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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변질된 조직, 철폐만이 정답은 아니다

김준태 | 248호 (2018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서원은 본래 훌륭한 유학자를 기리고, 학문을 연구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붕당 정치에 휘말려 서원이 학연과 연계된 세력 대결의 장이 되면서 무분별하게 건립되고 면세권을 남용하는 폐해가 심각해진다. 숙종과 경종과 영종이 서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지만 오히려 서원이 지역사회에서의 권한을 남용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기에 이르면서 서원의 긍정적인 기능까지 사라져버린다. 서원의 흥망성쇠는 하위 조직으로 권한의 이임과 통제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경영자에게 통찰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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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설령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금 서원(書院)은 선유(先儒)를 제사하는 곳이 아니라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 고종 때 박재형이 지은 『근세조선정감』에 보면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이렇게 질타한다. 서원이 설립 정신을 망각하고 타락해 백성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서원은 앞 세대의 훌륭한 유학자를 기리고, 학문을 연구하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543년(중종 38년) 주세붕이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을 창립한 것이 시초다. 백운동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 1 으로서 1550년(명종 5년)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전국 각지에 수많은 서원이 세워졌는데 300년 동안 600여 개소에 이른다. 2

서원은 초창기만 해도 강학(講學)과 수련의 공간으로 쓰였다. 서원의 체제와 교육과정을 정형화한 퇴계 이황은 서원에 들어온 유생들의 책임감과 절제, 부단한 노력을 강조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림(士林)이 건강해야 하는데, 서원이 그 전진기지가 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서원 증가가 낳은 폐단

시간이 흐르면서 서원은 차츰 변질돼 갔다. 기본적으로 서원에는 존경받는 유학자의 위패가 봉안(奉安)된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정신을 배우고 계승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이 봉안이 학문적 권위를 의미하게 되면서 서원은 세력 대결의 장으로 변모했다. 서원에 누구를 모실 것인지, 얼마나 많은 서원에 봉안할 것인지, 국가에서 사액을 받았는지를 두고 경쟁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붕당과 맞물리면서 더욱 심해진다. 조선의 붕당 형성에는 학연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서원이 그 학연을 매개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대 당의 것은 억제하고 자당(自黨)의 것은 장려하면서 서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같은 붕당의 서원을 늘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는 원칙도 훼손했다. 덕망이 높고 학문적 업적을 세운 유학자가 아니라 고위 관료, 당쟁에 희생된 인물의 서원이 만들어졌다. 고을을 잘 다스린 수령, 자손이 귀하게 된 사람을 봉안한 서원도 생겨났다. 조선 후기 서원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남설(濫說, 마구잡이로 건설됨)’과 ‘첩설(疊設, 중복하여 건설됨)’, 사액의 남발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서원의 증가는 사회적으로도 부작용을 낳았는데 우선 양역(良役)3 면제자가 크게 늘어났다. 원생을 비롯해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원속(院屬))들은 양역 의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면역자(免役者, 양반 등)가 증가하고 유역자(有役者, 양인)가 감소하면서 백성들의 양역부담이 과중한 상태였다. 서원이 이를 부채질한 것이다.

다음으로 서원의 증가는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다. 나라에서 서원을 사액하면 토지 3결에 대한 면세권을 준다.4 서원의 운영, 유지보수 비용을 지원하고 서적도 하사했다. 서원이 늘어나는 만큼 나라의 지출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서원 자체의 병폐도 심각했는데 사액서원이 아니면서도 서원의 운영비를 관아에서 각출했다. ‘서원촌(書院村)’을 만들어 토지를 무단으로 점거했으며 고을의 풍습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백성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원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원래 서원은 사설기관이기 때문에 제반 사무를 자율에 맡겨왔다.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의 차원에서 격려하고 지원할 뿐 국가는 서원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처음 서원 단속은 무분별한 건립 행위를 통제하고 국가의 재정낭비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숙종은 나라에 신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서원을 세우지 못하게 했다. 첩설을 단속하고 첩설한 서원에 대해서는 사액을 금지했다. 뒤이어 보위에 오른 경종은 서원에 대한 지방관아의 보조를 금지했으며 서원에 딸린 ‘원속(하인)’제도를 폐지했다. 영조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숙종의 금지조치 이후 건립된 서원을 모두 헐어버렸다. 5 신하들이 주자의 위패를 모신 서원은 그대로 둬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 서원을 건립한 것이 어찌 높이고 사모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그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이루려는 것에 불과하니 도리어 선현을 모욕하는 것이다”라며 꾸짖기도 했다.6

