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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3. RPA를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려면

RPA는 경쟁자 아닌 파트너
‘내 편’이라는 긍정적 마인드 확산이 관건

김종훈 ,정욱아 | 304호 (2020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RPA가 국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가 있다. 어떤 디지털 트렌드가 새로 부상하면 일단 시작부터 하고 보는 문화가 강력한 추진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이처럼 기업들에 스며들고 있는 RPA가 완전히 뿌리내리려면 자동화로 직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려는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사내 소통과 인식 제고를 통한 현업 직원의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 이런 토양에 RPA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 쌓여야 자동화가 나의 업무를 도와줄 것이라는 ‘긍정의 마인드’가 조직 내에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취약성과 예외 처리, 명확한 프로세스 분석과 현업-IT 간 협의를 통해 자동화에 적합한 업무를 취사선택함으로써 ‘부정의 마인드’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크게 생각하고, 작게 시작하고, 빨리 실패하라(Think big, small start, fast fail).’

한국 기업들이 로보틱 프로세스 자동화(RPA)를 적용하는 속도나 규모를 보면 놀라울 정도다. RPA 과제의 약 30%가 쓸모없는 ‘기업용 장난감(Corporate toy)’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글로벌 분석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열띤 호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IBM 지사가 있는 인도,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한국 등 5개국 가운데 한국IBM이 가장 많은 RPA 적용 레퍼런스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처럼 RPA가 국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가 있다. 어떤 디지털 트렌드가 새로 부상하면 일단 시작부터 하고 보는 문화가 강력한 추진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다른 나라 기업들이 로봇을 1∼2대씩 운영해보며 가능성을 탐색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일찌감치 몇십 대씩을 도입하며 통 큰 투자를 이어 왔다.

RPA에 대한 투자는 코로나19 이후 더 가속화됐다. 근원적으로 변하고 있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이 핵심 업무와 비핵심 업무를 나누고, 집중해야 할 핵심 업무를 더욱 고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노동 인구 감소까지 복병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기업이 기댈 곳은 기술 진보를 통한 업무 효율화라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도구가 바로 RPA다.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인 RPA는 소프트웨어 로봇에 사람의 일을 시킴으로써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작업을 자동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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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로봇은 크게 챗봇, 스크립트봇, 오토메이션봇으로 나뉜다. 이 중 RPA는 오토메이션봇에 해당한다. 개인 맞춤형 대화를 보조하는 챗봇, 서버 실행이나 e메일 생성 등 스크립트 작업을 돕는 스크립트봇과 구분되는 오토메이션봇은 UI(유저 인터베이스) 기반으로 업무를 자동화하도록 설계된 ‘비즈니스 특화 봇’이다. 이 오토메이션봇의 잠재적인 활동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물리적인 움직임을 요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데이터를 수집, 처리하는 영역(33%), 전문 지식을 적용하고 전문 인력과 상호작용하는 영역(30%) 등 기업 업무의 약 63%는 자동화가 가능하다.

이미 글로벌 기업 중 3분의 1이 IT, 재무/회계 업무에 이 봇을 적극적으로 활용 중이며 약 4분의 1이 조달, HR 업무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인 HfS리서치가 2017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금융권의 경우 재무/회계(69%), 조달(47%), HR(38%), IT, 서비스(28%) 순으로 RPA를 많이 적용하고 있었다. 가장 효과적이고 만족도가 높은 부문은 IT와 서비스 업무와 마스터 데이터 관리였다. 이처럼 상당수의 기업은 RPA를 적극 활용하면서 연구센터를 설립하거나 고위 임원을 RPA 수장으로 임명하고 있다. RPA가 각광받는 이유는 IT 시스템 변경이나 새로운 환경 개발 없이도 로봇으로 하여금 기존 인력의 업무를 대행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업무 관리, 예외 사항 처리만 해주면 업무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가령, 영업사원의 경우 주문 입력 자동화, 매출 실적 조회와 같은 단순 반복 업무는 봇에 맡기고 고부가가치 업무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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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A가 뿌리내리는 조직의 요건

