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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2인자의 길, 王의 뜻을 따르되 잘못을 바로잡다

김준태 | 203호 (2016년 6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연재의 마지막인 이번 글에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재상들의 사례를 종합해바람직한 2인자의 길을 정리했다. 물론 완벽한 모범사례가 있을 리 없고 정답이나 우열도 없다. 다만 조선시대 임금과 재상의 관계가 현 시대 기업의 오너와 전문경영인 구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2인자들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을 살리는 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1인자의 뜻에 부합하면서도 그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엄청난 난제이자 딜레마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인자가 1인자와 압도적인 신뢰자본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 대체불가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2인자의 자리는 위태롭고 때론 업무가 명확하지도 않지만, 이것은 그만큼 가능성 또한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이번 호를 끝으로 김준태 작가의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연재를 마칩니다. 김 작가는 이어 조선시대 성공한 정책과 실패한 정책의 특징을 짚고 현대 경영에 주는 교훈을 담는 ‘Case Study 조선’(가칭)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필자는 DBR 22개의 아티클을 연재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이끌었던 재상들에 대해 살펴봤다. 시기적으로 500년에 걸쳐 있고 영의정을 지낸 인물만도 200명에 가깝기 때문에 단순화해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사회에서 재상은 독특한 위치의 2인자였다. 형식적인 서열은 2인자지만 그에게 부여된 책무는 1인자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는 통치이념인 유학(儒學)이 세습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재상을 국가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설정했기 때문인데1 재상은성인(聖人)의 정치를 실현할 책임을 지고 만물을 다스리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신하를 통솔하여 인사(人事)와 상벌을 주관한다. “바른 정치와 덕에 의한 교화, 국가의 명령도 모두 재상을 통해 나온다2 고 여겨졌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달랐다. 재상 위에는 그에 대한 임면권뿐 아니라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절대군주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이 약했던 시대조차 임금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상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구조였다. 1인자의 규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것이 재상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게 된 것이다. 재상의 성공과 실패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하느냐가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아티클은 본 연재의 마지막회로, 지금까지 소개한 재상들의 사례를 종합해 이 문제에 대응하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완벽한 모범사례는 없다. 정답은 없고 우열도 없다. 다만 조선시대 임금-재상의 관계가 현 시대 기업의 오너-전문경영인의 구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늘의 2인자들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인자의 뜻에 부합한다

 

아무리 재상이 뛰어나고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금에 의해위임된 힘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재상권의 절차적 정당성은 임금에게서 나온다. 재상이 이를 마음대로 행사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상이 자신의 경륜을 마음껏 펼치려면 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특히 정치 전면에 서서 왕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임금과 함께라면 재상은 더더욱 임금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필요가 있다.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 1346∼1405)과 하륜(河崙, 1347∼1416)의 처세를 보자. 두 사람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놓았다. 권력과 관련된 일에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태종의 의심을 완화시켰다. 그러면서 조세개혁, 제도개편, 왕권강화 등 태종의 지시사항을 완수하는 일에 매진한다. 이들은 자체적인 어젠다를 실천하기보다는 임금이 추진하는 목표 안에서 소임을 찾았다. 임금의 뜻에 반대한 적이 없고 굴종적이며 아첨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겠으나 임금의 권위와 힘을 유용하게 활용함으로써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는 인정할 만하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자신에게 오는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일인자인 세조에게 돌렸으며, 세조에게 부담이 가고 세조가 욕을 먹을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자신이 나서서 처리했다.

2인자는 이미 많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1인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잠재적인 경쟁자로 간주되기 쉬운데 1인자가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을 떠안고 공은 모두 1인자에게 돌림으로써 1인자가 갖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까지 해소시킨 것이다.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방식은 재상의 중요한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격군(格君)’, 즉 임금이 바른 길을 가도록 보도(保導)하고 임금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극간(極諫)하는 책무 말이다. 사실 신하가 돼 임금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면에서 임금을 반박하고 임금의 과오를 지적하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2인자인 재상은 더욱 조심스럽다. 2인자와 1인자 간의 충돌은 공동체의 안정을 위협하고, 1인자는 이를 자신에 대한 거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이 오지 않는다면 직장에서 팀장이 임원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전문경영인이 오너와 다른 의견을 내는 모습까지 상상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전제군주제하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어떠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자의 결정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리고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준다면 2인자는 주저하지 말고 나서야 한다.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이 무서워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2인자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중종이 절차를 무시한 채 음모를 꾸며 조광조 등을 숙청하려 하자 강경하게 맞섰다. 임금이 공적인 의사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신하를 죽이려 드는 나라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다. 젊고 곧은 선비들은 더 이상 조정에 출사하지 않을 것이고 공론과 시스템이 무너져 사적인 통치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에 정광필은 연일 중종에게 극간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 역시 연로한 나이에 귀양을 가고 힘든 고난을 겪어야 했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사림의 맥은 끊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너의 고집을 꺾어 기업과 조직을 살리는 임원이 있다면 바로 이 같은 2인자들일 것이다.

