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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모두 "싸움"외칠 때, 홀로 "화평"주장 재상 최명길, 淸 칼날 세워 국운 지켰다

김준태 | 174호 (2015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사, 인문학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던주화파최명길은 오랜 시간 조선의 선비들로부터매국노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며국가의 안위백성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그는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게 된다. 오늘날 기업에서도 병자호란과 같은, 혹은 그 전후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이때 최명길처럼 혼자서만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기업의 오너와 관련된 일이거나 기업의 핵심가치, 주력사업과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상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기업의 미래와 직원들을 생각한다면, 나서야 한다. 2인자의 길은 그런 것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643년 중국 심양. 조선의 두 재상이 머나 먼 이국땅까지 끌려와 옥에 갇혔다. 평소 상대방을 경멸하던 두 사람은 벽 하나를 두고 나란히 옥사에 앉게 된 그제야 서로에 대한 반감을 푼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만 얻으려 한다는 편견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의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었다.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한편이 되려 한다는 오해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심 어린 선택으로 이해됐다.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풀었소.” 한 재상의 진심 어린 인사에 다른 재상은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주화파를 대표하는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이렇게 화해했다. 길은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방법론상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김상헌이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린 것이니 오로지 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급한 때라도 저울질을 삼가라라는 시를 지어 주자 최명길은상황에 따라 다르게 할지언정 속마음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는가”라고 대답한다.1 지나치게 현실을 신경 쓰다가는 올바름을 잃게 될 수 있으니 원칙대로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당부에 최명길은 자신의 방식에 부끄러움이 없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두고 원로재상 이경여(李敬輿)는 김상헌이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擎天大節)”가 있고, 최명길이시대를 구한 공(濟時功)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상헌과는 달리 최명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도해 더 큰 국난으로부터 조선을 구했지만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는 치욕을 가져다준 주범이 돼 버린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성리학적 명분론을 목숨처럼 여겼던 선비들에게 최명길은 나라를 망친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대의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차마 듣지 못할 말로 성상의 귀를 더럽혔으니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행동이 이미 극에 달했습니다.”2  “참으로 간교하고 참혹합니다. 당당하던 수백 년 종묘사직을 명길의 말 한마디에 망하게 하시겠습니까.”3  “명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물으소서.”4 이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을 정도로 그는 날선 비난을 한 몸에 뒤집어써야 했다. 심지어 같은 서인이 기록한 졸기에서조차청의(淸議)의 버림을 받았다고 돼 있고, 죽은 지 60년이나 지난 숙종 32년에도 영의정이자 그의 손자인 최석정이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다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5

 

최명길이 사대부들의 공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위기로부터 국가를 구했음에도 어째서 나라를 망쳤다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이고, 뻔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그는 왜 이런 길을 걸은 것일까.

 

 

인조반정의 책사, 국난과 마주하다.

1608(선조 35)년 과거에 급제한 최명길은 병조좌랑이던 광해군 6, 사소한 이유로 삭탈관직 당한다. 이후 그는 김류, 이귀, 김자점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했고 그 공로로 정사(靖社) 1등 공신에 녹훈됐다. “기묘하고 은밀한 계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6 는 기록으로 봤을 때 반정세력의 책사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좌랑을 제수받았는데 이조참의를 거쳐 8개월 만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중앙정부부처 과장급 공무원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차관으로 고속 승진한 것이다.

 

최명길은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지만 주로 예조와 이조의 수장, 문형(文衡, 대제학)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인사와 외교 분야를 담당하며 인조 정권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반대파들조차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인조 정권은 초기부터 연이어 전란을 겪었다. 인조 2년에 이괄의 반란이 일어났고 5년에는 후금이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정권을 안착시킬 시간은커녕 이때마다 임금이 몽진을 떠나면서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부모의 나라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광해군의 죄를 바로잡겠다는 반정의 명분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 빛을 잃었다. 문제는 더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정묘호란 때는 조선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그쳤지만 이제는 조선의 완전한 굴복을 바라며 청나라가 움직이고 있었다.