최근 2∼3년간 국내 기업만 봐도 RPA에 대한 투자 비용이 늘고 직원 반발은 줄어드는 등 경제적, 심리적 진입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 이제 기업들은 RPA의 시범적 도입을 넘어 전사적 확산의 기로에 서 있다. 이에 따라 전사적인 RPA를 추진하기에 앞서 조직이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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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가장 중요한 요건은 ‘경영진의 의지’다. 롯데그룹의 경우 오너인 신동빈 회장이 오토메이션을 그룹 차원의 어젠다로 설정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면서 롯데홈쇼핑을 시작으로 신속하게 RPA를 도입하고 있다. RPA 확산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롯데홈쇼핑은 DT(Digital Transformation) 추진팀 산하에 RPA 전담 셀을 두고 사내•외에서 구성원 5명을 발탁해 RPA의 A부터 Z를 맡겼다. 사내 IT 시스템에 가장 정통한 IT 품질 담당자를 셀장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챗봇 개발자 등을 외부에서 채용해 전담 조직을 꾸린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RPA 관련 업무에만 매진한다.

이 조직은 처음에는 계열사 특화 과제(영업, 마케팅)의 자동화에 집중하다가 점점 타 계열사에도 쉽게 이식할 수 있는 공통 과제(재경, 물류, 지원)를 자동화해 퍼뜨리는 식으로 RPA의 단계적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과제 발굴을 위한 디스커버리 워크숍을 열고, 롯데홈쇼핑의 어떤 업무 프로세스가 RPA를 통해 개선됐는지 등 우수 활용 사례(Use case)들을 다른 계열사 직원들과 공유하면서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1∼2단계에서 약 50개 과제를 자동화한 데 이어 최근에는 3단계 고도화의 일환으로 AI를 RPA에 접목한 100개 과제를 추진 중이다.

경영진의 의지는 조직 구성원의 동요와 이탈을 막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RPA 확산의 단계마다 사람의 일이 통째로 사라지는데 이때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다른 고부가가치 업무에 전환 배치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내부 저항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만약 회사가 직원들의 경력 전환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일이 없어진 이들을 집에 보내 버린다면 어느 누구도 RPA 전담 조직에 협조하거나 자기 업무를 로봇에 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성과 평가자가 RPA 도입 효과를 단순히 업무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현업 부서를 닦달한다면 부서별로 기존 업무시간을 뻥튀기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결국, 경영진이 업무 자동화가 단지 인력 감축과 노동 시간 절감의 수단이 아니라 직원들의 역량과 편의를 증대하는 방편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전 구성원의 협조를 보장할 수 있다.

실제로 RPA 도입에 성공한 회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한 담당자가 다른 회사로 이직해 RPA 전환을 시도했다가 비협조적인 경영진과 임직원, 상이한 조직문화로 인해 결국 실패한 사례도 목격한 바 있다. 이는 RPA가 단순히 IT 프로젝트 같지만 C레벨의 의지와 아래로부터의 공감대 형성, 동기부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업에 뿌리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둘째, 사내 소통과 인식 제고를 통해 반드시 ‘현업 직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초창기만 해도 RPA 전담 조직들은 현업 직원들을 설득하고 교육하기 위한 콘텐츠가 제대로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에 HR처럼 오래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라 전부 새로 가보는 길이다 보니까 준비된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 부서나 팀에 가서 RPA가 무엇인지를 수없이 구두로 반복해야 하는 등 사내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전담 조직이 가동된 지 1, 2년이 넘어가자 외부 컨설팅사뿐만 아니라 기업 자체적으로 사내 교육/홍보 자료를 만들고 시장 조사를 하면서 RPA 과제 발굴 기획, 구축, 운영, 변화 관리에 필요한 매뉴얼을 하나씩 완성해가고 있다.

