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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토사구팽? 정치 버리니 몸이 평안하더라 개국공신 조준, 토지개혁 행정가 외길

김준태 | 150호 (2014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창업군주에게개국공신이자핵심참모는 가장 필요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창업기의 재상들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창업 이후 미련 없이 초야에 묻히든가, 철저하게 1인자에게욕심 없음을 호소하면서실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대 재상 조준은 후자를 택했다. 고려 말혁신가에서 조선을 건국하는혁명가로 변신했던 그였지만 오히려 자신의 원대한 꿈토지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다소 굴종적이지만 2인자 자리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

 

조준은 1) 행정실무에 집중하고 2) 대체가 불가능한 전문영역을 구축하며 3)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며 생존에 성공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 (野獸已盡獵狗烹)”

 

“용맹과 지략이 주군을 두렵게 하는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롭고, 천하를 뒤덮을 만한 공을 세운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한다. (勇略震主者身危功蓋天下者不賞)”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 두 구절1 은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이 섬겼던 주군에 의해 숙청되고 마는 개국공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묘사한 것이다. 건국의 원훈이자 수석 참모인 재상은 더욱 위태로웠다. 창업과정에서 쌓인 재상의 지분이 왕권을 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경영하고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기획해낼 정도의 걸출한 능력도 창업 전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일단 목적을 이루고 난 뒤에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용맹과 지략을 가지고 혹시라도 군주에게 대항하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후계자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재상일지라도 새 임금에게는 불편한 존재다. 나이와 경륜이 훨씬 위일 뿐 아니라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재상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알아서 2선으로 물러나 있다가 왕이 필요로 할 때만 자문역할을 해주면 좋겠지만 개국공신 재상의 무게를 내세우며 사사건건 국정에 간섭한다면 임금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버거워진다. 이러한 위협요인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아예 재상을 제거해버리는 사례가 많다. 명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든 이선장(李善長)과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기업에서 후계자 승계가 이뤄지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대거나 컨설팅 업체 등을 불러들여 명분을 만든 뒤 창업공신 격인 임원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치다.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군주를 만나거나 아예 군주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닌 이상 창업기의 재상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대업을 이룬 후 미련 없이 떠난 장량(張良)의 길과 군주에게 철저히 자신을 맞춰가며 행정가로서의 임무에만 집중한 소하(蕭何)의 길이다. 이 두 길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권력에 욕심이 없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창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물론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두 번째 길은 정치의 현장에 계속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의 감시 또한 계속된다. 소하도 한 고조 유방의 끊임없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자신은 아무런 욕심이 없고 오로지 행정에만 집중할 뿐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해야만 했다. 이를 두고 자기 한 몸이 살아남기 위한 비굴한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이상으로 왕조 건설에 참여한 개국 재상으로서 이 길은 그 꿈을 완성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을 것이다.

 

 

 

본 연재에서 다루는 첫 번째 재상인 송당(松堂) 조준(趙浚, 1346∼1405)도 앞서 언급한 소하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초대 재상인 조준은 정도전과 더불어 창업을 주도한 인물이다.2  그는 건국과 함께 추진된 각종 제도와 개혁 정책들이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실무를 책임졌다. 특히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인과전법(科田法)’ 체제가 확립되는 데 있어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 말기만 해도 조준은 정도전에 못지않게 새로운 시대를 향한 비전을 설계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이 건국되고, 자신이 재상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오로지 행정가로서의 임무에만 집중한다. 이번 호에서는 조준을 대표하는 정책인 과전법과 함께 그가실무형재상으로 변모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체제 내 혁신가에서 혁명가로

1374(고려 우왕 즉위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조준은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다는 평판을 들었다. 한번은 최영의 추천으로 왜구 토벌의 책임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상벌을 엄격히 적용하며 통솔하자 휘하 장병들은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을지언정 조준의 위엄을 거스르지는 말자라고 하면서 힘껏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3  이후 그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돼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추진된 개혁의 중심에 섰다. 고려 말기의 사회 혼란과 국정의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됐던 비전과 제도 개혁안은 거의 대부분 그가 올린 상소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조준은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의 파상공세를 앞장서서 막아냈으며 몇 차례에 걸친 투옥과 숙청의 위기 속에서도 개혁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조준은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생활을 하는 내내 토지제도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사회적 부()가 다양한 분야에서 창출되는 현대사회에 비해 과거에는 토지가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었다. ‘국가를 대신하는 단어로 사용되는사직(社稷)’이 토지의 신()과 곡식을 관장하는 신, 즉 직()을 의미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지는 한 개인의 생존뿐만 아니라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튼튼히 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4

 

