 매너로 표현되길 원한다. 그래야 남다르니까. 여기에는 귀족보다는 신사의 이미지가 어울린다.
 
1. 패션 노빌리티
고품격 남성 패션 가이드: 블로그 ‘일 구스토 델 시뇨레’ 포털사이트 네이버에는 ‘파워 블로그’라는 것이 있다. 네이버를 통해 개설된 블로그 중 내용이 알찬 1100여 개를 32개 주제별로 선정한 것이다.
 
2008년 선정된 파워 블로그 중 미술·디자인·광고·패션 리뷰 부문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0개 대표 블로그 중 2개가 패션을 주제로 한 것인데, 이 둘 모두가 ‘클래식한 남성 패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하나인 일 구스토 델 시뇨레(il gusto del signore, 주소 blog.naver.com/gustosignore)는 하루 1000명 가까운 방문객이 들르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블로그는 최고급 맞춤 정장에서부터 옷 잘 입는 법, 구두의 종류 및 관리법, 1960년대 재벌 이야기를 담은 일본 드라마 ‘화려한 일족’에 등장하는 의상 분석까지 꽤 많은 콘텐츠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패션에 대한 남성의 관심은 여성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닌 복장에 대한 탐구와 업그레이드에 관해서는 남자들의 관심이 더 높은 듯하다. 일 구스토 델 시뇨레에서는 ‘바지 접어 입기’와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에 대해서도 방문객들의 댓글과 스크랩이 이어지고 있다.
 
클래식 수제화의 지존: 벨루티 여자들은 종종 말한다. 구두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경험으로 볼 때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벨루티를 신었다면 말이다.
 
벨루티(Berluti)는 1895년 파리에서 탄생한 최고급 수제화 브랜드다. 4대에 걸친 역사 동안 유럽 상류사회의 상징으로 확고한 지위를 다져왔으며, 100% 수제 공정으로 만들어 비스포크 한 켤레를 완성하는 데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걸린다. 벨루티의 특징 중 하나는 피부같이 부드러운 최고급 베네치아 가죽 위에 일일이 색감을 더하는 파티나(patina) 공법이다. 이 과정을 통해 구두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색깔을 갖게 된다.
 
벨루티는 특이하게도 ‘클럽 스완’이라는 공식 사교 모임을 운영한다. 이 모임은 서로 친교를 맺을 장을 만들어달라는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1991년 파리의 VIP들을 중심으로 시작됐으며, 전 세계 각계각층의 명사 100여 명이 회원으로 있다. 클럽 스완은 회원들이 벨루티의 수장 올가 벨루티와 함께 자신의 구두를 최고급 샴페인 ‘돔 페리뇽’으로 광을 내는 ‘파티나 의식(patina ritual)’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2004년 FnC코오롱이 벨루티 단독매장을 열었고, 로열 댄디 트렌드에 힘입어 2008년 4월 갤러리아 이스트에 두 번째 부티크를 오픈했다.

면도는 예술이다: 컷 스로트 101 면도 교실 미국 맨해튼의 웨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양복점 및 남성복 매장 ‘프리맨 스포팅 클럽(Freeman Sporting Club)’은 이발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2008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아주 재미난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름하야 ‘컷 스로트 101(Cut Throat 101)’이라는 면도 수업이다. 살벌한 이름에 걸맞게 이 수업에서는 칼집에 접어 넣는 클래식한 면도칼을 사용해 ‘스트레이트 레이저 셰이빙(straight razor shaving)’이라는 잃어버린 예술의 세계로 남성들을 안내한다.
 
면도 전 준비, 면도칼 잡는 법, 위치 잡기, 적당한 힘주기, 피부를 팽팽하게 늘려 상처 없이 면도하기, 면도칼 손질법 등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은 1시간에 60달러. 전기면도기로 첫 면도를 시작했을 20, 30대들이 클래식한 멋을 찾아 이 수업에 참가한다고 한다.
 
훨씬 수고스럽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위험하기까지 하건만, 왜 굳이 전기면도기를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에 대해 강사인 쇼티 매니에이스는 간단히 정리한다. “이게 럭셔리예요.”
 