현업 직원들의 참여 유도를 위한 방법은 기업마다 다르다. 일부 증권사는 내부에 조직문화 태스크포스(TF)를 두고 이들에게 RPA에 대한 인식 개선 및 변화 관리 임무를 맡기고 있다. 현업에서 각 업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주인의식을 가진 이들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서다. 또 사내 문화 개선을 위해 소그룹, 작은 이사회를 두는 기업들도 있다. 가령, H화재는 과장급 미만의 직원들로 ‘주니어 보드(Junior board)’를 구성해 RPA 변화 관리에 활용하고 있다. 이 주니어 보드는 2주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갖고, 모일 때마다 자기가 속한 부서/팀의 업무 가운데 어떤 게 자동화에 가장 적합한 것 같은지를 최소 1가지 이상 발표해야 한다. 이 밖에도 코딩에 익숙한 주니어들을 중심으로 자동화 솔루션을 구현해보도록 하면서 문화를 바꿔 나가는 금융사들이 눈에 띈다.

콘테스트 등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H제약은 RPA를 현업에 적용한 우수 활용 사례를 공모하는 장을 마련하고, 총 6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1등에게 100만 원을 주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해 직원들의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제약사의 경우 약학, 생명공학 박사 등 고급 인력들이 늘 임상시험을 비롯한 각종 반복적인 테스트에 시간을 쏟고 있기 때문에 RPA를 통한 개선의 여지가 많다. H제약도 이 점에 착안해 현업의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이 콘테스트를 위해 제약 연구소에 있는 30여 명이 ppt 장표를 만들고 어떤 제제 공정을 RPA를 통해 자동화할지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이처럼 최근 기업들은 컨설팅사에 RPA 변화 관리를 맡기는 대신에 스스로 직원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참여를 독려할 방법을 고안하는 추세다.

직원들 마음에 ‘긍정의 씨앗’ 심어야

경영진의 의지와 현업 직원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조직 내에 이런 토양이 마련될 때 RPA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 쌓이기 때문이다. RPA의 성패는 자동화가 업무를 도와줄 것이란 ‘긍정의 마인드’가 얼마나 퍼지는지에 달렸다. 현재 35대 로봇이 대규모 150개의 RPA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C사의 경우 업무 자동화를 위한 직원들의 의지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현업 직원들도 단순히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차원을 넘어 점점 개발에까지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있다.이 회사에서는 공급망 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업무 종사자들의 야근과 주말 근무가 고질적인 문제였고, 직원들의 피로와 불만이 어쩔 수 없이 누적된 상태였다. 이들을 상대로 회사가 RPA의 필요성을 알리자 야근과 주말 근무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직원들의 학습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 주 52시간 근무 제도를 준수해야 하는 기업의 의무와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얻고자 하는 직원들의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RPA가 초과 근로를 해결해줄 대안으로 부상하면서 개발 조직이 과부하에 걸릴 정도로 현업에서의 요청이 이어졌다. 당장의 일손을 덜고 야근에서 해방되기 위한 자동화 과제 제안이 수백 개씩 밀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직접 코딩을 배우고, 명령어를 드래그하는 기술을 익혀 시민 개발자(Citizen developer)로 참여하려는 직원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현업 중심 가이드라인도 만들어졌다. 관련 교육도 흥행했다. 본업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업 100명을 모아 교육을 실행했는데 절반이 끝까지 남고 그중 40명이 자체 봇을 개발해 업무에 적용했다.

또 다른 회사인 L사도 팀마다 각자 자기들의 자동화 과제를 먼저 구현해달라는 요청이 RPA 전담 조직에 빗발칠 정도로 관심이 높다. 회사의 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 Chief Information Security Officer)가 RPA 전담 조직에 직접 연락해 “어떻게 어필해야 우리 업무도 자동화해줄 수 있냐”고 물은 일화가 회자될 정도다. 자동화 과제가 쌓이다 보면 업무의 중요성, RPA 구현 난이도, ROI(Return on Investment, 투자수익률) 등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백오피스 부서의 요청이 밀리기 쉽다. 이런 순서의 문제는 사내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하겠지만 이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질 정도로 현업에서 열의를 보일 때 RPA 도입도 성공할 수 있다. 그래야 가장 똑똑한 노동력인 인간이 하루에 주어진 8시간을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디지털 동료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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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부정의 마인드’가 한번 생기면 RPA 확산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조직이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RPA 전환을 시도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P사의 경우 광학문자인식(OCR) 기술을 바탕으로 문서 기반 작업을 디지털로 전환하려 했다가 손글씨 인식의 정확도가 떨어져 성과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경험을 했다. 장애도 자주 발생했고, 직원들이 결국 수동으로 글을 다시 입력하는 등 같은 일을 두 번 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 결과 “자동화도 별것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았고, 현업에 RPA의 필요성을 다시 납득시키고 협조를 구하는 데까지 애를 먹었다. 이처럼 한번 현업 직원들의 마음이 떠나고 자동화의 효용에 배신감을 느끼면 뒤늦게 컨설팅사를 바꾸거나 고가 RPA 솔루션을 적용한다 해도 아무도 안 도와준다.

