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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가뭄·기근 대재앙기 잘 넘긴 조선 ‘리스크 관리형’ 재상 정태화가 있었다

김준태 | 180호 (2015년 7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사, 인문학

재상 정태화는 효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의 리스크 관리와 대응을 주도한 인물이다. 특히 신뢰관리와 운영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 대비책을 수립하고 정책 오판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먼저 상정하고 상황이 개선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 시대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음에도 이를 극복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정책이 본래 그 목적대로 훌륭하게 시행될 수 있도록 돕고, 그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해 준지원자였다. 업무성과를 평가할 때 사업부서에 비해 경영지원부서가 주목을 못 받듯지원자기획자실행자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쉽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든 최고의 리스크 관리자는 바로 이런 지원자 중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깨닫고 1인자는 그 2인자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2인자는 언제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공자에게도 그리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눈에 띄는 큰 업적을 세운 것도,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명재상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 드리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태화는 8회에서 다뤘던 중종대의 정승 정광필의 5대손이다. 1649,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그는 각 도의 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각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무공을 세워 비변사로부터유장(儒將) 4의 한명으로 선정됐으며1 전쟁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며 명청(明淸) 세력 교체기의 외교·안보 업무에 깊이 관여한다.

 

정태화가 중진 관료로 활동하던 즈음 조선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세자빈이 역적의 죄로 사사됐으며,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됐다. 청나라에 대한 항복으로 정통성에 손상을 입은 인조는 끊임없이 신하들을 의심했고, 제 세력들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정태화는 바로 이 기간 동안 대사헌, 형조판서와 같은 민감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공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던덕에시론이 뒤집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지위와 명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벼슬살이를 잘하는 자는 태화가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이해관계를 따지며 이리저리 혐의를 잘 피했고 우유부단해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

 

이후 정태화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이 됐고 효종 2 127일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673(현종14) 심한 중풍으로 완전한 정계은퇴가 허락되기 전까지 그는 20여 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영의정으로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한다. 노년에 병치레가 심해 37번이나 연속으로 사직상소를 올린 적도 있지만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누워서 집무해도 좋다3 며 사직서를 반려했고, 병세가 위중했을 때에만 부득이하게 영중추부사와 같은 명예직으로 잠시 이동시키곤 했다. “영상이 출사(出仕)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4 는 현종의 말은 정태화에 대한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체 그의 어떠한 점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이런 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활동하던 기간은 재난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17세기 전후는 소빙하기로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했다. 전염병에 관한 실록의 기록 빈도를 보면 1651년에서 1750년까지 100년간 모두 208회로 다른 기간의 5배에 이를 정도다.5 특히 현종의 치세 동안은 거의 매년 재난과 기근이 발생했으며 역병과 우역(牛疫)이 창궐했다. 발생횟수 역시 압도적이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대기근이라고 불리는경신대기근(1670년 경술년∼1671년 신해년)’도 바로 현종 11년과 12년에 걸쳐 일어났다. 경신대기근은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휩쓴 온갖 자연재해, 사상 초유의 식량 위기,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대재앙이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돌고, 죽고, 도둑질을 하고, 살상을 하고 변란을 꿈꾸었다.”6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조선 최대의 개혁이라는 대동법이 태동했고, 민생안정을 위한 각종 시스템들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념과 사상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 앞에서 임금을 위시한 민관이 합심함으로써 위기가 역동적인 변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태화는 바로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재상으로서 정태화의 가장 큰 장점은 리스크를 관리한 데에 있다. 그는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처해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데7 이러한 그의 능력은 백성 구휼 업무에서 빛을 발했다.