 

인조 14 216, 후금의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주변국들이 후금의 왕 홍타시에게 황제가 되라고 청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형제국인7 조선과 의논해 최종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홍익한은천하에 내세우기를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옹립했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천자라 일컫고 대위에 오르고 싶다면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가 되고 제 나라에 호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그것을 금하기에 우리나라에 물어보고 그 일을 결정하겠단 말입니까라고 지적했다.8 조선이 명나라 황제를 섬기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자신들도 황제국이 되겠다고 하고, 게다가 그것을 조선과 논의해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조선에게 명이냐, 후금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다. 만약 조선이 동참한다면 후금으로서는 문명강국인 조선도 우리를 지지한다는 훌륭한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고, 조선이 반발한다면 차제에 굴복시킴으로써 대명 전면전의 사전 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후금의 요구에 조선의 조정은 들끓었다. 사신을 가두라, 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홍문관의 경우에는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 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하게 보일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비록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라고 단언한다.9 조선이 건국할 때부터 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사대의 관계를 맺어 왔고 임진왜란 때는재조지은(再造之恩)’10 까지 입었기 때문에 결코 명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조선이 오랑캐인 후금에게 굴복해 그들을 상국으로 섬긴다는 것은 당시 사대부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압도적인 여론에 따라 조선 조정은 후금이 보낸 국서를 거부했다. 인조는조선의 국력이 저들보다 약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도 있겠지만 오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며 원한을 품은 저들이 머지않아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니충의로운 선비는 자신이 가진 책략을 내어놓고 용감한 사람은 군대에 자원해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유시를 팔도에 내렸다.11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 등 대간에서 전쟁 준비에 힘쓰자고 상소를 올렸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들뿐이어서 인조는근래 나이 어린 대간들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군사를 뽑는 일을 말하고 군량을 대는 일을 말한다. 별다른 기묘한 계책도 없으면서 이와 같이 번거롭게 굴고 있으니 매우 그르다며 역정을 냈다.12 임금이나 대신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구중궁궐에 아무 말 없이 깊이 앉아 있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고 있으며, 묘당의 신하들도 아무렇지 않게 편안히 있는 것을 지난날과 다름없이하고 있었다.13 전쟁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지만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다며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군수품을 모아 의주 등 평안도 국경지역으로 보내긴 했지만 물량도 매우 적었고 그것도 몇 차례 형식적이었다.

 

 

일을 벌려놓은 사람들이 정작 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니 민심은 자연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수재(水災)가 연이어 발생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우역(牛疫)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는데 평안도의 경우에는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을 정도였다.14 그런데도 인조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제대로 대비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후금의 잘못을 꾸짖는 격문을 보낸 것이다.15 신하들도병사들이 모두 한번 싸워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라며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고 있었다.16

 

이때 인조는 설령 후금이 다시 침입한다 하더라도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한다면 자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고려 왕실도 강화도에서 몽고의 침공을 수십 년간 방어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대사간 윤황은 이러한 인조의 생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전하께서 강화도로 들어가신 후에 오랑캐의 병사가 전국에 가득해 백만 생령들이 모두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면 그때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임금은 한갓 고식적인 방법으로 병화(兵禍)를 피하려고 하시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잊고 부모와 처자식을 버린 채 끓는 물, 타는 불 속으로 뛰어들길 바라십니까? …전하께서 항상 강화도로 들어가 보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므로 군신들의 나태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17 하지만 인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보다 실()을 찾다