이런 부정적 경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RPA 도입 시 몇 가지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사람 한 명이 하던 업무를 자동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무리 자동화를 해도 5∼10%의 확률로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모니터링을 하며 로봇의 일을 감시해야 한다. 그런데 감시할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잠깐 급한 용무를 보거나 집에 가는 등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국세청 PC 사이트에 접속해 보고서를 생성하는 임무가 있다고 했을 때 사이트의 버튼이 사라지거나 화면 배치가 달라지는 것만으로 봇은 업무를 처리하지 못한다. 특정 패턴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돼 있기에 경로 변경이나 민첩성을 요하는 업무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다. 로봇 자동화의 30%는 취약성과 예외 처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명확한 프로세스 분석과 현업-IT 간 협의를 통해 자동화에 적합한 업무를 취사선택해야 한다. 로봇은 케이스 관리나 복잡한 규정에 대한 처리는 지원하지 못한다. 즉, RPA가 모든 프로세스 자동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람의 ‘뇌’ 닮은 로봇에 대비할 때

지금까지의 로봇은 사람의 손과 눈을 대신할 뿐 사람이 정해준 로직만 따른다는 점에서 뇌가 없는 존재였다. 다만 손과 눈은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다는 장점 덕분에 금융, 식품, 유통에 이어 제약, 제조, 공공 부문에까지 빠르게 영역을 넓혀 왔다. 특히 기업 자원 관리(ERP) 시스템이 중요한 산업에서 장점이 크게 발휘됐다.

먼저, 로봇의 손은 사람의 손을 거칠 때 나오는 오류를 없애 줬다. 예를 들어, 조선업에서는 그동안 생산 관리자가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을 요청하는 작업을 맡아 왔는데 부품 코드가 2만 개가 넘다 보니 복사-붙여넣기 작업만 하더라도 실수가 나오곤 했다. 한 번의 착오로 잘못된 부품을 요청하면 원래 위치에 돌려놓아야 하는데 축구장 65개를 엎어 놓은 규모의 조선소에서 이 같은 이동은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했다. 그런데 RPA가 등장하면서 엑셀의 부품 코드를 긁어서 주문하는 과정에서 더는 실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출입 ERP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패션업에서도 RPA가 이런 단순 복사-붙여넣기 작업을 대체했다.

다음으로, 로봇의 빠른 눈은 데이터 조회와 대사 업무에 드는 시간을 대폭 줄여줬다. 제약업에서는 어떤 약의 적합성(Y/N) 여부에 대한 임상 데이터를 취합하고 보건복지부 사이트에 입력하는 일을, 증권업에서는 ETF(상장지수펀드) 등 설정 환매 내역을 예탁결제원 사이트에 입력하는 일을 자동화했다. 실제로 한 증권사에서는 하루 평균 2시간씩 걸리던 국내 펀드 업로드 업무가 10분으로 단축된 바 있다. 또 보험업에서는 계약자가 서류에 쓴 내용과 내부 시스템에 등록된 내용이 일치하는지, 등록하려던 값과 등록된 값을 비교 검증하는 일을 RPA가 맡고 있다.