Mini Box: 조준의 토지개혁

조준의 토지개혁은 효과적이고 단계적인정책목표설정을 통해 이를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준은 당시정책환경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시급한 사안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인정(仁政)의 실현이라는 정책목표를 제시했다. 그가인정을 내세운 것은 그것이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보편적인 이상으로서정책대상집단(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정책피해집단(기득권세력)’으로부터 예상되는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명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목표는 실질적인 내용면에서 적합성(appropriateness)과 적절성(adequacy)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지녀야 한다. (정정길 외, <정책학원론>, 대명출판사, 2007, p.330) 구성원들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정책은 그 자신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하위 정책목표(도구적 목표)’를 필요로 한다. 조준의토지개혁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권기헌에 따르면 정책목표는하위목표(중간목표 실현을 위한 도구적 목표) → 중간목표(상위목표 실현을 위한 목표) → 상위목표(실제로 관심을 가지고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 또는 상태) → 최종목표(정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나 상태)’의 계층구조를 가지고 있다.(권기헌, <정책학-현대 정책이론의 창조적 탐색>, 박영사, 2008, p.76) 조준의 정책을 이 구조에 대입하면하위 혹은 중간목표(토지제도 개혁) → 상위목표(민생안정) → 최종목표(인정의 실현)’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토지제도는 매우 어지러웠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나랏일을 하는 군인과 관료에게 직급에 해당하는 토지를 나누어주고 당사자가 일을 그만두거나 죽으면 국가가 환수해가는 체계였다.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해 조준은 다음과 같이 토지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토지를 반납하지 않고 사유화했고 다른 이들이 가진 토지까지 빼앗아 차지함으로써 법이 무너졌습니다. 그로 인해 관리나 군인들에게 줄 땅이 모자라니 그 누가 나라를 위해 일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나서겠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자 부모와 자식, 형제 간에도 소송을 벌입니다. 이러니 어찌 이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무릇 인정(仁政)이란 땅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바로잡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가 번영하느냐, 아니면 망하느냐는 백성들의 삶이 고통받고 있는지에 기인한다백성들의 삶이 어떠하냐는 토지제도가 원칙에 따라 균형 있게 시행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그는인정(仁政)의 실현을 기치로 내걸고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미니 박스조준의 토지개혁참조.)

 



맹자에 의해 처음 제시된인정백성이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정신의 바탕 아래 민생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교화하는 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유교정치사상의 근본이념이다. 토지개혁을 추진하면서 일종의 도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인정을 전면에 내세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 K. Galbraith)토지개혁은 혁명적인 조치다. 공동체의 한 집단으로부터 다른 집단으로 권력과 재산, 지위를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준의 토지개혁은 필연적으로 개혁의 추진으로 인해 재산과 권력을 침해당하는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인정의 당위성을 내세움으로써 구성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들의 반발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정책학에서 정책목표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구성원들의 소망이 투영된 가치를 상위정책목표로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기업에서 경영목표나 개혁의 방향을 설정할 때도 적용될 수 있다. 정치에서나 경영에서나 혁신에는 결국 명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조준은 사적인 토지교환을 금지하고 토지 환수절차를 엄격하게 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제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390(공양왕 2) 9, 권문세족들이 이중삼중으로 가지고 있어 백성들의 원한의 대상이었던 기존의 토지문서를 전면 소각하고 이듬해 5월에는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완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준은 이성계에게 합류했다.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느낀 기득권 세력의 강고함과 고려의 낡은 시스템이 가진 문제들은 단순히 체제 안에서의 개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 남은 등과 함께 새 왕조의 건설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고려를 지키려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측근들을 제거하려 시도했을 때먼저 그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해야 한다며 조준을 제일 먼저 거론했을 정도로 그는 조선 건국 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은밀하게 위대하게