이에 최명길이 나섰다. 일찍이 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교섭을 주도했고, 평소 후금에 대한 실리적인 외교를 통해 후금의 재침입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는 당시 중병에 걸려 5개월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최명길은 조정에 나오자마자 그동안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며진실로 화친을 끊겠다면 어찌 어정쩡하게 대응하면서 한마디의 말도, 한 가지의 계책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간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싸우거나 지키기 위한 계책을 세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신의 말을 받아들여 병화를 늦추는 계책도 시행하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오랑캐 기병들이 휘몰아 깊숙이 쳐들어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싸우겠다면서 싸울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인조와 조정의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아울러전하께서 직접 평안도에 진주하시는 것은 경솔하게 논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체찰사(전시 최고지휘관)가 평안도에 막부를 개설하고 주요 지휘관들도 다 그곳에 위치해진격만 있을 뿐 퇴각은 없다는 자세로 맞서야 합니다.… 차사를 보내 오랑캐의 형편을 탐지하고 정세를 살펴 대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손을 묶어두고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단 나을 것입니다.”18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이 최전선에 나아가 결사항전의 자세를 보여주고,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면밀히 대응한다면 가만히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은 오히려 최명길에게 비난의 상소를 쏟아냈다. 적정(敵情)을 살피자는 그의 주장에정탐한다는 명분을 빌려 차사를 오랑캐에게 보내고 국서를 부치려고 하니, 대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19 라며, 이는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며 백성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이고, 심지어 교전 중에도 사신을 주고받으며 적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후금이 국명을이라고 바꾼 것은 받아들여 주면서 타협점을 구하자는 최명길의 주장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조선 조정이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청나라가 이미 조선을 침공할 준비를 마쳤다는 첩보가 명나라를 통해 입수됐다. 막상 전쟁이 현실로 닥쳐오자 조선은 당황한다. 인조는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한탄했고, 안보 업무를 총괄하는 비변사는 그제야사신을 보내 그들의 정황을 탐색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친교를 끊은 적이 없다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라고 주청한다.20 청을 배척하며 전쟁 불사를 외치다가 청이 응징하겠다고 나서니 부랴부랴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최명길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제 화친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주화(主和)라는 두 글자가 평생 신의 허물로 따라다니겠지만 지금 화친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21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그 시대에,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의리를 저버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일이었지만 나라의 안위를 위해 주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은신하가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의 뜻대로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렀다면,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그 죄는 면할 수 없습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척화가 아무리 옳은 명분, 의리라 해도 나라의 존망, 백성의 평안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최명길은 평소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명분은 의미가 없다고 봤다. 그는대저 명(, 명분)은 실(, 현실)의 그림자니, 명을 가지고 실을 책망한다면 잃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명을 숭상하지만 제가 숭상하는 것은 실입니다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22  “일이란 본래 명분이 아름다워 보여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라며일을 수행하는 방도에는 정상적인 것(正道)과 임기응변적인 것(權道)이 있으며, 일에는 급히 처리해야 하는 것과 늦게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일과 때에 따라 의리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인(聖人, 공자)께서 <주역>을 지을 때 중도(中道)를 정도(正道)보다 귀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실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보편적 올바름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춰갈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알맞은 올바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화(主和)라는

두 글자가 평생 신의 허물로

따라다니겠지만

지금 화친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굴욕 이후

최명길이화친을 주장함으로써 따르는 재앙은 모두 제 자신에게 돌리고 이익은 나라에 돌아가게 하겠다며 청나라에게 고개를 숙여 몇 년이라도 전란을 늦출 시간을 벌고, 그 기간 동안 부국강병에 힘써서 오랑캐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자고 간곡히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윤집, 오달제 등 젊은 대간들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최명길을 처단하라고 벌떼와 같이 일어섰다. 그리고 때는 이미 늦어 1213, 청군이 쳐들어와 벌써 안주에 이르렀다는 급보가 조정에 전달됐다.

 

순식간에 수도 한양이 위협받고 강화도로 가는 길마저 끊기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몽진했고, 최명길은 교섭을 통해 적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겠다며 자원해 적진으로 떠났다. 척화를 외쳤던 신하들의 대다수가 침묵하며 피신하기 여념이 없을 때, 나라를 망칠 죄인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최명길만이 홀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최명길은 청의 군진을 오가며 적극적으로 화의를 교섭했다. 백성들에게 닥칠 고통과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이때에도 척화파들은 아무런 대안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저 죽기로 싸워야 한다고만 말한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킨다면 설령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그 정신이 길이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보다 더 소중한 조선의 백성들에 대한 의리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김상헌 등 몇몇 강직한 대신들을 제외하면 그동안의 과오를 전혀 반성하지도 않고 백성들이 겪을 고난도 염려하지 않는다. 척화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그저 말로만 신념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사신을 보내자고 청하여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불러들였고”, “전투와 수비에 관한 계책을 언제나 최명길이 막았다고 억지를 부리며 전란의 책임을 최명길에게 뒤집어씌웠다.

 

청은 이미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데다 황제가 직접 참전하면서 조선이 이길 가망은 원래 희박했지만 조선 조정이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보니 더 이상 희망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1637 130, 인조가 남한산성에 나와 항복하고 청 태조에게 칭신하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전쟁은 종결된다.23 당시 조선 선비들의 표현을 쓰자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있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24

 

