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이 서울시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국내 기업들이 디자인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점에 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설치 디자인에 국한해 말씀드리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업들이 디자인과 시공(施工)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디자인과 시공을 한 번에 발주하는 것이 기업으로서는 편하기 때문입니다. 민간 분야의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죠.
그런데 디자인과 시공을 하나로 보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진짜 이유는 기업들이 디자인 사례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에 맞춰 실제 대부분의 디자인 견적서에는 아예 디자인 피(fee)가 올라 있지 않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은 모두 공짜로 디자인을 해 주고 있는 걸까요? 아니죠.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사례비용을 시공 파트에서 떼어 갑니다. 그럼 시공에서는 당연히 애초 디자인보다 자재가 부실해지거나 아예 무엇이 빠지거나 하는 등의 편법이 생기고, 당연히 최종 결과물의 수준은 떨어집니다. 이는 전반적인 대한민국 디자인의 수준 저하로 이어집니다. 조금 넓게 보면 이것은 눈에 드러나는 결과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악습이며, 여기에 편승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기업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죠. 디자인의 핵심은 최초 콘셉트 기획 단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아이디어 부문을 마케팅 또는 광고 대행사에 맡기고, 디자이너는 제작과 시공 쪽으로 몰아갑니다. 이런 상황도 마케팅·광고 대행사가 가져오는 아이디어들이 정말 좋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쪽에서 가져오는 기획안들을 보면 ‘많은 비용을 들여 겨우 이 정도 내용을 뽑았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업이 디자이너에게 최초 콘셉트 단계를 전체로 맡기기가 정 부담스럽다면 적어도 마케팅·광고 대행사들과 협업(co-work)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줘야 합니다. 시작부터 잘못된 길을 가면 제작이나 시공 단계에서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디자이너 박진우가 보는 국내 최고의 디자인과 최악의 다자인 사례는 무엇입니까
“가장 좋았던 것은 박명천 감독이 만든 TTL 광고가 아니었나 싶어요. 광고 자체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그보다 클라이언트를 확실하게 해당 카테고리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소비자들의 문화적 수준이 TTL 광고를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소비자들은 브랜드를 상품 이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TTL 광고는 브랜드가 매력적인 무형자산이란 인식을 확산시켜 줬습니다. 이후부터는 소비자 눈높이 자체가 높아졌기 때문에 기업들은 너나없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콘텐츠를 제공하려 노력했으며,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최악의 디자인 사례로는 삼성전자와 앙드레 김의 김치 냉장고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최악이라고 할 것은 많지만 이것을 예로 든 것은 기업이 가장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앙드레 김은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조합은 디자인 업계 안에서는 웃음거리입니다. 제품 자체의 개발과 디자인 기획을 함께한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유명세를 이용해 외형적 디자인만 어필하는 것은 깊이 없는 얄팍한 상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당사자의 인지도와 영향력이라는 것이 엄청나서 일반 시민에게 ‘디자이너와 기업 간의 협업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것도 문제입니다.
이후 다른 기업에서도 이것을 모방한 사례가 많이 나왔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적 문화수준의 저하를 가져 왔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그럼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기업은 어떤 디자인 ‘마인드’와 환경’이 필요할까요
“기업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디자인 마인드는 ‘이제는 디자인이 회사를 죽이고 살린다’는 확신이라고 봅니다. 말로만 이야기하는 것 말고 진심으로 ‘앞으로 돈을 벌어오는 착한 디자인을 위해 마케팅과 기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좋은 디자인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또 한 가지는 임직원 전체가 1등이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기업 경영이든 디자인이든 최고가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디자인이 한두 명의 훌륭한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대기업에서 회장님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말씀하는데, 일선 임원들은 ‘행복한 2등의 적당한 디자인’이면 족하다고 말하는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선 그런 건 안 해봤어’란 말로 창의성의 싹을 자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안일한 생각으로는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없습니다. 1등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도전하는 자만의 것이며, 조직 전체의 역량이 합쳐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디자인 환경이라면 좋은 디자인을 볼 줄 아는 ‘선구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디자인을 제시해도 그것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는 ‘눈(目)’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기업이 좋은 디자인 선구안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기업은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는 디자이너들의 유명세를 보고 막연히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국내 저널리즘이 사람들에게 디자인의 이슈 중에서 너무 가벼운 주제만을 소극적으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수준의 지식 전달이라는 것이죠.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몇 디자인 전문지조차도 명확한 관점 없이 유명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수준의 기사를 작성하는 실정인데 종합 일간지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초보적인 디자인 저널리즘은 잘못된 디자인과 엉성한 해외 디자이너들을 스타로 만들어 주고, 또 이것을 판단 기준으로 하는 기업에는 잘못된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국내 미디어들이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는 상당히 전문화된 식견을 보여 주고 시민의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반면에 디자인이나 문화는 중요하다고만 하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잘못 디자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앞선 디자인이라는 이유로 좋은 아이디어를 거절합니다. 국내 소비자와 독자들이 정치·경제적 식견은 앞서 있지만 문화와 디자인에 대해서는 아직 무지하다는 뜻인가요? 이것은 소비자와 독자의 수준을 폄하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나라 유력 일간지들도 영국의 가디언이나 인디펜던트처럼 기업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전문적인 디자인 저널리즘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기업이 스스로 좋은 디자인 환경을 창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아트 디렉터를 곁에 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 곁에 두어야 할 아트 디렉터는 언제라도 반짝반짝하는 디자인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국내 기업들은 자문이나 조언을 주로 연륜이 있는 분들에게 듣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디자인 분야에서는 30,40대 젊은 디자이너 중 현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써야 합니다. 또 사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흔들리지 않게 아트 디렉터가 직급과 관계없이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한다면 기업 내부의 젊은 직원들이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적지 않은 국내 기업들이 많은 돈을 들여 해외 조사 기관에 소비자 트렌드와 같은 연구 용역을 맡기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내부 디자이너들의 영감만 잘 듣고 그들이 그것을 창의적으로 풀어낼 수 있게만 해 줘도 수 억 원을 들여 사오는 외부 보고서가 필요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외부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경영진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상적인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디자이너는 보편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되, 창의적이며 독특한 표현으로 소비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의 목적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에 있으니까요. 일반인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디자인은 가치가 떨어집니다. 저는 삼성전자에 있을 때도 보통 사람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작업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 진행됐음에도 짧은 단편 영화 한 편 본 것처럼 느껴진 디자이너 박진우와의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그에게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럼 디자이너 박진우의 색은 얼마입니까?”
“제 색깔의 가격은 제 ‘꿈’의 가격입니다. 소비자가 기업에 가격 또는 이윤 형태로 주는 것을 저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비자에게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문화는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순환구조를 만들겠지요. 저는 디자이너가 소비자와 기업 사이에서 꿈을 거래시켜 주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소비자와 기업, 디자이너로 연결된 ‘꿈의 거래’는 거래 당사자들에 따라 몇 만 원짜리, 몇 천만 원짜리일 수 있으며, 몇 백억 원짜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독자 여러분께는 얼마짜리 꿈의 거래가 보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