그런데 이제 IBM의 오토메이션 전략은 로봇에 ‘뇌’까지 장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해 말 나온 IBM의 RPA 솔루션 ‘디지털 워커(Digital worker)’가 RPA에 OCR, 자연어 처리(NLP), 챗봇 등의 AI를 적용하기 시작한 데 이어 최근에는 AI 기반 자동화 역량을 갖춘 ‘WDG 오토메이션(WDG Automation)’을 인수했다. 이번 M&A로 IBM은 오토메이션 플랫폼에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는 RPA에 AI, 데이터 애널리틱스 등이 결합할 수 있게 됐다. RPA만으로는 인지 기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지만 RPA가 AI 등과 상호 보완하면 비즈니스 판단을 내리고 수많은 비정형 콘텐츠를 처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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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의 병상 배정 시스템은 RPA가 AI와 결합할 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하루 700여 명의 환자가 입원하고 퇴원하는 대형 병원이다. 그런데 2019년까지만 해도 불과 몇 명의 간호사가 모든 환자의 병상 배정 업무를 수작업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환자의 연령, 병명, 중증도, 진료 동선 등 50여 개가 넘는 기준을 고려해 병상을 배정하는 업무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이었다. 담당자가 판단 역량을 갖추고 숙련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또 예상치 않은 중증 환자가 오기라도 하면 하루에 여러 번 상황이 바뀌고, 환자들의 컴플레인을 고려해 시시각각 돌발 변수에 대응해야 했다. 이런 문제가 간호사 대상 워크숍에서 언급되자 처음에는 입원 환자 등록, 예약 변경, 취소 같은 단순 반복 업무만 RPA를 통해 자동화하려고 했던 병원도 최소한 병상 배정과 관련해서는 복잡성을 해결할 AI 기반 알고리즘을 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고안된 AI는 앞서 언급된 정성적 요소들과 관련된 데이터를 활용해 마치 KTX 기차의 좌석을 배치하듯이 어떤 환자를 몇 호실에 배정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이제 서울아산병원에서는 AI가 환자가 배정될 병상을 알려주면, 로봇이 입원 시스템을 열어서 등록해주고, 환자가 회복되면 퇴원 시스템을 읽어서 퇴원 처리를 해주는 등 AI와 RPA가 협업하고 있다. 실제로 매일 100건 이상의 입원 등록 절차가 사람의 개입 없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병상 배정 업무의 실수도 사라졌고 진료과 그룹별 입원 환자 확인부터 전체 병상 배정까지 걸리던 시간도 최소 7∼8분에서 최대 20분까지 줄어들었다.

이처럼 최근 많은 국내 기업은 RPA에 뇌가 수행하던 인지 기능을 접목하기 시작한 AI 응용(Applied AI) 단계에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인간과 다양한 직무별 디지털 워커가 함께 근무하는 모습이 곧 일상이 될 것이다. 물론 IBM의 디지털 워커 솔루션을 사용한다고 해서 AI를 결합할 때 반드시 왓슨을 쓰는 것은 아니다. 왓슨이 아닌 다른 개방형 솔루션이나 회사의 레거시 자산을 활용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회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술을 불러오든, 오픈소스를 활용하든 단지 사람의 손과 눈을 대체하는 로봇이 아니라 뇌를 닮은 진보된 로봇을 구현하고, 그런 로봇과의 유기적인 협업에 대비하는 일이다. 디지털 워커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방법을 모색할 때 비로소 RPA를 발판으로 RPA를 넘어선(beyond RPA)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김종훈 한국IBM 전무 kjh@kr.ibm.com
김종훈 전무는 현재 한국IBM 내 클라우드와 코그너티브(Cognitive) 소프트웨어 전체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2000년 IBM 컨설팅 사업부로 입사해 2012년 IBM 뉴욕 본사에서 기업 전략 업무를 수행한 뒤, 한국으로 복귀해 소프트웨어 사업부 기업 총괄 영업,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사업 본부장 등을 지냈다.

정욱아 한국IBM 부장 uajeong@kr.ibm.com
정욱아 부장은 현재 한국IBM 클라우드 인테그레이션팀에서 디지털 비즈니스 자동화(Digital Business Automation) 영역 솔루션 기술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IBM 입사 전에는 우리은행(전 한빛은행), 한국BMC 등에서 전산, IT 서비스 관리 업무를 맡았다.

정리=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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