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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비즈니스

‘하이볼’ 앞세워 맥주 시장 빼앗은 위스키처럼
주류 시장 ‘빅블러’ 활발

명욱 | 319호 (2021년 04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주류업계도 최근 몇 년 사이 ‘빅블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위스키 시장에서의 ‘하이볼’의 인기다. 일본에서 90년대 이후 소비 부진으로 큰 위기를 겪던 위스키 업체들은 2000년대 초반 위스키에 탄산수와 레몬 등을 섞어 마시는 하이볼을 적극적으로 프로모션해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주류 카테고리를 개척했다. 국내에서도 샴페인을 타깃으로 삼아 탄산을 용해하는 방식을 활용한 ‘복순도가 손막걸리’나 고체 막걸리 ‘이화주’ 등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혁신을 통해 빅블러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주식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들의 특징을 보면 대부분 ‘빅블러’ 현상을 선도하는 기업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빅블러 현상이란 ‘흐릿해진다’는 뜻의 영어 단어 ‘블러(blur)’를 적용한 신조어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존에 영역의 경계가 섞이고 모호해지며 지속적으로 융복합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자동차 제조사가 아닌 IT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테슬라부터 모바일 기업으로 출발해 금융업에도 진출한 카카오뱅크, 충전 시스템을 통해 고객의 돈을 맡아가며 커피값을 결제하는 스타벅스 등이 빅블러 현상을 선도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그렇다면 가장 보수적인 산업이라 불리는 주류 업계에서도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주류 업계에서 역발상으로 성공한 일본

주류 업계가 보수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역사적인 이유가 크다. 100년 역사는 물론 1000년 역사를 가진 업체들이 많기 때문이다. 독일의 바이엔슈테판의 경우 서기 1040년에 양조 면허를 취득했으며 기네스의 경우 2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잘만 만들어 놓으면 백 년의 기업을 일굴 수 있다는 의미다. 일본에도 수백 년 된 사케 양조장이 즐비하게 있으며 우리에게도 100년 역사를 가진 양조장이 의외로 많다. 조선 중후기 여성들이 기록한 『음식디미방』 등 고문헌을 보면 음식과 술 빚기가 같이, 늘 함께 등장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술은 음식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위스키 업체들을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권위적이며, 정통성을 고집하고, 럭셔리 이미지를 주로 내세운 위스키가 서민적이고 다가가기 쉬운 이미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위스키 소다인 ‘하이볼’이다. 위스키에 얼음과 탄산수, 그리고 레몬 및 민트를 넣어 마시는 일종의 칵테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기존의 위스키보다 저렴하다. 하지만 양은 많다. 일본에서는 3000원대부터 있을 정도로 가격 접근성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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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볼의 어원은 영국과 미국 두 가지 스토리가 있다. 골프를 칠 때 공이 올라간 사이 빠르게 마신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설과 미국 서부 시대에 기차 출발을 의미하는 볼이 올라가면 기차역 바 손님들이 기차를 타려고 시켜놓은 위스키에 탄산수를 타 빨리 마셨다는 설이 공존한다. 하지만 어원과 상관없이 위스키를 희석해서 마시는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일본이다. 이유는 일본인들의 숙취 해소 능력이 떨어져서다. 일본인의 숙취 해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파악한 1 산토리는 1960년도부터 위스키에 물, 얼음, 탄산수 등을 섞어 마실 수 있게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위스키를 일본식 청주인 사케 정도로 마실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과음을 피하라는 의미로 남은 위스키를 맡기는 킵(Keep) 문화도 만들어 냈다. 흥미롭게도 킵 문화가 생기니 주문량은 더 많아졌다. 술이 남더라도 다음에 또 오면 된다는 안도감에 한 병 더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재방문율도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마케팅 수단으로 일본 위스키 산업은 1980년대 초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장의 성장을 예측한 산토리는 이후 문화적 상품과 접목한 고급 제품을 출시하게 된다. 이때 쓰인 소재는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오크통의 원액을 배합(브랜딩)하는 과정을 진행하는데 이러한 배합을 통해 ‘브람스 교향곡 제1번 4악장’과 같은 맛이 나게끔 기획했다고 홍보하며, 이 곡을 제품의 CM송으로도 활용했다. 이렇게 출시된 제품이 바로 ‘히비키’라는 제품이다. 히비키라는 네이밍 역시 교향곡(交響曲)의 향(響)을 일본식 훈음으로 부른 것이었다. 그 결과, 히비키는 위스키 애호가들에게는 클래식이라는 고급 취향을 향유한다는 자부심을 주었고,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맛으로 표현된 음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며 한번 맛보게 하는 전략이 됐다. 기존의 애호가와 신규 시장을 모두 노린 전략이었고, 그 결과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가 됐다.

버블이 꺼지면서 사라진 고급 위스키 수요

일본 시장 내에서 위스키는 80년대 이후 침체기를 겪는다. 80년대 위스키에 대한 증세 및 일본산 고급 소주의 등장, 그리고 90년대 초반부터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위스키 수요는 눈에 띄게 줄게 된다. 하지만 어려움을 겪던 위스키 업계가 2000년대를 기점으로 부활의 날갯짓을 하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앞서 설명한 ‘하이볼’의 대중화다.