조준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우시중(이후 좌시중, 좌정승, 영의정부사를 거침)에 오른다. 그러면서 평양의 식읍과 함께 경기도통사(京畿都統使)의 관직도 제수받게 되는데 경기도통사는 수도권 일대의 군권을 장악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그는 이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조준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며 토지개혁 등 자신이 이룬 성과들은 오로지 태조의 덕분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이 창업하기까지 태조가 한 선택과 행동들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당위성을 부여하며 예찬했다. 자신의 권력이 늘어남으로써 생겨날 의심을 피함과 동시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리함으로써 태조의 권위를 세워주고자 한 것이다. 소하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한 고조가 소하를 상국(相國)으로 봉하면서 식읍 5000호를 내려주자 소하는 식읍을 사양하고 자신의 재산을 군비로 헌납함으로써 황제의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조준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경기뿐 아니라 다섯 개 도의 병력을 총괄하는 오도도총제사(五道都摠制使)로 임명된다. 이때부터 조준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주어진 권력의 크기만큼 위험도 커졌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각종 제도와 의례 절차들의 세부사항을 마련하며 새 왕조가 기틀을 다져가는 데 혼신을 다해 힘썼지만 정치적 이슈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태조가 세자 책봉에 관한 재상들의 의사를 물어봤을 때도 창업 초기에는 공이 가장 많은 왕자를 세자로 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태조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하자 반대하지 않는다. 정도전이 추진한 요동정벌에 대해서만 강력하게 반발해 무산시켰는데 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민생안정을 헤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이를 두고 같은 개국 1등 공신이었던 남은이곡식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일을 맡길 수는 있지만 함께 큰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고 비아냥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권력에 대한 조준의 조심성은 1차 왕자의 난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1398 826. 세자의 자리가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자신이 아니라 배다른 동생 방석에게로 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정안군(훗날 태종)은 이날 무력을 동원해 정도전 등 세자 방석의 지지 세력을 숙청했다. 그리고 궁궐 문 앞에 병력을 집결한 후 당시 수상(首相)이었던 좌정승 조준을 호출한다. 신하들을 대표하는 재상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준은 머뭇거렸다. 애초에 정안군을 세자로 천거했던 그였지만 정안군의 이번 행위는 태조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안군에 반대한다면 자신 또한 방석의 일파로 몰려 제거될 공산이 컸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조준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점()을 쳐보느라 즉각 나가지 않았고5  정안군이 사람을 보내 거듭 재촉한 뒤에야 따라 나섰다. 그리고 정안군이경은 어찌 이 씨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모른 척 하고 있는가”라고 질책하자 몹시 두려워하며 정안군이 타고 있는 말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저들이(정도전 세력) 하는 짓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명색이 재상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조준은 1차 왕자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정사(定社) 1등 공신에 봉해졌다. 하지만 우유부단했던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석대신을 포섭하기 위한 형식적인 명예였을 뿐이다. 그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물쭈물한다. 그로 인해 사태가 종료된 직후, “모든 신하들이 변란으로부터 왕실을 지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지만 조준은 이 소식을 듣고서도 못 들은 체하고 집에 틀어박혀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준은 태종 5(1405)에 죽기 전까지 재상의 자리를 지킨다. 하륜처럼 태종의 참모였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종을 확고하게 지지해준 것도 아닌데 태종은 왜 조준을 계속 재상으로 옆에 뒀을까.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때 보여준 모습이 조준의 전부였다면 태종이 그가 죽은 뒤에도 어진 정승을 논평할 때 풍도(風度)와 기개에 있어서 반드시 조준을 으뜸으로 삼고 항상조정승이라고 부르며 대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태종이 예스맨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태종은 왕권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반론을 펼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신하들을 아꼈다. 조준도 재상 시절, “임금이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옳지 못한 점이 있으면 이를 멈추게 하고 아래로 내려 보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스맨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준은 완벽한 행정가였다.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하고 유익하며, 실천 가능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데 힘쓴 행정가였다. 물론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훗날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조준을 두고안타깝게도 큰 식견을 지니지 못해 고려 말엽의 잘못된 정치를 부족하나마 바로잡은 바가 있기는 하여도토지제도를 어설프게나마 마련해 국가의 재정을 늘린 것을 가지고 (스스로) 큰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했다고 비판했다. 행정실무에만 능했을 뿐 시야가 좁아서 건국 초기라는 중요한 시기에 국가의 비전과 미래를 설계하는 역량까지는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태조와 태종이라는 카리스마가 강한 군주들을 매끄럽게 보좌하며 그 시대 상황에 충실하고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 국정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유혈투쟁이 난무했던 권력투쟁의 혼란기를 지나 세종의 태평성대로 이어지기까지 창업기의 국가행정을 연착륙시킨 데에는 조준의 공헌이 매우 크다.

 

요컨대 조준은 앞에서 말한 소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나서지 않음으로써 권력의 향방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내보이고자 한 것이다. 자기가 먼저 자신의 약점을 만들어 군주에게 제공해 줌으로써 군주의 의심을 완화시키고이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야심이 없다’ ‘이 사람은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 안전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창업의 지분을 가진 원훈으로 지도자의 정통성을 더해주며 국가경영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상이 권력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2인자를 내칠 군주는 없기 때문이다.

 

교훈 및 시사점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많은 경영성과를 이뤄낸 전문경영인이 불명예 퇴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오너(또는 이사회)와의 갈등 때문이다. 아무리 전문경영인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쟁취한 것이 아닌위임된 권력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힘을 부여한 측에서 언제든지 회수해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영권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오너와 함께 경영 일선에 있는 경우라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도 오너와 부딪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이때 참고할 만한 것이 바로 조준의 처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군주의 권한을 위임받는 재상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의심을 사기가 쉽다. 군주권이 안정이 되지 않고 권력 창출의 지분을 가진 재상들이 많은 창업기는 의심의 강도가 훨씬 강해진다. 그래서 창업기의 수많은 재상들이 주군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조준은 1) 행정실무에 집중하고 2) 대체가 불가능한 전문영역을 구축하며 3)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며 생존에 성공했다. 카리스마가 강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익숙한 창업기의 군주들은 그의 빈틈을 보완해 줄 사람이 절실하다. 군주의 이상을 현실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군주의 정책이 완결성을 기할 수 있도록 디테일에 강한 재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게다가 조준은 토지제도 분야의 최고권위자였다. 경제적으로 조선의 창업을 대표하는 어젠다인 토지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처음 입안단계부터 이 문제를 주도한 조준이 반드시 필요했다. 끝으로, 그는 권력과 관련된 일에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먼저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군주의 의심을 완화시켰다. ‘이 사람은 권력에 도전하지 않는다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준은 한 나라의 재상답지 못한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인정(仁政)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계속 실현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재상으로서의 역할 공간을 넓힐 수 있었다. 왕권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군주에게 얼마든지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이러한 그의 선택이 현명한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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