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임금 망명불가+의병 인센티브+일선장수 지지.. 戰時수상 유성룡, 21세기 CEO를 가르친다

김준태 | 168호 (2015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HR,인문학

유성룡은 1593 11,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영의정에 임명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1598년까지 5년간전시내각의 수상으로서 조정을 이끌었다. 그는 피난길에 오른 선조에게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버리고 이 땅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심이반을 막으려 했고, 백성 개개인이 국토 방위에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는인센티브제도를 고안했다. 전쟁을 위한기본원칙을 다시 가다듬었고, 국가개조와 내부개혁에 힘쓰면서 동시에 전장의 장수들이 전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전쟁이라는 단어를위기글로벌 경쟁으로 바꾸고, ‘백성임직원으로 바꾸고, ‘전장의 장수현장의 임직원으로 바꿔보라. 한 조직이나 기업의 2인자로서 위기 시에 무엇을 해야 할지 한눈에 보일 것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598(선조 31) 111. 이날의 <선조수정실록>1 은 두 가지 사건을 전하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전사와 풍원 부원군 유성룡(柳成龍)에 대한 탄핵이다.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식된 바로 그날, 전쟁기간 조선의 두 버팀목이었던 이순신과 유성룡이 함께 비운의 퇴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시간을 되돌린 1592 414. 조선에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국난이 시작된다. 삼포왜란과 을묘왜란 등 왜가 일으킨 변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만에 가까운 정규군의 침입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군을 맞은 조선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부산진 첨사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분전했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성들은 오래지 않아 함락 당했다. 이때 최전선이었던 경상도의 지휘부는 매우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경상병사 이각은 함께 싸우자는 송상현의 요청을 거절하고 도망갔고 경상좌수사 박홍도 주둔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스스로 전선을 침몰시키고 병사들을 해산했으며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백성들을 대피시키라는 공문만 발송했을 뿐이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2년 전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 유성룡 등의 건의로 성곽을 보수하고 해안지역의 장수들을 보충했지만 겉치레에 그쳤을 뿐 사실상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조정은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일과신립을 차례로 파견한다. 하지만 병사 부족, 전략의 실패 등으로 인해 괴멸 당했다.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선조와 조정은 공석이었던 세자부터 책봉했다.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여 만에 수도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51. 선조는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하며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전시내각의 총책임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대간의 탄핵으로 인해 유성룡은 곧바로 파직 당한다. 임금이 수도를 떠나 몽진(蒙塵)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고, 몽진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와 함께 좌의정이었던 그가 정치적인 책임을 진 것이다. 유성룡은 민간인의 신분이 됐지만 선조는 그에게 어가의 호종을 명령하고 계속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1일에는 유성룡을 부원군(府院君)에 봉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영의정에서 해임하긴 했지만 전시 조정을 운영하는 임무를 계속 맡기기 위해 재상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후 유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고 명나라 군대의 군수보급을 책임졌다. 위압적이고 포악한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차질 없이 보급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노련함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실록>유성룡이 군량과 마초를 마련했기 때문에 공급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유성룡은 1593 111일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98년까지 5년간 수상으로서 조정을 이끌었다. 그는 각 도의 전장을 누볐으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파는 달랐지만 좌의정 윤두수와 긴밀히 협력했고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주목할 만한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이 땅을 지켜야 한다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며 어느 곳으로 피신해야 할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좌의정 윤두수는북도(北道)는 병사와 군마가 정예하고 강하며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에는 모두 천연의 요새가 있어 그 험고함이 충분히 의지할 만합니다라며 함경도로 갈 것을 주장했고 이항복은우선 어가가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다가 형세가 궁하고 힘이 부쳐 팔로(八路)가 모두 함락돼 안전한 땅이 조금도 없어지게 되면 천조(天朝, 명나라)로 건너가 호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의주행을 거론했다. 선조는 내부(內附)3 하겠다는 의사를 대놓고 밝히며 이항복을 지지한다. 여차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국경도시인 의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유성룡은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땅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도 조선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백성과 국토가 없는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므로 끝까지 이 땅에서 항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항복이곧바로 이 땅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히도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게 돼 몸을 의지할 곳이 없고 발을 둘 곳이 없어지면 잠시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지만 그러한 말 자체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성룡의 생각이었다. 한양 북쪽 지역이 아직 건재하고 왜구의 침입을 겪지 않은 호남에서 군사들이 봉기해 북상할 텐데4 아무리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도 임금이 나라를 떠날 수도 있다고 미리 가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 되면 민심은 요동치고 병사들은 전투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백성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항복은 이 일을 두고그때만 해도 나는 분명히 깨닫지 못했었다. 훗날 (선조가 의주로 가자 임금이 나라를 버릴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크게 퍼져 평안도 지역의 인심을 수습하게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공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5  고 회고한다.