 

조선은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안민(安民) 대책을 최우선으로 집행했다.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능동적으로 백성을 구휼했으며 상평창, 의창, 활인원, 혜민서의 기관을 설립해 백성들에게 의료(醫療), 곡식, 생필품 등을 제공했다. 조선과 같은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이와 같은 체계적인 구휼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유교적 도덕률 때문이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임금,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폭군으로 불렸던 연산군조차 예외가 아니었다.8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기민(飢民)과 환자부터 먼저 확인하고, 주소지와 상관없이 구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관에서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담당자들의 엄격한 책임의식을 강조한 세종의 지침9 은 조선 구휼정책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데 이러한 정책들은 주로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처하느냐는위기관리능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리스크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노력은 부족했다. 정태화는 이 지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그는 “‘1년을 버틸 저축도 안 돼 있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는 옛말이 있는데 지금은 반 년을 버틸 비축량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용도를 줄이고 절약해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10 라며 예비비를 확보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흉년에 대비해 대동법을 연안지역뿐 아니라 내륙, 산야 지역의 고을에까지 확대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11  “금년의 흉작이 이처럼 심하니 내년에 진구할 방도를 미리 강구해야 한다며 흉년이 든 호남, 호서 지방의 세곡을 그대로 두어 다음 해의 구휼재원으로 삼도록 하고 이로 인한 부족분은 풍년이 든 평안도, 황해도의 여유 곡식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덕분에 이듬해호남, 호서 지역의 백성들은 그 혜택을 받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12

 

또한 현종 2년에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설 기구화해 기근, 질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상시 대비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그는 상황이 개선되고 있더라도 여전히 최악을 가정한다. 천재지변이나 전염병과 같은 문제는불확실성이 심하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놀랄 만한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우의 가상 상황, 특히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기민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는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지는 과잉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다.남도 지방의 농사가 비록 지난해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진휼할 대책을 반드시 미리 강구해둬야 합니다.”13  전라도 기민의 수가 절반 이상 감소됐지만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물자가 부족할 염려가 있습니다. 관의 물자를 계속 지원해줘야 합니다.”14  작년에 세금을 감면해 주면서 그 탕감기간을 금년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로 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곡식이 잘 익을지 미리 헤아릴 방법은 없습니다. 당분간 계속 감면해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15 와 같은 그의 주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태화는신뢰 리스크관리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국가적인 재난 극복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이 중요한데, 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동력이 바로신뢰. 그는 관리들의 월급 삭감을 주장했다. 재원 확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보류하라는 임금의 지시가 있었지만산료(散料, 월급)가 별다른 보탬이 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극심한 흉년을 당해서는 먼저 절약하는 법을 보여야 합니다라 하여 관철시켰다.16 이러한 때일수록 관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서 받는 베를 감면해주면 재원손실이 커지므로 취소하자는 주장에 대해이미 각도로 하여금 어린아이의 수를 파악해 올리라고 하였는데, 이를 없던 일로 하여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감면해주어 조정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준다는 뜻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17 라고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질병과 재해 앞에서 조정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정태화는 비상한 각오로 국가의 모든 역량을 기울여 총력 대응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올해 팔도에 모두 흉황(凶荒)이 생겨 각 고을 창고에 남겨뒀던 곡식마저도 모두 백성들에게 꾸어주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진휼할 자본이 고갈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계책은 나라의 온갖 일들을 정지시키고 비용을 모두 줄여서 오로지 구황 정책에만 집중해야 합니다.18 이에 조정은 군포를 면제하고, 토지세를 감면하며, 농가부채(환곡)를 탕감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나라의 곳간이 바닥 난 상태지만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정 적자는 군비를 감축하고 어공(御供)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충당하고자 했다. 왕실에서 소요되는 비용도 크게 줄였다. 자금 확보를 위해 공식적으로 공명첩이 판매되고, 면천종량(免賤從良)19 도 시행됐다.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청나라에 곡식 지원을 요청하자는 논의도 있었다.20

 