전쟁이 끝난 후 최명길은 재상으로서 전후 복구사업에 매진했다.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청나라와의 외교문제를 총괄한다. 그는 각종 후속조치들이 매끄럽게 처리될 수 있도록 조정했고, 명나라를 공격할 병력을 징발하라는 등 청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때는 직접 청나라로 건너가 이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임경업을 통해 비밀리에 명나라 정부와의 연계도 추진했다. 청나라의 기세가 막강하긴 했지만 한족의 정통 왕조인 명이 그리 쉽게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명나라가 제대로 항전한다면남송-과 같이 명과 청이 중원을 양분하는 선에서 전선이 고착되라는 게 최명길의 판단이었다. 그리되면 고려가 금나라에 대한 조공과 남송에 대한 외교전을 동시에 펼치며 입지를 확보했듯이 조선도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명은 내부 분열과 농민 반란 등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자결로 내몬 것은 청이 아니라 농민반란군 지도자 이자성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명나라의 병부상서 홍승주가 청에 항복하면서 명과 조선의 비밀교섭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 일로 영의정이었던 최명길이 책임을 지고 심양으로 압송됐고, 서두에서 소개한 일화대로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청나라에 반대했다는 죄로, 주화파의 대표 최명길은 명나라와 밀통했다는 죄로 심양의 차가운 옥에 갇혀 조우한다. 이후 1645 223일 최명길은 심양에서 풀려나 돌아왔지만 이미 쇠약해진 건강 때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2년 후인 1647 517일 눈을 감았다.

 

‘매국노’에서구국의 상징으로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25 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공론을 어기고 의리를 저버려 나라를 망쳤다는 비난을 들은 최명길.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상국으로서 청나라의 존재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고, 반드시 복수하고 치욕을 되갚겠다는 명분론이 완화된 영정조대에야 바로 잡아진다. 정조가 병자년에 올린 최명길의 상소를 거론하며상신(相臣)이 아니었으면 누가 감히 청의(淸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평가하자 신하들도그때 이 사람이 없었다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답하는 것이다.26

 

재상으로서 최명길이 보여준 중요한 역할은 바로 이 정조의 말 속에 담겨 있다. 대명의리를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척화의 주장은청의’ ‘고상하고 공정한 의논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당시에는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졌다. 이를 거스르고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반대진영에 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고 윤리를 무너뜨리는간악한인간으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았다. 두고두고 정의를 무너뜨린 역사의 죄인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주저하지 않고 그런 선택을 했다.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최명길의 노선은 친명이지 결코 친청이 아니었다. 그 또한 척화노선에 동의하며 철저한 전쟁준비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닥쳐오자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주화에 앞장 선 것이다. “제 마음에서 허물을 찾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비방이든, 칭찬이든 그 어떤 것이 찾아온들 단지 외적으로 부수적인 것일 따름입니다.”27 그가 주변의 비난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에 조선이 겪은 전쟁의 참화는 훨씬 감소될 수 있었다.

 

정조가 병자년에 올린

최명길의 상소를 거론하며

“상신(相臣)이 아니었으면

누가 감히 청의(淸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평가하자

신하들도그때 이 사람이 없었다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을 보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오늘날의 2인자에게 주는 교훈

세상이 변화하지 않고 늘 안정돼 있다면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이 늘 같아도 상관없다. 명분에 입각해 실천하고 고정된 매뉴얼에 따라 행동한다고 해도 잘못될 염려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마주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과거의 관행, 명분, 원칙에만 집착하다 보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되면 일이 실패하는 것을 넘어 그 일을 한 사람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는 오늘날 기업들에게 매우 절실한 문제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고객도 늘 변화한다. 정치적 고려로 인해 정부 정책이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 작년에 이어 같은 사업을 추진하고, 계속 같은 업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올해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기 어렵다.

 

사람이 당황하고 허둥대는 것은 갑작스레 일이 닥쳐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 자체가 낯설고 기존 프로세스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다. 창의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역량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조직의 중심을 잡아준다는 측면에서 명분과 의리는 분명 소중한 것이지만 거기에 함몰되면 그 조직은 생명력을 잃을 수도 있다. 위기가 닥쳐도 그 어떤 위기대응책도 내놓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명길의 생각이 오늘날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지점이다.

 

오늘날 기업에서도 인조시대 병자호란과 같은, 혹은 그 전후의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이때 최명길처럼 혼자서만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기업의 오너와 관련된 일이거나 기업의 핵심가치, 주력사업과 관련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자신의 자리를 걸어야 하고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비상한 용기가 요구된다. 하지만 오너가 추진하는 일이고 대다수 임원들이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다. 과거의 성공경험만 내세우며 변화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변수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허점이 있을 수도 있다. 높은 수익성이 기대되는 사업이라고 해서 그것이 갖는 위험요인은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2인자라면 이러한 문제점을 읽어내고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로 인해 좋은 사업기회를 잃었다’ ‘기업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인물이다는 평가를 들을지라도 위기를 경고하고, 위기에 대비하며, 조직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것이 2인자의 중요한 사명임을 최명길은 보여주고 있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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