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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죽음 무릅쓰고 극간한 정광필 임금의 반대편에 서지 않되 ‘폭주’ 막았다

김준태 | 164호 (2014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임금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정책적인 측면에서 임금의 의견을 보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임금의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임금의 결정을 비판하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였던 중종 시기 재상 정광필은 자신의 안위나 1인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해극렬한 간쟁을 했다. 직언을 넘어선 목숨을 건극간 1인자의 오판과 실수를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지만폭주를 막았고 후대에 큰 교훈을 남겼다. 별다른 견제장치가 없는 CEO, 특히 오너 경영자들은 자신의 독단을 견제할극간하는 2인자를 곁에 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든 2인자는 기업 자체와 구성원 모두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2인자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극간1 한다(當以死極諫).”

 

“의로움을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從義而不從君).”

 

구성원들을 지키고 공동체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설령 임금의 뜻을 거역하고 노여움을 사는 일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 직언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보이는 이 구절들은 신하된 자가 지켜야 할 도리이자 의무로 여겨졌다. ‘극간의 상징적인 인물인 당 태종 때의 명재상위징(魏徵)’도 자주 언급됐는데 이극간을 특히 재상의 주요한 책무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더라도 자신이 틀렸다고 얘기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데 이를 흔쾌히 수용하는 권력자는 드물다. 더욱이 면전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강력히 비판한다면 불쾌한 감정은 분노로까지 전이된다. ‘역린(逆鱗)’을 건드린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군주의 말 한마디에 개인뿐 아니라 가문의 안위까지 좌우되던 그 시대에극간은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극간을 했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난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간언을 하는 것이 신하의 의무라면 이를 경청하는 것은 임금의 의무였기에 임금에게는귀에 거슬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더라도 반드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참고 즐거이 받아들여 칭찬으로 장려함으로써 직언하는 분위기를 북돋아주는2 자세가 요구됐다. 극간하는 신하를 함부로 억누르거나 처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임금들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경지였고 간언을 하다가 임금의 눈 밖에 나서 알게 모르게 승진이 막히고 한직으로 밀려나며, 심하면 귀양을 가거나 모진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임금에게극간한 신하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의()로움을 지키겠다는 신념, 공동체와 구성원의 장래를 걱정한 충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회의 주인공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처럼 말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 정광필

 

 

정광필은 1492(성종23)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 교리, 직제학, 이조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연산군 때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언하다가 귀양을 갔는데 유배지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이는 종묘사직의 장래를 위한 큰 계책이로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육류를 물리치며전 임금의 생사를 모르는데 고기를 입에 댈 수는 없다. 아래에서 그를 바르게 인도해주는 자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슬프다하였다고 한다.3

 

이후 그는 이조참판,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도순찰사가 돼 삼포왜란(三浦倭亂)4 을 진압하는 등 무공도 세웠다. 이례적으로 종1품인데도 함경도 관찰사(2품직)를 겸임하며 북쪽 국경을 책임졌으며장략(將略)5 이 있다또는지금 육경 중에 병사를 아는 것은 오직 신용개와 정광필뿐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군사 업무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정광필은 영의정이 돼서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국방을 관장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재상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국경 방어를 맡고 군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안보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중추로서 재상감이라고 생각된 사람이 향후 이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미리 현장 경험을 닦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예비 CEO들을 기획, 인사, 재무 등 경영지원 업무뿐 아니라 야전인 영업 분야에도 순환근무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정광필은 중종 8, 우의정이 됐고 11년에는 영의정으로 보임됐다.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성희안(成希顔)으로부터정광필은 소리 없을 때에 듣고 형체가 나타나기 전에 본다. 신용개(申用漑)6 같은 사람 백 명으로 정광필 한 사람과 바꿀 수 없다는 강력한 추천을 받아 재상이 됐다고 한다. 재상으로서 그는 지나치게 남발됐던 공신(功臣)의 수를 줄이기 위해 힘썼고 중전의 자리를 노리던 후궁 경빈 박씨의 야욕을 강력한 반대로 좌절시켰다.7

 

한 번은 중종이 자신의 지시에 조정이 일사불란하게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조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며 책망하는 교지를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정광필은 “(임금의 말에) 일체를 다 동의하는 것이 어찌 국가를 위하여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마음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그릇되게 동의하는 것을 옳지 못하게 여깁니다라며 이를 비판했다.8

 

