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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 과연 최선인가?

박지원 | 17호 (2008년 9월 Issue 2)
박지원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달팽이 두 마리가 한 줄로 책상 위를 기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먼저 기어가는 달팽이는 책상 표면과의 마찰 때문에 꽤 많은 힘을 소모해야 한다. 반면에 뒤이어 따라가는 달팽이는 앞의 달팽이가 묻혀 놓은 점액 덕분에 손쉽게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업들이 다른 회사의 경영 사례·제도를 모방하는 이유다. 모방은 기업이 더 적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더 빨리 성과를 얻을 수 있게 해 준다. 맨스필드 등의 연구에 따르면 남의 제품을 모방해 시장에 내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할 때보다 약 70%나 짧다고 한다. 모방은 또한 ‘선진 기업들의 최신 경영 트렌드를 발 빠르게 도입하는 회사’란 이미지를 가져다 주고, 새로운 제도 도입이 실패하더라도 이에 대한 책임전가나 회피가 쉽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경영 사례·제도의 모방은 HR 분야에서도 활발하다. 머서 컨설팅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기업이 보상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자료는 외부 벤치마킹(응답자의 79%)이었고, 그 다음은 자료로 정리된 우수 사례(best practice, 61%)였다.(복수응답)
 
글로벌 스탠더드 도입, 과연 효과적인가
이와 같은 이유로 기업들은 선진 기업의 경영 트렌드,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기업 경영, 특히 HR에서 무분별하게 글로벌 스탠더드를 좇는 것은 사실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과 깊은 연관이 있는 HR 제도는 기업 고유의 전략과 기업문화, 경영진의 철학, 구성원의 가치관 등과 연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HR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겨지는 제도의 대부분은 미국 기업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미국 기업과 문화와 전략이 다른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일 경우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1990년대 후반에 미국 기업 사이에서 성과주의가 각광을 받을 때 이를 그대로 도입했다가 큰 부작용만 일으킨 후지쓰가 대표적인 사례다.
 
후지쓰는 1992년 사상 최초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 회사 경영진은 당시 세계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던 미국 실리콘밸리를 시찰하면서 성과주의, 즉 성과에 대한 보상 차등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93년 후지쓰는 일본 대기업 최초로 성과주의를 도입했다. 나이나 서열보다는 실력을 강조했으며, 엄격한 목표관리와 급여차등화를 실시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증폭됐고 성과주의를 앞세워 적용해야 할 중간관리자들이 오히려 성과주의 적용의 사각지대에서 성과와 무관하게 높은 평가와 급여를 받는 도덕적 해이를 보였으며 여전한 사내의 파벌주의는 성과주의 정착의 걸림돌이 됐다. 후지쓰의 성과주의는 결국 이직률과 급여만 올려놓은 채 실패했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글로벌 스탠더드 추구가 부작용을 불러오고, 심지어 자사의 강점을 약화시키는 사례까지 발생하자 최근에는 ‘우리만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소수의 기업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Going My Way를 하는 기업의 유형
1.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철학
우선 경영 기법의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자사의 경영 철학에 맞는 제도를 지속적으로 꿋꿋하게 운영하는 기업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세계 3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헤드헌팅사 에곤 젠더가 대표적인 사례다. 에곤 젠더는 성과주의를 강조하는 대부분의 헤드헌팅이나 컨설팅 회사와 달리 파트너급에 대한 ‘연공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이 회사는 전사적 이익에 대해 공동 배분하는 성과급(shares of the profit)을 모든 파트너에게 동일한 금액으로 지급한다. 또한 이익 분배 성과급(profit share)의 경우 재원의 60%는 모든 파트너에게 동일 금액, 나머지 40%는 연공(seniority)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경쟁 업체들은 이런 보상 정책이 우수 인재 유지 확보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며 우려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러나 에곤 젠더는 뛰어난 컨설턴트를 영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또 동종 업계의 평균 이직률(30%)보다 훨씬 낮은 인재 유출(이직률 2%)을 보이고 있다.
 
에곤 젠더가 이런 보상 정책을 실시하는 배경에는 ‘헤드헌팅 업계에서는 컨설턴트가 고객과 친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조직성과 향상에 필수적이며, 이러한 네트워크는 오랜 근무 경험을 통해 비로소 구축될 수 있다’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즉 이 회사는 성과를 창출하는데 있어 연공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꿋꿋하게 연공제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에곤 젠더 컨설턴트의 대부분은 평균 재직기간 12년 이상의 베테랑들이다. 이들은 오랜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수백 개의 회사, 수천 명의 임원진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도요타 역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사의 철학에 맞는 인사 제도를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8년 무디스는 도요타가 발행한 장기채권의 등급을 하향조정하기로 했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 바로 ‘기업 경쟁력을 저하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종신고용제였다. 이에 대해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 사장은 “정리해고를 하는 경영자는 할복을 해야 할 것”이라면서 종신고용제를 평가 절하한 무디스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도요타는 종신고용제를 유지하면서도 세계 1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또 도요타는 구성원 평가에 있어서도 성과(업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과주의를 기반으로 정량적 평가를 강화하는 다른 기업의 움직임과 반대된다. 대신 도요타는 지속적인 고성과 창출의 근본 요인은 ‘과정 관리(process manage -ment)’에 있다는 철학을 기반으로 업무의 과정 요인인 역량을 중심으로 한 평가 체제를 운영한다. 부장·실장 등의 관리직은 과제 창조력, 과제 수행력, 조직 관리력, 인재 활용력, 인망(人望) 등을 기준으로 평가 받는다. 그 결과는 승진·보상 등 주요 인사 의사결정에 반영되고 있다.
 
