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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世臣:오래된 조력자는 필요하다

이치억 | 186호 (2015년 10월 Issue 1)

 

과거 봉건사회에는 세신(世臣)이라는 것이 있었다. 세신은 세록지신(世祿之臣), 즉 대대로 내려오면서 관직을 받아 임금을 섬기는 신하라는 뜻이다. 맹자는역사가 깊은 나라는 종묘·사직에 교목(喬木)이 즐비한 나라가 아니라 세신이 있는 나라라고 했다. , 세신은 건실한 국가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했다. 세신의 개념과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고려·조선시대에는 음서(蔭敍) 또는 음사(蔭仕)라는 제도가 있었다. 고위 관료나 공신의 자제나 손자 등을 특별 채용하는 일이었다. 이게 웬 특권제도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은 쓰는 사람 나름. 악당이 쓰면 흉기가 되지만 셰프가 칼을 잡으면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 제도는 비록 폐단도 많았지만 전적으로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제도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맹자가 세신의 필요를 주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뉴페이스의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은 유학자들의 일관된 지론이었다. 중세 서구에서 생각조차 못했던 과거(科擧)제도는 그 사상의 산물이다. 맹자는 몰락한 집안에서 평지돌출했기에 관직을 얻기 위해 열국의 왕들에게 열심히 PR해야 했던 인물로서 그 자신이 세신이나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신이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세신은 대대로 군주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온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이이며 이로써 그 나라 역사의 한 축을 형성한 사람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국사(國事)를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여길 것이고, 군주의 오랜 벗이 될 것이다. 그는 나랏일에 앞장서서 기뻐하고 걱정하며, 발 벗고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헤아릴 것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직언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음서제도 애초에 권력 세습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부모나 친척이 나라에서 큰 은혜를 입었다면 그 자제는 은혜에 보답할 준비가 돼 있다고 여긴 것이 첫째 이유이며, 그러한 집의 자제일수록 어린 시절부터 자연히 맞춤형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후자는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이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그럴 듯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공공의 일을 자기 일처럼 목숨 바쳐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제도는 마치 악인의 손에 쥐어진 칼처럼 잘못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요즈음현대판 음서라는 이름의 인사 청탁과 특권 남용이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음서의 의미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신과 음서 또한 국가나 조직을 위해서 시행돼야 하는 것이지 특권층의자리 차지해먹기용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맹자가 이러한 종류의 세신과 음서를 옹호했을 리는 만무하다.

 

5년마다 수장이 바뀌는 오늘날 국가에서 세신 제도를 사용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기업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 만일 세신의 제도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결코 일반적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 세신이나 음서의 형태로 채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신은 리더를 보필하는 직책을 맡는 소수의 사람으로 한정돼야 한다. 일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능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신의 제도가 잘 활용된다면 먼 미래를 내다보고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세신은오래된 벗과 같다. 주인의식을 투철히 갖춘 이러한 조력자가 있을 때 조직은 더욱더 튼튼해지고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다. 맹자는 이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부정·부패나 권력남용을 옹호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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