그에게는 재밌는 일화도 하나 전해진다. 그는 식사를 할 때마다 자신이 먹고 남은 것을 손자인 정유길(鄭惟吉)과 증손자인 정지연(鄭芝衍)에게만 주고 다른 자손들에게는 일절 주지 않았다.9 그러다 일가 족손(族孫) 이헌국이 어린 나이에 놀러와 문안을 드리자 정광필은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남은 음식을 그에게 주게 했다. 이를 본 집안 여종들이 웃으며저분도 정승이 될 관상인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훗날 정유길은 좌의정, 정지연은 우의정, 이헌국은 좌의정에 오른다.10

 

이러한 정광필에게서 눈에 확 뜨일 만한 공로나 새로운 업적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젊은 사림들의 논의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며 자주 제동을 걸었고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의 강력한 반대자이기도 했다. 안정을 우선시한 보수적인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래서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려야 할 문제들을 회피하고 급진적인 논의를 억제하려고만 든다11 는 비판을 받았으며, 어떤 신하는 중종에게전하께서 비록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에 힘쓰고 계십니다만 비루한 자가 감히 수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며 좋은 정치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라고 정광필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우의정 신용개가 가만둘 수 없다며 분개하자, 그는나에게 해() 될 것이 없는 말입니다. 젊은 사람이 바른 말을 하는 기개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라며 만류했다고 한다.12 이처럼 그는 넓은 도량을 보여줬는데기량이 원대하여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할 줄 안다13 는 평가는 피아를 막론하고 정광필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었다.

 

만약에 세월이 이대로 흘렀다면 그는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지만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무난한 재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1519년 기묘년, 조선에서는 정광필의 진면모를 보여준 불행한 정치파동이 일어난다.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묘사화의 한복판에서원칙을 지키다

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은 정통성과 왕권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했다.14 자신도 언제든지 폐위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신하들에 대한 의심도 많았다. 재위 초기에 중종은 소위반정공신 3대장’,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기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 3대장이 죽자 비로소 권력 강화를 시도하는데 이때 중종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조광조였다. 조광조 등 젊은 사류들의 힘을 빌려 지치주의(至治主義)15 를 내세우고 왕도(王道)를 위한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 아래 왕권을 확립하고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용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광조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며 더욱이 조광조가 추진하는 개혁의 칼날이 기득권 세력뿐 아니라 왕권에도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중종은 전격적으로 조광조를 제거할 결심을 한다.

 

이에 1519 1115, 한밤중에 중종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몇몇 대신들을 소집해 대사헌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등을 잡아 가두라고 명령했다.16 조정의 중신들이 하룻밤 사이에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중간에서 지체하여 어린아이 장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죽이라는 교지를 전하라고 지시한다. 조광조 등이 무슨 죄가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처형을 집행하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입궐한 영의정 정광필이눈물이 두 볼에 흘러 옷소매가 다 젖으면서 간언하기를아직 어린 유생들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과격하게 그저 옛날의 좋은 것을 오늘날에 다시 시행하려고 한 것일 뿐,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라며 만류하니 난감해진 중종은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정광필이 쫓아가 중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간곡히 간함으로써 처형은 보류됐고, 날이 밝으면서 논의는 의정부와 육조 당상관들이 모두 참여한 자리로 넘어갔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조광조의 숙청을 주도한 남곤은 사건이 일어난 당일, 미리 정광필의 집을 방문해 그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남곤은 초립에 베옷,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정광필의 집을 찾았는데 평민과 같은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 모략을 꾸미고자 했던 것이다. 문지기가집 앞에 손님이 왔는데 남 판서입니다. 의관이 매우 부실해 천한 사람과 같은 행색을 하고 왔습니다라고 알리니 정광필은 괴이하게 여기며 남곤을 만나공은 어찌 이런 꼴을 하고 왔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곤은 “(조광조와 같은) 이런 무리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장차 그 화가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곧 공을 불러서 의논하실 것이니 공께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반드시 전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무리를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사직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니 공께서는 깊이 생각하셔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며 은근한 말로 정광필을 협박했다. 중종과 남곤 등이 조광조의 숙청을 사전에 비밀리에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정광필은 정색하며공은 재상인데 천한 복색으로 저잣거리를 지나왔으니 이것만으로도 크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사림을 모해하는 것은 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차마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라며 단호히 거절하니 남곤은 크게 화를 내며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때 정광필은 중풍을 앓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병들도 겹쳐 있어 무척 쇠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남곤의 비밀스러운 방문을 떠올리며 자칫 큰 참화가 발생하리라는 걱정에 급히 입궐한 것이다. 만약 정광필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조광조 등은 그 자리에서 주륙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튿날, 대신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서 정광필은 절차를 문제 삼았다. 공식 문서인죄안(罪案)’도 없이 사사롭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며 죄안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곤이 쓴 죄안의 문구를 지적하며이 사람들이 과격한 면은 있었지만 임금을 속이고 자신들의 욕심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라며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중종이 조광조 일파의 죄는붕당을 형성하여 권력과 요직을 차지하고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조정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 데 있다고 규정하자 그는평소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죄가 신들에게 있으나 저들은 모두 임금께서 직접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임명한 자들로, 전하께서는 어떤 말이든 다 들어주셨으므로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죄를 준다면 이는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비슷합니다라고 고했다. 이 사람들이 전하가 융숭하게 대우해주시는 것만을 믿고 과격한 일을 하였으나 선인(善人군자(君子)라도 개혁을 하다보면 과격한 일이 없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조광조의 그런 행동을 적극 후원해 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중종 자신이었으니 만약 조광조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중종의 책임이라는 지적이었다.