 

이처럼극간의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상은 평상시에 임금의위대한 반대자(great dissenter)’ ‘충성스러운 반대당(loyal opposition)’이 돼야 한다. 1인자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1인자는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확신 때문에 자신이 내린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조직 전체가 1인자의 뜻에 맞춰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조직은 자정능력을 잃고 잘못이 발생해도 이를 해결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에 바로 재상의 역할이 있다. 재상은 임금과 더불어 가장 넓은 시야를 갖추고 일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존재다. 임금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쪽의 가치를 환기시켜주고, 다양한 의견들의 장점을 종합해 줄 수 있는 적임자인 것이다. 허조(許稠, 1369∼1439)는 세종의 거의 모든 조치를 반대하고 소수의견을 내곤 했는데 세종은 이러한 허조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개혁을 보완하고 정책의 완결성을 높일 수가 있었다. 반대를 통해 1인자가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도록 도운 것이다. 온갖 경영서적마다 CEO들에게 하는 조언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을 두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압도적인 신뢰자본을 쌓는다

 

물론 세종과 허조의 역할 모델은 이상적이다. 세종은 허조 외에도 황희, 맹사성 등 임금과 다른 의견을 내놓는 신하들을 재상으로 중용했고 서슴지 않고 임금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총애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세종과 같은 성군(聖君)이나 가능한 경지다. “면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으면 순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3 는 정조의 고백처럼 아무리 훌륭한 임금도 비판을 기꺼이 용납하기란 쉽지가 않다. 결국 인정하고 고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상대방에게 언짢은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하물며 보통 수준의 임금, 수준 미달의 임금이라면 어떻겠는가. 그 자리에서 분노를 사서 삭탈관직 되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올려야 하는 재상의 책임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평소에 신뢰자본을 충분히 쌓아둠으로써 분노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당장은 귀에 거슬리지만 이 사람이 나를 위하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참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임을 믿고 경청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그랬다.

 

이원익은 이순신이 억울하게 잡혀갈 때 끝까지 변호하며대사를 끝장내려 하느냐고 선조를 비판했고, 임해군 처벌, 인목대비 폐비 등 광해군의 조치에 대항했으며, 인조에게도 끊임없이 간언을 올렸던 인물이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4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그에게 각별한 예우를 표시했고, 광해군도 그의 사직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듯 나는 경을 바라본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5

 

이원익이 임금의 말을 고분고분 따라주는 존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이유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자신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앞장섰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않고 최전선으로 나갔고 깊은 병에 들었으면서도 외교적 난제를 직접 처리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 책임자를 자원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임금이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국가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85세의 나이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제일 먼저 달려6 왔던 것이 이원익이다.이와 같은 그의 헌신적인 자세가 때론 임금과 의견을 달리하고 소원해지더라도 믿을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대체불가의 영역을 구축한다

 

이 밖에도 2인자인 재상이 임금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진정한 힘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냐에 달렸듯이 2인자의 참된 힘은 2인자라는 자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자리가 주는 힘은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바로 사라질 따름이다. 그보다는 그가 그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구성원들이 얼마나 그를 필요로 하고, 그가 1인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가 2인자의 힘을 결정한다. 그 힘이 대체될 수 없는 것일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첨을 통해 승진한 임원이나 전문경영인이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거나 기업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계속 아부를 통해서만 연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대체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효종 때 영의정이자 ‘Mr.대동법김육(金堉, 1580∼1658) 2인자로서는 단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대동법의 시행을 위해 고집스러웠고 타협할 줄 몰랐다. 공동체 내부의 다양한 생각과 입장들을 조율하기는커녕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다가 반감을 사기도 했다. 1인자와의 충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육은 당시 조선 사회가 당면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가지고 있었다. 행정가로서 실무 능력도 뛰어났다. 효종은 이러한 김육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에게 재상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100년간에 걸쳐 진행돼온 대동법 개혁 작업이 그의 대에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최명길(崔鳴吉, 1586∼1647)도 기억할 만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거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두 사람은 오직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임금이나 왕실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더 우선했기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산적도 있었지만 임금 또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들 재상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울러 붕당 간 유혈보복의 악순환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했던 남구만(南九萬, 1629∼1711), 국가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던 정태화(鄭太和, 1602∼1673), 높은 경륜과 인망으로 불순한 세력을 억제하며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이끌어낸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정조의 정치비전을 충실히 뒷받침한 채제공(蔡濟恭, 1720∼1799) 1인자가 절실히 필요로 했고, 해당 시대정신이 요구했던 2인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장점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인자의 지우를 얻어 재상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왕권과 신권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고 2인자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던 재상들에 대해 정리해봤다. 재상은 나라를 고루 균형 있게 운영하고(재제·宰制) 임금을 보좌해 바른 길로 인도하는(보상·輔相) 자리다. 그런데 이 역할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면이 있다. 각 조의 판서처럼 전담하는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문무백관을 통솔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다스려야 하는 임무는 임금과 겹친다. 그럼에도 굳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세습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며, 임금 혼자서 한 나라의 모든 일을 감독하고 결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놓치는 부분을 보완해주고 임금과 같은 시야에서 임금이 내려야 할 선택에 대해 조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임금의 갑작스런 유고를 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할 때문에 재상은 임금과 부딪히게 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었다. 재상에게 권한을 줘 국정을 담당하게 하다가도 갑자기 해임하거나 숙청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상은 이러한 태생적인 살얼음판 위에서 자신의 역할모델을 찾아야 했다. 아무리 선한 의도와 목표가 있더라도 1인자와의 관계를 무시하면 성공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관철시키면서도 이를 임금의 성향과 특성에 맞추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릇 어떤 직책이든 그 직책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의 양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조선의 재상들은 2인자의 한계를 감수하고 2인자로서의 도리에 충실하면서도 각자만의 2인자상을 정립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2인자의 자리는 위태롭고 2인자의 업무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것은 가능성 또한 크다는 의미도 된다. 임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구체적이고 다양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2인자가 1인자와의 관계를 현명하게 관리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권한을 정립해간다면 1인자가 필요로 하고, 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2인자가 될 수 있다. 조선의 재상들이 입증하듯 말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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