이상의 조치들은 서원의 첩설과 남설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막았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 것은 아니다. 특히 설립 규제와 재정 손실 방지에 중점을 둬서 서원이 양산하는 사회적 폐단을 해소하지 못했다. 더욱이 나라에서 서원 지원을 줄이면서 서원은 백성들을 더욱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에게 비용을 부과했고 백성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는 ‘묵패(墨牌)’7 를 발행해 형벌을 가했다. 공적인 법질서까지 훼손한 것으로 서원이 주는 폐해는 오히려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가 생겨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현상만 개선하려 한데다 방향까지 잘못 설정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다.

서원 철폐가 정답인가?

고종 대의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는 간접적인 규제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서원을 철폐해 문제의 근본원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대원군은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수백여 개의 서원을 정리한다.8

대원군이 서원의 문을 닫아버린 이유는 복합적이다. 1) 서원의 재산을 환수해 국가재정을 확충하며 2) 임금이 직접 서원을 통제해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3) 서원이 불법을 자행하고 공권력을 침해하는 상황을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4) 서원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임계점에 이른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대원군은 이 중에서 마지막 이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명분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서원의 철폐는 유학을 진흥해야 하는 국가 이념에 어긋난다는 반발에 대해 백성이 우선이라는 논리로 대응한 것이다.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위민(爲民)’은 유학의 대전제로, 백성에게 피해를 준다는 공격 앞에서 서원들의 저항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대원군은 섭정에 오르자마자 대왕대비의 전교를 빌려 전국의 서원 현황을 조사하게 했다. 9 그러면서 서원의 실태와 그에 따른 문제점을 공론화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선, 첩설한 서원과 사사롭게 건립한 서원을 철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 이어 고종 2년에는 만동묘(萬東廟)를 폐지했다. 11 송시열의 유언으로 세워진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대원군은 대보단(大報壇) 12 을 통해 이미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며 사적인 제사는 필요치 않다고 했다. 다음으로 3년 후인 1868년(고종 5년)에는 미사액 서원을 폐쇄했고 마침내 1871년(고종 8년)에는 전면적인 철폐를 단행한다.

이처럼 대원군이 8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을 추진한 것은 시행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개혁에는 빠른 속도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사안이 조직의 정체성과 직결되거나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면 즉각적인 조치는 혼란과 반발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되면 개혁은 좌초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쉬운 일에서 어려운 일로 강도를 차츰 높여갈 필요가 있다. 여론을 수렴해 명분을 확립하고 지지를 넓히며 반발을 억제할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대원군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서원 철폐 작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대원군의 방식에도 한계는 있다. 대원군은 왜 문제가 일어났는지, 서원이 근본정신을 잃고 폐단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를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서원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서원 자체를 제거해버렸다. 이는 나태한 방식이다. 서원의 장점마저 없애버린 것일 뿐 아니라 문제를 단순화해 버렸다. 사안을 단순화해 단일한 해결책을 찾으려 들면 그를 둘러싼 시스템과 환경은 간과되는 법이다. 즉 서원은 이미 교육, 정치, 지방행정, 문화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서원만 따로 떼어내 리셋하면 서원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서원과 관련돼 있던 다른 분야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실제로 대원군의 조치로 서원이 사라지면서 지방 교육의 부실이 문제가 됐다. 성균관과 향교 같은 국공립기관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전 국민의 근대화 교육이 요청되면서 서원의 부활을 논의하는 목소리가 활발해졌던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미 서원의 교육 인프라가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추진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서원의 변질과 철폐 사례는 다국적 기업 혹은 다 사업부 조직의 권한 위임과 통제를 고민해야 하는 기업 경영자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자회사 혹은 사업부가 이양받은 권한과 자율성이 변질돼 폐해가 심각해질 때 경영자는 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일방적인 통제 혹은 철수 같은 극단적인 선택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경영자는 기존 자회사 혹은 사업부가 닦은 인프라를 잘 살리면서도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관리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만약 위정자들이 서원의 결함과 문제점을 해결하는 노력과 함께 서원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리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서원이 본래의 정신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교육기구이자 수련의 도장으로서 서원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방향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단점을 압도할 정도로 강점을 강화해 변화를 이끌어냈다면 서원은 아마도 혁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서원 철폐는 문제가 일어나게 된 이유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사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준태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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