 

정광필이 쫓아가 중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간곡히 간함으로써 처형은 보류됐고, 날이 밝으면서 논의는 의정부와 육조 당상관들이 모두 참여한 자리로 넘어갔다.

 

이어 정광필은 누가 이 사태를 일으킨 것인지를 따졌다. 대신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인데도 밀실에서 은밀히 진행됐다는 것이다. 투명한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결정은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중종은조정 대신들이 조광조 등이 나랏일을 그르친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므로 죄를 주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정광필은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전하께서조정이 청했다고 하시나 이는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신 등이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말하기를임금께서 조광조의 죄를 주청하라고 지시하셨으니 이것은 다 전하의 뜻입니다라고 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1인자와의 충돌로 조직이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고 1인자의 견제로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더라도 1인자의 잘못된 판단이 공동체와 구성원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면 2인자가 단호히 나서야 한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중종은조정이 이미 죄 주기를 청해 내가 죄를 주는 것이다는 말만 거듭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자 신하들은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일처리가 공정하고 정당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대저 은밀히 아뢰는 신하란 간사한 자가 아니면 망령된 자입니다라며 조광조를 죄주라고 청한 대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정정당당하다면 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왕에게 주청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건의 진상이 속속 드러났다. 홍경주, 심정, 남곤 등이 15일 밤 몰래 궁궐에 들어가 임금과 함께 조광조를 제거하는 문제를 상의한 다음 다시 나와 조광조를 죄주라고 청함으로써 마치 임금은 개입하지 않고 조정에서 죄주라고 했기 때문에 처벌하는 모양새를 연출한 것이다. 중종이 홍경주에게 밀지를 내렸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중종은 부인했지만 실록에는 사실로 기록돼 있다.

 

상황이 이처럼 전개되자 1118, 대간에서는 강력한 비난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위엄으로 무엇이 어렵기에 어두운 밤에 밀지를 내려서 비밀리에 행하십니까? 신임한다면 정성으로 대하여 의심하지 않아야 하고, 죄가 있다면 분명하고 바르게 죄를 정해야 할 것인데, 겉으로는 친근하게 대하고 신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시면서 속으로는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으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나라가 망할 조짐입니다.”

 

그러자 중종은 자신이 처음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임금으로서 최종 결단한 사안이므로 왈가왈부하지 말라며 더 이상의 논의를 차단하려고 했다. 또한조광조가 각박하게 정치를 시행하여 세상의 인심과 형편을 거슬렀다며 조광조 처벌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조정에서 미리미리 대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며 조정에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조광조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이 조정과 유생들 사이에서 전 방위적으로 계속됐고 자신의 잘못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중종은 조광조를 비호한 재상 안당을 숙청하고 자신의 결정을 지지하는 신하들로 대간과 주요 대신들을 갈아 치웠다.

 

이 과정에서 정광필은 점점 고립된다. 숙청의 피바람이 광기와 같이 휘몰아치고 남곤, 홍경주 등을 지지하는 일파가 그를 탄핵했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계속 극간을 이어갔다. “임금께서 대체 무슨 죄목으로 죄를 주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율(법률)에 따라 죄를 주시고자 한다면 여기서 2∼3등을 감경해도 부족합니다. 실제의 죄보다 지나치게 벌을 주신다면 이는 전하의 성명(聖明)에 크나 큰 누가 될 것입니다. 임금이 살육의 단초를 열면 국가의 기맥(氣脈)의 크게 손상될 것이니 더 숙고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중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사형을 감해주셨으니 전하의 인애(仁愛)로움이 끝이 없으시나 사형을 감경해주신 이유가 저들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 저들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병약하여 만약 장형(杖刑)을 당한다면 중도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조정은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니 죄를 줄여준 뜻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장형(杖刑)을 받는다면 저들은 분명히 죽고 말텐데 저들을 살려주겠다는 중종의 약속은 빈말이고 결국 죽이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냐는 힐문이다. 이에 대해 중종은나도 쉽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고칠 수는 없다며 담당하는 관리를 보내 오히려 형벌을 빨리 집행하도록 재촉했다.