2. 하이브리드 HR 전략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조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부분만을 들여와 자사의 강점과 접목시킴으로써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하이브리드(hybrid) 전략을 구사하는 기업들도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일본 대기업들이 일본과 미국 자본주의의 장점만을 채택한 이른바 ‘저팽글로색슨 자본주의(JapAnglo-Saxon Capitalism)’로 활로를 찾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영국 킹스 대학과 일본 와세다대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723개 일본 기업 가운데 미국식 경영 방식과 일본식 경영 방식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채택한 기업은 24%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라는 전통적 일본 경영 모델과 미국식 성과주의를 융합하여 ‘실력 종신주의’라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만들어 냈다.
 
실력 종신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캐논이다. 미타라이 후지오 캐논 사장은 2000년 초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종신고용과 연공주의의 미덕만으로 정체에 빠져 있는 캐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장고 끝에 성과주의를 기반으로 한 인사 제도의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조직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일본식의 강점을 버릴 수 없었다. 캐논 경영진은 특히 종신고용을 잘 활용하면 직원의 충성심을 극대화하고 장기적으로 구성원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캐논의 ‘실력 종신주의’가 탄생했다. 내용은 60세 정년까지의 종신고용은 지속적으로 유지하지만, 연공서열을 없애고 철저하게 성과에 따라 승진과 보상을 하는 것이다. 과장을 하다가도 실적이 나쁘면 계장으로 내려가고, 후배 계장이 과장으로 선임되어 선배를 지휘할 수도 있다. 연봉도 철저히 하는 일과 성과에 따라 차등화 했다.
 
캐논 인사팀은 새 인사 모델을 갖고 노조를 수없이 찾아 설득했고, 노조 집행부도 결국 회사 측 안에 동의했다. 캐논 노사는 급격한 변화 대신 34년간의 유예기간을 두는 점진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2001년부터 우선 관리직(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직무급을 도입했으며, 2005년부터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캐논은 또 기본급 대신 보너스 부문에 차등을 뒀다.
 
50대 과장이 즐비하던 과거와 달리 캐논에서는 이제 30대 부장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장점을 보완·혼합해 활용함으로써 좀 더 효과적인 제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3. 특유의 제도
기존의 이론과 상식을 뛰어넘는 특유의 제도를 탄생시킨 기업을 들 수 있다. 최근 화제를 몰고 온 ‘괴짜 기업’ 미라이 공업이나 독특한 기업 경영 방식으로 브라질에서 많은 조명을 받고 있는 셈코가 그 예이다.
 
미라이 공업은 연 매출 2500억원, 경상이익률은 15%로 일본 최고의 중소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 회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성과가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의 독특한 인사 철학이다. 야마다 아키오 사장은 직원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인센티브를 주지 않고, 아무리 능력이 모자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심지어 승진 심사를 할 때 사원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쟁반에 놓고 선풍기를 돌려 멀리 날아간 순서대로 직급을 결정하기도 한다.
 
브리질의 셈코는 월금요일의 공식적인 업무 시간을 지정하지 않고 직원이 자신이 원하는 요일에 쉴 수 있도록 한다. 화요일 오후에 영화를 보러 가고, 대신 교통량이 적은 토요일에 출근해도 된다는 말이다. 출퇴근 시간도 구성원 각자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이 회사는 구성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지원도 해 준다. ‘Up-and-Down-Pay’ 시스템은 일을 적게 하는 대신 그에 걸맞게 급여를 낮출 수 있는 제도이다.
 
셈코는 이렇게 유연한 보상 제도를 통해 구성원들 중 일시적인 문제나 질병, 또는 가족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경력상의 불이익을 염려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전념하거나 마음을 새롭게 정리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Work and Stop’은 구성원 누구든지 3년까지 휴직할 수 있는 제도다. 회사는 장기 휴직 기간에 업무를 대신 해 줄 사람을 물색해 주고, 복직도 보장해줌으로써 구성원들로 하여금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셈코나 미라이 공업이 상식을 뛰어넘는 독특한 HR 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두 회사 최고경영자(CEO)가 구성원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미라이 공업의 야마다 사장은 구성원을 믿고 일을 맡기면 누구나 알아서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되풀이해 말한다. 셈코의 리카르도 세믈러 CEO는 기업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책임감을 가진 성숙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이러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셈코나 미라이 공업이 효율적이거나 효과적인 경영 방식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두 CEO는 독특한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글로벌 스탠더드와 관계없이 자사만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어 최대의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남들과 다른, 독특한 제도가 반드시 성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변화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제도를 그대로 운영하다가 실패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성공한 기업·구성원들로부터 사랑 받는 기업을 살펴보면 자사에 꼭 맞는 고유의 제도를 운영하는 사례가 예상 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 불리는 제도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검증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업의 관리자들은 맹목적인 글로벌 스탠더드 추구는 분명히 역효과도 크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제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 도입에 앞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우리 회사 고유의 한국적 스탠더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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