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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영웅’ 만드는 플롯

허지성 | 21호 (2008년 11월 Issue 2)
영화 ‘스파이더 맨 2’에는 주인공인 피터가 지하철에서 악당과 싸우다가 가면이 벗겨지고 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피터를 넘겨달라는 악당의 요구에 대해 지하철 승객들이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며 피터 앞을 막아서는 장면은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제품에 대해서도 소비자들이 이 정도로 강력한 충성심을 보일 수 있을까.
 
책 ‘바이올로지(Buyology)’의 저자인 마틴 린드스트롬은 1990년대 중반 애플에서 주최하는 제품 콘퍼런스에 참석했다가 황당한 일을 목격했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가 기조 연설 도중에 “우리는 더 이상 뉴턴(애플의 PDA) 라인을 지원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뉴턴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자, 관객들이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뉴턴 단말기를 바닥에 던진 뒤 발로 밟기 시작한 남성,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중년 여인 등 콘퍼런스 룸은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들에게 애플은 단순한 기업이나 상품이 아니었다. 매년 맥월드 콘퍼런스에 등장하는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교황의 신년 메시지와 같고, 애플 스토어는 거룩한 성전이며, 맥북과 아이팟은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티켓처럼 보인다. 애플 추종자들은 새로 개발 중인 애플 제품의 극비 정보를 캐내어 세상에 퍼뜨리는 것을 즐기거나 자신들끼리 신제품의 모습을 상상하며, 애플의 새 제품이 나오기 수일 전부터 매장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들이 생산하는 각종 블로그 포스팅과 기사거리는 인터넷을 타고 퍼져 나가므로 애플은 전혀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도 제품을 전 세계에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코스트코를 방문하는 회원들은 언제나 뭔가 놀라운 발견을 기대한다. 때때로 쿨한 브랜드의 의류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거나,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케이크가 들어와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한다. 코스트코 회원들은 애플 추종자들처럼 울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3만5000원짜리 연 회비로 지인들에게 함께 코스트코를 쇼핑하도록 하는 특권을 제공하는 기쁨을 즐기면서 “코스트코에 가면 돈을 많이 쓰게 되어 큰일이야” 등의 코스트코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전달한다.
 
구글은 G메일 론칭 초기에 가입자들이 다른 가입자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만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가입자 확산 속도를 늦춰 큰 메일 용량으로 인한 서버와 트래픽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입소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구글의 대용량 메일 서비스 자체도 훌륭했지만 가입을 위해서는 G메일 계정을 이미 보유한 얼리어답터들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며, 얼리어답터들은 구글 덕분에 인심을 써가며 자신의 잔여 추천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지인 100명에게 초대장을 줬지 뭐야” 등의 허풍이 섞인 자랑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른바 시장세분화 타게팅 포지셔닝(STP)으로 불리는 마케팅 전략의 핵심인 포지셔닝이 도전을 받고 있다. P&G의 CEO인 앨런 조지 래플리는 2006년 미국광고주협회 연례 콘퍼런스에서 마케터에 의한 일방적인 포지셔닝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 포지셔닝 권한이 소비자에게로 넘어갔음을 선언했다. ‘보랏빛 소가 온다’의 저자 세스 고딘도 그의 후속 도서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에서 포지셔닝 콘셉트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결국 마케터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포지셔닝 전략이 소비자에게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지셔닝의 대안은 무엇일까. 최근 스토리텔링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고전 매체를 통한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에서 인터넷을 필두로 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마케팅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기업들은 자신들의 포지셔닝 전략을 압축한 짧은 슬로건보다 소비자들이 서로서로에게 퍼뜨릴 수 있는 스토리를 포지셔닝의 대안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애플, 코스트코, 구글 등 3개 기업의 고객들처럼 확신에 찬 추종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스토리텔링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 핵심은 바로 ‘착하고 겸손한 영웅이 위기에 처해 있고 당신은 그를 도와야 한다’와 같은 정교한 스토리 플롯이다. 이러한 스토리 플롯은 대개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구성된다.
 
요인1. 사소하지만 감동적인 배려 수많은 마케팅 메시지를 접하는 소비자들은 마케터가 강요하는 메시지에 대해 일단 의심부터 한다. 실제로 마케팅 메시지가 사실로 판명되더라도 거기에 별로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발견하는 놀라움이나 감동은 의심 많은 소비자들을 광적인 추종자와 자발적인 스토리텔러로 만드는 출발점이다.
 
맥북을 대기 상태로 두어본 적이 있는 이용자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작은 흰색 발광다이오드(LED)가 마치 맥북이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숨소리 리듬에 맞춰 천천히 끄고 켜진다. 또한 별 생각 없이 구글 웹사이트를 방문한 이용자들은 메인 페이지의 구글 로고가 재미있는 형태로 바뀐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코스트코에서는 때때로 코치 가방이나 돔 페리뇽을 정말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거나 책 사인회를 하고 있는 빌 클린턴을 만나는 뜻밖의 즐거움이 있다. 이와 같이 기대하지 않은 즐거움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고객은 이 사소한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요인2. 객관성 앞에서 언급한 업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소비자 스스로가 스토리의 일부가 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체다. 그리고 매체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남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스토리를 방송하기 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소비자들은 자신이 그런 스토리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애플의 신제품 소개는 언제나 스티브 잡스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자사 제품을 세일한다는 측면에서 일반 마케팅 활동과 유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잡스가 콘퍼런스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은 추종자들과 교감을 나누며 동의를 구하는 ‘개인적 체험’ 창조의 과정이다. 잡스의 신제품 소개 메시지는 항상 콘퍼런스의 열광적인 분위기, 콘퍼런스 입장권을 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경험’ 등과 함께 전달된다. 구글과 코스트코는 다른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권한을 선도 이용자에게 배타적으로 이양함으로써 ‘선택된 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세일하도록 하고 있다.
 
요인3. 반영웅 신화 애플 등 3개 기업은 모두 거대 시장 지배자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자기 자신들을 투영시킨다. 애플과 구글은 여러 면에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척점에 서 있음을 의식적으로 강조해 왔다. 애플은 1984년의 슈퍼볼 광고에서부터 시작한 ‘IBM(빅 브라더) 반영웅’의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또 IBM의 ‘싱크(Think)’ 슬로건을 비꼰 ‘싱크 디퍼런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구글은 ‘악이 되지 마라(Don’t Be Evil)’라는 강령을 기초로 자신들이 윈도와 오피스로 폭리를 취하는 MS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코스트코는 미국 소매시장의 거대 강자인 월마트에 맞서 소비자들에게 양질의 제품을 저가에 쇼핑할 수 있는 기쁨을 주고 있다. 결국 이 업체들이 무너지면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된 거대 기업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위기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광적인 지지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약자인 척 하는 기업들을 모든 소비자들이 반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브랜드를 시장 지배기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객들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지속적이고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런 회사와 브랜드는 진정한 영웅이 되어 일부 추종자가 아닌 모든 사람의 믿음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편집자주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김상훈 교수가 이끄는 비즈트렌드연구회가 동아비즈니스리뷰(DBR)를 통해 연구 성과를 공유합니다. 학계와 업계 전문가로 구성된 이 연구회는 유행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비즈니스 트렌드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제시합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국내외 벤처기업에서 일했으며,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구글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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