 

이후 정광필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조광조 일파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 영의정에서 해임됐고 한직을 전전하다 척신 김안로의 무고로 일흔이 넘은 고령에 귀양을 가야 했다. 누가 봐도 잘못된 모함이 분명했음에도 중종이 정광필을 유배 보낸 것은 기묘사화 때 자신을 거역한 괘씸죄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광필은 김안로가 죽은 뒤에야 겨우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는다. 역사는 이런 그에게사직을 지킨 신하(社稷臣)’ ‘충신(忠臣)’이라는 명예를 헌정했다. 동서남북의 모든 붕당이 사림을 보호한 그를 칭송했다. 그의 직계 자손 중에서 무려 12명의 재상(영의정 3)이 나온 데는 이러한 그의 명망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극간하는 2인자와 이를 듣는 1인자의 덕목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임금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정책적인 면에서 임금의 의견을 보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임금의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임금의 결정을 비판하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정광필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임금과 충돌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우선, 임금이 절차를 지키지 않고 사사롭게 신하를 처벌하려 했다는 점이다. 리더가 절차를 지키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도 이를 무시하게 되고, 결국 공동체를 유지하는 질서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리더가 공개적인 의견 수렴 과정과 투명한 업무 처리 없이 독단으로 행동하면 시스템은 위기를 맞는다.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도 얻을 수 없다. 다음으로 신뢰의 상실이다. 리더가 구성원들을 기만하고 신뢰를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과 감정 상태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런 리더를 믿고 조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광필은 이런 절박함에서 중종의 결정에 강하게 맞섰다. 그는 중종의 이번 조처로 인해 젊고 강직한 선비들이 위축돼 다시는 자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되고, 공론과 시스템이 무너져 군주의 사적 욕망에 의한 통치가 가속화되는 것을 깊이 걱정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2인자가 1인자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1인자를 위협할 수도 있는 힘과 인맥을 가진 2인자는 여타 구성원들과는 달리 1인자와 다른 입장에 서는 것 자체가 1인자를 압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가 있다. 1인자와 2인자의 공개적인 대립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니라 권력 투쟁이자 조직의 분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인자들은 보통 간접적인 경로를 택한다. 1인자와 독대해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거나 1인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대신 의견을 전달한다. 또한, 1인자의 판단과 결정을 바꾸고자 하더라도 1인자의 생각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광필도 중종에게 극간을 할 때 조광조가 무죄라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중종의 주장대로 조광조의 죄가 분명히 있지만 중종의 결정이 지나치므로 처벌의 강도를 낮추자는 식으로 얘기한다. ‘A는 틀렸다. B여야 한다가 아니라 A가 맞지만 A-1(혹은 A+1)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함으로써 1인자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2인자로서 전면에 나서 1인자에게 직언해야 하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1인자와의 충돌로 조직이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고 1인자의 견제로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더라도 1인자의 잘못된 판단이 공동체와 구성원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면 2인자가 단호히 나서야 한다.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1인자의 폭주를 바로잡을 수 없을 때 2인자는 절대 침묵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의 평공(晉平)나라의 환란으로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하고 묻자 신하 숙향(叔向)재상이 녹봉만 받고 극간(極諫)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환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현대사회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사회나 노조를 제외하면 별다른 견제 장치가 없는 CEO, 특히 오너 경영자들은 자신의 결정에 과도한 확신을 갖곤 한다. 이제까지 성공으로 인한 자신감 과잉이 그의 객관적인 판단력을 무디게 만든다. 기업의 장래를 위한 충언이라도 나의 생각과 다를 경우 자신에게 도전하고 권위를 침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수십 년 쌓은 성공의 신화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기업을 망하게 만든 사례는 우리에게 낯설지가 않다. 따라서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2인자다. 오너 밑의 전문경영인, 대표이사 밑의 최고위 임원 등은 1인자와 같은 시야를 갖추고 1인자를 보좌하며 기업의 번영을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는 1인자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평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매끄럽게 1인자의 판단을 도와야 하고 위급할 때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기업을 위한 바른 선택지를 1인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2인자가 1인자 다음 가는 대우를 받는 까닭이며 1인자에게극간한 정광필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의로움을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2인자가 바쳐야 할 충성과 헌신의 대상은 기업 자체와 구성원들 모두이지 1인자가 아니다.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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