 

전쟁 중 최고지휘부의 안전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왕이 곧 주권을 의미하던 전통사회에서 왕이 적의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할 경우 국가 전체가 혼돈에 빠지게 되고 전쟁 수행 능력도 급격히 상실할 위험이 있다.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이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히면서 급격히 쇠락한 송나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고 국가의 최고리더인 왕이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의 구심점으로서 안정적인 후방지원과 지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하는 것과 생존을 위해 도망 다니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선조는 왜군이 육박해오자 어떻게 하면 왜군을 방어하고 백성을 지킬 것인지가 아니라 어디로 피신할 것인지부터 의논했다. 경기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부터 하고 있는 선조의 비겁함 앞에서 유성룡은 닥쳐올 민심의 동요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역량을 결집한다

대부분의 전면전은 국가의 존망까지 좌우한다. 패배할 경우 피해가 얼마나 심하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예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가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남김없이 동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국가가 가진 역량을 모두 결집해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충성심을 고양해야 한다.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전쟁에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사회의 일반 백성들의 경우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누가 이기고 지냐는 절실한 문제가 아니다. 생존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누가 왕이 되고 어떤 나라가 들어서냐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국가의 바운더리 안에 묶어 두고, 이들이 가진 힘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이익이다.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내게도 이익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하는 것이다.

 

유성룡은 이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나라의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희망은 인심입니다. 만약 인심이 와해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라며 전공(戰功)에 따른 포상을 확대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전공을 세울 경우 천민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는 면천(免賤), 부역을 면제하는 면역(免役)을 도입하고, 관직을 줘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공명첩도 공식화했다. “백성들도 왜적을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투어 일어나 왜적을 쏠 것이라며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당사자의 개인 소유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6

 

이 밖에도 유성룡은 나라가 가진 인재풀을 모두 동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국가가 전에 없는 변을 당했으므로 평소대로 해서는 안 된다 1) 작은 재주라도 취하고, 2) 천한 사람도 버리지 말며, 3)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취하는 것을 인재등용의 세 가지 원칙으로 제시했다. 지금은 한 사람의 인재도 아쉬운 상황이므로 설령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 사람의 장점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방면해 왜적 방어에 참여하게 하고, 옥사(獄事)로 인해 누명을 쓴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한 것도 그의 주청에 따른 것이었다.

 

전수기의(戰守機宜) 10(十條)

1594, 유성룡은 그동안의 경험과 시행착오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유념해야 할 10가지 사항, ‘전수기의를 정리해 선조에게 올렸다. 여기서 그는 1) ‘척후(斥候)’를 가장 먼저 제시하는데척후란 군대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정탐경계작전에 해당한다. 미리 척후를 보내 적의 움직임을 상세히 살피고 그에 따른 맞춤형 전술을 입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 ‘장단(長短)’을 언급했다. “자기를 알고 남을 알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고,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을 알지 못하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진다 <손자병법>의 격언처럼 적군과 아군의 장단점을 견주어 헤아림으로써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유성룡은 3) ‘속오(束伍)’, 병력을 효율적으로 나누고 배치해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확립할 것을 강조하고, 각 지휘관은 4) ‘약속(約束)’, 전략전술을 수행함에 있어 맡은 바 약속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 ‘겹참호[重壕]’, 6) ‘설책(設柵)’등 주둔지의 방어대책을 설명한다. 지형을 이용하고, 아군의 무기와 적군의 무기의 특징을 고려하며, 전술방식을 감안해 방어진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유성룡은 특히 7) ‘수탄(守灘)’, 적군에 비해 아군의 군사력이 현저히 열세일 경우, 높은 산이나 큰 강물같이 주변의 험난한 지형을 활용해 방어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군은 전진하기 어렵고 아군은 수비하기 쉬운 최적의 곳을 찾으라는 것이다. 변화된 전투 환경에 맞춰서 성의 구축과 운용방식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 내용은 8) ‘수성(守城)’부분에 자세히 언급돼 있다.

 

 

유성룡은 전투기술도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9) ‘질사(迭射)’에서 조선군의 주력무기는 궁시(弓矢, 활과 화살)인데활을 쏘고 나면 계속 싸울 방법이 없어서 적이 짧은 병기를 가지고 돌진해 백병전을 벌이면 활과 화살을 버리고 도망갈 뿐이다고 한탄했다. 하지만짧은 병기는 창졸 간에 연습할 수도 없고, 가령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왜적과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궁시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질사법을 제안한다. 단점을 보완한다고 섣불리 새 기술을 도입할 것이 아니라 장점을 극대화함으로써 단점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군은 일시에 활을 쏘곤 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화살을 장착하는 사이 적이 돌진해 온다. 따라서 사수들을 열로 나누어 한 열이 쏘고 나면 다음 열이 쏘고, 다시 그 다음 열이 쏘는 식으로 해서(그 사이 처음 쏜 열이 다시 활을 쏠 준비를 완료한다) 적에게 틈을 주지 말자는 것이다.