이상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조선은 위기를 이겨내고 국가 재건에 나설 수 있었다. 숙종 때 다시을병 대기근(1695∼1696)’이 닥쳤지만 이 역시 극복해낸다. 이 과정에 허적, 민정중, 민유중 등 정태화가 직접 발탁하고 추천한 관료들이 크게 활약했는데 그가 재난 예측과 재원 마련뿐만 아니라 인재육성을 통해서도 리스크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정태화에게 주목해야 할 점은 또 하나, 예송논쟁 중에 그의 역할이다.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으면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촉발됐다.21 남인인 허목은 3년설을 주장했고, 서인 송시열은 1년설을 주장했는데 전자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한 이상 적통 장자의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왕위를 이었다고 해서 차자(次子)가 장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다툰 것 같지만 여기에는 양 정파의 정치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학자들이 매우 중요시하는 가례(家禮)를 시행함에 있어서 남인은 왕실만의 특수성을 인정한 것이고,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의 일원으로 예외일 수 없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는 리()와 기()에 대한 관점 등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서부터 내려온 두 정파 간 학문, 철학의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예송논쟁은 결국 정치철학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송에는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인식이 투영돼 있기 때문에 양 정파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고 대립도 격화됐다. 게다가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한다. 유교경전인 <의례(儀禮)>장자가 죽으면 다음 적자가 가통의 중임을 이으니, 이 또한 장자라 부른다는 조항을 들어 그렇다면 3년설이 맞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송시열은 4종설22 체이부정(體而不正)’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서인조대왕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昭顯)의 아들이 바로정이불체이고 대행 대왕(효종)체이부정인 셈입니다고 덧붙인다.23 적손이 살아 있는데 적통이 아닌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자칫 효종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발언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정태화는 이 상황을 방치했다가는 큰 파국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결과적으로 효종의존엄을 격하하는 서인의 인식은 아들인 현종으로부터 큰 분노를 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24 가뜩이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조정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남인과 서인의 갈등을 시급히 봉합해야 했다. 이에 정태화는 송시열의 주장을 가로막고예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설을 인용해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 나는 <예경(禮經)>의 깊은 뜻에는 깜깜합니다만 국조 이래로 부모는 아들 상에 모두 1년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국제(國制, 경국대전의 규정)를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25

 

정태화가 서인이 주장하는 1년설을 채택하면서도 그 근거를국제로 정한 것은 실로 절묘한 판단이었다. ‘1년설은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비롯해 그때껏 조선의 사대부들이 숭상하던 명나라의 법전 <대명률(大明律)>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남인은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서인도 비록 전거(典據)는 바뀌었지만 1년설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한다.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문제의 당사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정태화가 대신 양자가 거부할 수 없는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갈등을 봉합한 것이다. 실록은이때 사람들이 다시 사화(士禍)가 일어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首相)으로서 잘 조정했다.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대립하지 않아 조정의 논의가 지나침이 없도록 하고 결렬되지 않게 한 점은 모두가 그의 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6

 

물론 이때 정태화의 조치는 미봉책이었다. 양 정파가 대립하게 된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타협함으로써 갈등의 불씨를 남겨둔 것이다. 바로 이 불씨가 15년 후(현종 15) ‘2차 예송논쟁에서 거세게 타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태화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갈등국면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고, 덕분에 조선 조정은 합심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정태화는 또한 남인의 영수 허적과 적극 협력하고 남인 계열의 인재를 활용하는 등 내부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붕당 간의 갈등이 초래할 수 있는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리스크에 대한 전사적 관리는 당연시되고 있다. “왜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은왜 건강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렸다. 리스크 관리는 기업의 이미지와 가치를 높이고, 수익의 변동성을 줄이며,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임직원들의 직무 안정성과 수입을 증대시켜준다. 반대로 리스크 관리에 실패하는 기업은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리스크 관리는 비단 기업만의 영역이 아니다.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국가에도 매우 절실한 과제다. 특히 불확실성이 강한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에 대처하고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는 미리부터 리스크를 관리하고, 정밀한 프로세스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 실패 사례를 우리는 최근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정태화는 효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의 리스크 관리를 주도한 인물이다. 신뢰 관리와 운영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 대비책을 수립하고 정책의 오판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최악의 가능성을 먼저 상정하고 상황이 보다 개선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 시대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음에도 이를 극복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정태화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가 직접 정책을 기획하고 실천을 담당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책이 본래 그 목적대로 훌륭하게 시행될 수 있도록 돕고, 그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해 준지원자(支援者)’였다. 업무성과를 평가할 때 사업부서에 비해 경영지원부서가 주목을 못 받듯지원자기획자실행자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그 사업은, 그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육이 죽기 직전 대동법을 부탁하는 편지를 정태화에게 써서 보내고, 효종과 현종이 늙어 병든 그를 한사코 붙잡아뒀던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1인자와 구성원들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2인자의 훌륭한 역할 모델이기도 하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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