2. 매너 매터
21세기 신사들의 바이블: 디브렛 ‘남자들을 위한 매너’ 남자에게 잘생긴 얼굴이나 유창한 언변보다 중요한 것은 매너다. 1769년 ‘영국귀족연감(Peerage of England)’의 발행과 함께 창립한 디브렛(Debrett) 출판사는 2007년 9월 ‘21세기의 기사’를 위한 새로운 가이드 ‘남자들을 위한 매너(Manners for Men)’를 발간했다. 이전에 디브렛이 발행한 ‘디브렛의 예의범절(Debrett’s Correct Form)’ 등의 매너 가이드라인 시리즈는 오랫동안 영국 상류층들에게 에티켓의 바이블로 사랑받아왔다.
 
신사의 성서’라고 불리는 이 책의 2008년 11월 개정판은 기존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좀더 현대화된 면을 추가했다. 흡연이 거만과 짜증, 오만한 행동, 만취와 함께 ‘나쁜 습관’이라는 장에 편입돼 있다든가 ‘여자 상사를 (존경하면서) 상대하는 법’이나 ‘여자와 (과하지 않게) 시시덕거리기’ ‘스트레스는 섹시하지 않다’ 등 현대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매너 가이드가 대표적이다. “블랙베리(스마트폰의 일종)의 호출음이 울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신을 알파 메일(alpha male), 즉 잘나가는 남자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목줄에 묶인 월급쟁이 원숭이처럼 보이게 한다”고 명시한 이 책은 분명 ‘21세기 신사를 위한 성서’로 손색이 없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빛나는 신사의 품위: 고급 비즈니스 사무용품들 세계의 비즈니스맨들이 모여드는 뉴욕에서는 최근 자신만의 편지지와 봉투 등 개인용 사무용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품격이 깃든 사무용품도 자신을 나타내는 또 다른 얼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멋지게 치장한 옷매무새보다 서류에 서명할 때 자연스럽게 꺼내 드는 고급 만년필에서 신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명품 문구류는 고품격을 지향하는 남성들의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2008년 9월 ‘오롬시스템’이라는 고급 비즈니스 사무용품 매장을 본점 남성복 코너에 열었다. 이곳은 고급 다이어리와 레터 트레이 등 500여 종의 소형 문구류와 라이터, 머니 클립 같은 최고급 액세서리를 갖추고 있다. 물론 가격이 만만치 않다. 데스크 액세서리 세트는 최고 200만 원에 이른다. 당연히 일반 대중보다는 고급 비즈니스 문구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를 대상으로 하는데,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20, 30대의 관심도 높다고 한다.
 
현대백화점은 ‘파리바’라는 고급 남성 액세서리 매장을 2008년 상반기에 리뉴얼했다. 여기서는 커프스 버튼, 회중시계, 라이터, 만년필 등의 신사용 소품류를 판매하는데, 전문직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단골 고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남자들의 새로운 로망
전통적으로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의 리스트는 여자들보다 턱없이 적거나 단순했다. 기껏해야 경제력, 도전 정신, 과묵함, 책임감, 강인한 체력 등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가속화되고 선택권이 강화됨에 따라 그 리스트에 유머 감각, 패션 감각, 근육질 몸매, 금연, 배려심 등 까다로운 조건들이 계속 추가돼 왔다.
 
골치 아프다고?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남성들 스스로도 취향을 중시하며, 시장에서는 수많은 세분화와 차별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시장 기회도 함께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은 남성 매장이 백화점의 한 층만 간신히 차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몇 개 층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로열 댄디는 그런 시대의 새로운 로망이다. 이것은 단순한 복고적 취향이나 상류층만이 향유하는 스타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멋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으며, 단순한 과시를 넘어 깊이 있는 지식과 품격을 중요시하는 트렌드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더. 품위와 스타일을 가꾸는 데는 돈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점은 개인 차원에서는 곤란한 문제일 수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비즈니스 기회를 의미한다. 로열 댄디 시장은 궁극적으로 로열 마켓을 만들어낼 것이다.
 
편집자주 ‘로열 댄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과 사례는 한국트렌드연구소 홈페이지(www.whatsnewtrend.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1994년 국내 최초의 트렌드 분석서 <한국인 트렌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장기적 미래 트렌드와 트렌드의 에너지가 되는 인간의 욕구를 계속 추적 중이다. 최근에는 21세기의 트렌드와 비즈니스 키워드를 결합해 해석한 서적 <HOT 트렌드(trend) 2009>를 펴냈다. PFIN(www.pfin.kr)은 1999년 설립된 트렌드 정보 기업으로, 국내 주요 패션 기업과 유통업체에 다양한 트렌드 컨설팅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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