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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vs오서, 해고의 미학

하정민 | 66호 (2010년 10월 Issue 1)
 
상대적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강한 한국과 달리 서구에서는 해고가 쉽다.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은 물론 정규직도 해고 통지 직후 곧바로 짐을 싸는 사례가 허다하다. 하지만 해고가 쉽다고 해서 서구 기업이 해고 절차를 대충 처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한국에서처럼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토로하며 직원의 인정에 호소하거나 공치사를 남발하지 않는다. 대신 해고 당사자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해고 이유를 제시한다.
 
최근 세계 피겨계를 들끓게 했던 김연아 선수와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결별은 기업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피겨 선수와 코치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이라기보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에 가깝다. 많은 피겨 선수들은 여러 명의 코치를 거친다. 시즌마다 코치를 바꾸는 선수들도 많다. 오히려 김연아와 오서처럼 4년이 넘도록 함께 하는 게 이례적이다. 외국 언론이 오래 전부터 김연아와 오서의 관계를 드림 팀이라고 표현하며 주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통역이 없으면 의사소통조차 안 되고, 불편한 몸을 이유로 일본에 오지도 않았던 아사다 마오의 코치 타티아나 타라소바와 대조를 이루며 김연아 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결별 과정에서 드러난 양측의 대립은 그간의 긍정적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지난 4년간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고, 누가 결별의 원인을 제공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결별 과정이다. 감정 싸움을 남발한 두 사람에게 남은 건 ‘금메달을 따게 해준 코치를 버린 선수’와 ‘프리 프로그램의 선곡을 누출하며 상도의까지 어긴 비겁한 코치’라는 부정적 이미지뿐이다.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고용주인 김연아 측의 권리다. 하지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면 계약이 끝나는 시점, 아니 그 이전부터 재계약을 하지 않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했어야 한다. 둘의 계약이 만료된 올해 4월 이후 긴 공백기를 가졌고, 스케줄 결정에서도 오서를 배제했으니 알아서 대충 눈치채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그야말로 동양적 사고다. 서로 싫은 소리 하지 말고 얼굴 붉히는 일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은 동양적 정서로 보면 ‘배려’일지 모르나 서구 문화권에서는 ‘모욕’으로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없이 해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소송을 거는 게 서양인의 사고다.
 
최근 한 국내 기업도 결별 과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모 온라인 게임업체는 미국인 유명 게임 개발자와의 소송에서 패해 무려 2800만 달러를 물어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개발자는 “해당 회사가 자신을 해고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스스로 퇴사한 것처럼 공표하는 바람에 스톡옵션 행사 과정에서 손실을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해 결국 승소했다. 이 회사는 곧 항소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소송 과정에 필요한 시간, 돈, 유무형의 노력을 감안하면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 역시 결별 자체가 아니라 처리 과정에서 생긴 감정적 앙금과 문화적 차이가 문제였다. 결별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고’를 ‘퇴사’로 바꾼 동양적 사고가 소송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잘 헤어지는 건 이에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다. 특히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외국 파트너와의 이별이라면 더욱 냉철하고 면밀하게 일 처리를 해야 한다. 결별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조직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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