 

끝으로 유성룡은 10) ‘통론형세(統論形勢)’를 통해 장기 지구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군이 조선 땅에 진주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따라서 장기전을 펼쳐 왜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유성룡은 청야전술을 통해 왜군이 이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식량을 사전에 차단하고 식량보급로를 요격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7

 

요컨대 유성룡의 주장은 전투의 기본원칙을 지키고, 적의 형세를 살펴 미리 대비하며, 변화된 전투 환경에 맞춰 능동적으로 대응하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사실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새로운 아이디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유성룡이 판단했을 때 당시 조선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놀랍고 신묘한 책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기본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고 적용하느냐에 있다며 전쟁의 기본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했다.

 

국가개조와 내부개혁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면서 명나라와 왜 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전선은 곳곳에서 교착상태를 보였다. 조선 조정은 그전 해인 1593 9월 이미 한양으로 환도해 있었는데 나라를 다시 추스르기 위한 노력은커녕 신하들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명군에 대한 보급과 전선 시찰 등의 업무로 인해 주로 지방에 나가 있던 유성룡은왜적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됐을 때에 긴급히 자강책을 급히 세워 곡식을 저장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는 등 매일매일 겨를 없이 계획을 세우고 조치했어야 했다그랬다면 이미 1년이 지난 지금쯤에는 조금이라도 두서가 잡혀 이를 바탕으로 더욱 분발해서 중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인데 전혀 그러지 못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속히 모두가 각성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지금이야말로 국가를 개조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적기라는 것이다.

 

무릇 평화로운 시대에 사람들은 무사안일을 즐기고 선비들도 천박한 식견에 빠지기 쉽습니다. 편협한 의논이 명분과 실리를 어지럽히고 근본을 파괴해 비록 선견지명이 있더라도 신용을 얻지 못하고, 시대를 구제할 계책이 있더라도 채택되지 못합니다. 그러다 결국 패멸당하고 난 뒤에야 지난 일의 실수를 징계하고 앞날을 위한 계책을 잘 도모해 천명(天命)을 다시 잇고 국맥(國脈)이 다시금 견고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래도록 지속된 나라의 경우에도 혹 중간에 쇠퇴하는 지점이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며 다시 떨쳐 일어나 백 년, 천 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근심이 깊고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야말로 나라를 일으키고 성명(聖明)을 계발하는 밑받침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8

 

유성룡은 위기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해결해 낼 수 있다면 위기는 국가의 재도약을 위한 기회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하들의 무사 안일한 풍조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훈련도감을 설치해 정병을 육성하고 둔전을 실시하며 진관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백성들에 대한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 율곡의 개혁안을 발전시켜 공물 진상을 쌀로 대체 납부하도록 하자고도 제안한다. 이것이 대동법(大同法)의 시초다.

 

그는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놀랍고 신묘한 책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기본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고 적용하느냐에 있다며전쟁의 기본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유성룡은 조선의 내부 역량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과 같아서 좋은 약(명나라)을 쓰더라도 내 몸을(조선)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9 약을 복용하는 것 외에도 원기를 강하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우리나라는 일을 꾸준히 지속하지 못해 짧으면 한두 달이요, 길어야 1년 남짓하면 중도에 노력을 그만두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며군신상하가 합심해 장기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성룡의 개혁 작업은 훈련도감 운용, 군정(軍政) 개혁 등 일부의 성과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도에 폐기되거나 시행조차 하지 못하고 좌초됐다. 개혁의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시행할 의지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다.

 

 

장수들이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일 중 하나가 일선 지휘관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전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지원은 비단 군수물자 보급이나 인력충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방의 정치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권력자가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을 의심한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군대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승리하며 백성들로부터 받는 인망을 시기한 경우도 많다. 적과 맞서 싸우던 와중에 남송의 고종에 의해 소환당한악비(岳飛)나 진나라 호해의 의심을 받은 장한(章邯)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중앙의 통솔권을 과시하고자 일선 전장에까지 세세히 간섭하고 지시하는 경우도 잦다. 현장의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개입하다가 대패배하는 일은 우리에게 낯설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에도 이 문제가 심각했다. 의심이 많은데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조는 전장의 지휘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조금만 이상 징후를 보여도 군주를 기망한다며 질책하고 직위를 교체하곤 했다. 유성룡은 이러한 선조의 의심을 해소하며 각 전선 장수들의 지휘 재량권을 보호해주고자 최선을 다했다. 선조의 뜻에 공감을 표해주면서도그럴 사정이 있을 것이다’ ‘현지를 모르면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변호했다.