일본 위스키 업계가 하이볼을 대대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하나, 바로 위스키를 음식과 같이 즐기는 문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좋은 위스키라도 40도가 넘는 도수로는 시장 확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음식과 즐길 수 있는 술은 모두 도수가 낮았다. 맥주, 와인, 청주 등 대부분이 15도 이하였다. 또 하나, 일본 음식 중에는 차가운 음식보다는 뜨거운 음식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술은 시원해야 잘 팔렸다. 또 일본 음식 자체가 단맛이 많아 그 맛을 중화해 줄 탄산도 필요했다. 2000년대 중반, 그래서 이런 특성을 고루 갖춘 하이볼을 대대적으로 프로모션하게 된 것이다. 생맥주 정도의 낮은 도수, 시원한 얼음과 탄산, 상큼한 레몬의 맛은 뜨겁고 단맛이 많은 일본 음식과 찰떡궁합이었다. 하이볼이 나오고 나서 시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낮아진 도수는 알코올 섭취에 부담을 느끼는 젊은 층의 소비를 자극했고, 탄산과 레몬의 컬래버레이션은 더운 여름날에 생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과 같은 청량감을 줬다. 그래서 하이볼 잔 자체도 생맥주 잔 스타일을 그대로 적용했으며 음용 방식도 생맥주와 완전히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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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일본 위스키 수출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일본산 위스키의 수출액은 2009년 16억 엔(약 165억 원)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150억 엔(약 1550억 원)으로 10년 동안 10배 가까이 성장하게 된다.

하이볼의 성장으로 일본 위스키 시장은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다. 5060의 술로 여겨졌던 위스키에 탄산과 상큼함을 더하니 2030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고객과 신규 고객을 모두 잡은 것이다.

일본 내에서 하이볼이 인기를 끌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은 바로 생맥주 시장이다. 일본 소비자들은 생맥주 대신 하이볼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요식업 시장에서의 맥주 매출이 눈에 띄게 줄었다. 여기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본 맥주 불매 운동으로 일본 맥주 업체들이 받은 타격은 더욱 커졌다. 2017년 당시 일본 맥주의 총수출 중 63%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던 한국 시장은 2020년, 8.8%로 비중이 크게 떨어졌다. 최근 수출이 다시 늘고는 있지만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막걸리 시장의 빅블러 사례

그런가 하면 한국 전통주 시장에서도 하이볼과 같은 빅블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샴페인 시장에 도전한 막걸리 업체 복순도가 사례가 있다. 생막걸리의 가장 큰 단점은 유통 과정 중 탄산이 새 나가거나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생이라는 특성답게 항상 알코올 발효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유통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탄산이 생성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일반 생막걸리 제품을 보면 뚜껑에 틈을 만들어 탄산이 빠지게끔 조절해 놨다. 생막걸리를 거꾸로 세우면 조금씩 새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곳이 바로 복순도가라는 양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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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도가가 내놓은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계속 발생되는 탄산을 막걸리 속에 용해해버리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래서 기존 막걸리와 달리 뚜껑에 있는 틈을 막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냥 뚜껑을 확 열어버리지 않고 천천히 열면 재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닥에서 용솟음치는 듯한 탄산의 모습에 실제 소비자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막걸리 병을 여는 데 시간도 걸리고 이에 따른 불편함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불편함을 소비자들이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시각적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복순도가 측은 기존과 달리 완전한 투명 병을 사용했다. 일부러 라벨도 위로 올려 병 외부에서도 막걸리가 섞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했다. 이 막걸리에는 탄산이 용해돼 있는 만큼 청량감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소비자들은 이 막걸리에 ‘샴페인 막걸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잔도 사발 잔이 아닌 샴페인 잔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제품을 즐기는 층이 와인 및 샴페인도 즐기는 젊은 소비층이라는 사실이다. 5060세대에만 집중했던 막걸리 시장이 다양한 세대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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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트 시장을 노린 막걸리도 최근 이슈 몰이를 하고 있다. 바로 떠먹는 막걸리 이화주다.

용인의 ‘술샘양조장’은 『음식디미방』 등에 기록한 술을 하나 복원한다. 바로 물을 거의 넣지 않아 떠먹어야 하는 ‘이화주’라는 술이다. 구멍 떡이라는 특별한 떡으로 만들어지는 이 술은 안동의 양반 가문에서 이바지 음식으로 가지고 갔던 술로, 고체 술이라고 불리는 고급 전통주다. 술샘양조장은 이 제품을 요거트 및 잼을 담는 모습으로 디자인했으며 과일, 쿠키 등과 함께 즐길 수 있게 했다. 한국의 MZ세대는 전통을 복원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즐길 수 있게 스토리를 담은 이화주의 모습에 열광했다.

시사점

주류 시장의 빅블러 현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하나는 틀에 갇힌 시장에서만 경쟁하지 말라는 것. 한때 위스키의 경쟁 상대는 코냑, 보드카, 진 등으로 해외 고급 주류로만 여겨졌다. 막걸리 역시 저렴하고 배부르면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늘 같은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매출을 올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은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만 성장할 가능성이 낮다. 하이볼, 복순도가, 이화주 등은 보다 크고 다른 시장인 맥주, 와인, 그리고 외식 시장으로 확장성을 이뤄냈다. 시장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소비자에게 많은 선택권을 줘야 한다. 하이볼은 지위가 높은 사람 등이 따라주면 무조건 마셔야 하는 권위주의에서 탈피, 자신의 취향대로 마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샴페인 막걸리 역시 소비자가 스스로 색다르게 마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제공했다. 강요 없는 음주 문화에 이런 술들이 도움이 되다 보니 MZ세대가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과 문화가 융복합되는 빅블러 현상은 알고 보면 늘 우리 곁에 있다. 다만 소비자는 먼저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소비 패턴으로 살짝 입증하거나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제품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팬심을 보여주며 소비한다. 한순간의 흐름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명욱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vegan_life@naver.com
필자는 일본 릿쿄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하다 한국 전통주에 빠져 주류 전문가의 길을 가게 됐다. 현재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 과정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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