 

하지만 유성룡도 모든 일에 완벽히 대응하지는 못했다. 그는 추국(推鞫)의 책임자로서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 김덕령은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하고 있다는 무고로 체포됐는데 선조가 김덕령을 직접 심문하고 그를 아깝게 여겨이 사람을 살려줄 방법은 없겠는가하고 묻자 유성룡은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일단은 그대로 가둬 두고 그의 일당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10 물론 선조의 성격상 자신의 체면을 위한 의례적인 질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고라는 정황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유성룡은 사형을 기정사실화한다. 다른 날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처벌을 뒤로 미루자고 말한 대목을 두고 어떻게든 김덕령을 살리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절차상의 하자 없이 엄밀하게 조사하자는 것일 뿐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생각된다.

 

김덕령의 죽음을 두고 <실록>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니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했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해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1 백성들의 신망을 받던 장수를 보호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유성룡 자신이 그토록 우려했던 민심의 이반을 초래한 것이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이순신이 투옥되자 유성룡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순신을 추천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유성룡 자신이 나서서 이순신을 변호할 경우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선조가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 1) 조정을 기망한 죄 2) 임금을 능멸한 죄 3) 나라를 저버린 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엄중한 죄였다. 이를 비호할 경우에도 역모에 준하는 수준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유성룡은 이때 경기도 순찰사로나가 있었음에도 10여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리며 이순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불신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유성룡은 선조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았다. 원균을 옹호하는 발언도 한다. 만약 유성룡이 이순신과 선조, 조정 사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매개하며 중재했다면 이순신이 겪은 고난은 보다 약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유성룡은 전시내각의 수상으로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종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그는 정치적인 위기를 겪는다. 명나라 병부의 정응태가 명군의 총책임자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양호를 탄핵한 것이다. 양호가 울산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것에 대해 황제에게 허위보고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격노한 황제는 1598 7월 양호를 파면하고 본국으로 소환했는데 선조가 섣부르게 양호를 변호하겠다고 나섰다가 정응태의 미움을 샀다. 이에 정응태는조선이 양호와 결탁해 황제를 속였고’ ‘왜와 공모해 요동을 침범하고자 한다고 고발한다. 후자는 말도 안 되는 무고라고 치부하더라도 전자에 대해서는 분명 조선에서 소지를 제공한 것이고 이것만으로도 황제로부터 크게 문책당할 수 있었다.

 

당황한 선조는 대명외교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 온 영의정 유성룡을 진주사로 보내 양호를 변호하고 사건을 무마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성룡은팔순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임금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큰 불충이다. 그럼에도 유성룡이 진주사 파견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가 조선을 핍박한 양호를 변호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유성룡을 너무 좁게 본 것이다. 양호를 옹호할 경우 자칫 조선에 더 큰 화가 닥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유성룡의 평소 태도상양호를 옹호한다는 입장 자체를 포기하도록 필사적으로 간언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추론이지만 유성룡 스스로 정치적 위기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고사처럼 효용가치가 끝난 신하는 언제든 제거될 수 있다. 유성룡 자신의 임무는 전쟁을 치러내는 것으로 이제 끝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울러 전쟁이 끝나게 되면 전쟁과정에서 일어난 잘잘못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다. 그 책임을 임금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2인자였던 자신이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먼저 잘못을 만듦으로서 탄핵을 유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갖은 고난을 겪으며 전시내각을 이끈 재상을 처벌해야 하는 임금의 부담도 덜어준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유성룡의 전시내각 리더십, 2인자 리더십이 기업에 주는 시사점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만큼은 일일이 이를 언급하면서 교훈과 시사점을 도출하지 않으려 한다.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 전쟁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기업의 임직원이라면 진짜국운이 휘청거렸던전쟁 상황에서 유성룡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이미 가슴속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몇 가지만 정리해본다. 유성룡으로부터 우리는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의 2인자가 가져야 할 자세와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안위보다 조직의 생존을 중시한 헌신이다. 유성룡은 심한 병을 앓아 몸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전장을 누볐다. 구성원들의 역량을 결집하고 구성원들이 마음껏 각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했으며, 내부 개혁과 혁신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조직의 각성을 촉구했다. 변화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들도 제시했다. 특히 전쟁의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일인자와 조직의 부담을 덜어준 것은 그가 2인자로서 행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