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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진정한 동력, 사치

강신주 | 46호 (2009년 12월 Issue 1)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은밀한 관계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사회학자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 원인을 해명했다. 마침내 그는 프로테스탄티즘과 거기서 유래하는 금욕 정신의 발달이야말로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선언했다.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현세의 삶은 심판의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도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사후의 심판, 그리고 심판 이후의 영원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육체적 삶이 아닌 정신적 삶을 지향하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후의 삶은 육체적 괘락과는 무관한 정신의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 욕망이나 쾌락 추구를 사탄의 유혹이라며 저주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베버가 주목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였다.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직업을 일종의 소명(召命),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 간주한다. 이런 생각은 ‘보케이션(vocation)’이라는 단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금도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공존한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에게 직업은 천직(天職), 즉 하늘로부터 유래한 임무라는 발상이 가능해졌다.
 
산업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 천직은 결국 자본가 또는 노동자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두 계급 사이에 갈등의 요소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나 노동자나 자신들의 역할을 하나의 소명으로서, 다시 말해 ‘금욕적’으로 수행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이 ‘소비’를 억제하고 ‘생산’에만 집중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소비란 곧 현세의 육체적 쾌락을 도모하는 것으로, 금욕 정신에 위배된다. 생산을 통해 발생한 이윤을 소비로 탕진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이윤을 다시 생산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성이 계속 높아지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베버의 최종 진단이다.
 
‘사치’의 힘
베버의 논리는 서양의 자본주의 발달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베버의 주장이 나오자마자 그의 논리를 정면에서 비판했던 동시대 사회학자 한 사람은 너무 쉽게 잊혀졌다. 그가 바로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이다. 흥미롭게도 베버와 좀바르트는 매우 절친한 동료였다. 동년배에 사이가 가까웠던 두 사람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잡지>라는 저널의 공동 편집자로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좀바르트는 베버의 생각에 한 가지 맹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 둘 사이는 멀어져갔다.
 
“베버가 말한 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발달의 진정한 동력이라면, 그래서 소비보다 생산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산업자본이 만들어낸 엄청난 상품들은 어떻게 팔릴 수 있는가?”
 
좀바르트의 생각은 예리하다. 사실 아무도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없다면, 다시 말해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느라 상품을 소비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 산업자본주의는 발전은커녕 현상을 유지하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마침내 1913년 좀바르트는 2권으로 된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사에 대한 연구>라는 대작을 출간했다. 1권에는 ‘사치와 자본주의’라는 부제가, 2권에는 ‘전쟁과 자본주의’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중 1권은 매우 중요하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좀바르트는 자본주의 발달의 비밀을 생산이 아니라 소비, 즉 ‘사치’에서 찾았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에서 사치가 차지하는 역할은 자신만의 통찰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치의 생산성은 이미 볼테르(1694∼1778), 코이에(1707∼1782), 맨더빌(1670∼1733), 슈뢰더(1719∼1800) 등이 이미 지적했던 것이다.
 
슈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우리나라에 사치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 왜냐하면 부자들의 사치는 많은 수공업자와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 근대자본주의의 발생을 탐구하는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이처럼 총명하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관찰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사치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였고, 자본주의산업에서의 시장의 의의에 대해서도 많은 이론화가 시도되었지만, 사치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할 줄을 몰랐다. 분명히 사치 문제에서건 시장 문제에서건 사람들은 죽은 궤도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사치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착실하고 분수에 만족하는 검소한 부르주아의 윤리적 열정을 갖고서 접근했으며, 그 문제를 도덕적인 추론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논의해버렸다.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사에 대한 연구-사치와 자본주의>
 
슈뢰더의 말을 인용하면서 좀바르트는 ‘사치’와 ‘시장’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숙고했다. 사치를 추구하는 부자들은 자신들의 허영을 만족시킬 장소를 찾는다. 그곳이 바로 시장이다. 동시에 부자들에게 상품을 팔아 돈을 벌려는 수공업들이나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곳도 바로 시장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품과 화폐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치의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궤도를 따라가는” 연구가 성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좀바트르에 따르면 그것은 “착실하고 분수에 만족하는 검소한 부르주아의 윤리적 열정”을 견지했던 연구자들의 무의식적이고 종교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베버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비판이기도 하다.
“사치는 인간의 본성”
이제 구체적으로 사치가 어떻게 산업자본주의를 발달시키게 되는지, 좀바르트가 해명했던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어떤 시대라도 사치가 일단 존재하면, 사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그 밖의 동기들도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즉 명예욕,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 뽐내기, 권력욕, 한마디로 말해서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중요한 동기로서 등장한다. 그렇지만 사치가 개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이 활기를 띠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에로티시즘이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시대에 적용해보자. 거대한 사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즉 부(富)도 있었고, 사랑의 생활도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고, 다른 집단을 압도하려고 하는 몇몇 집단의 시도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에는 전적으로 향락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에서의 생활도 있었다.-<근대자본주의의 발전사에 대한 연구-사치와 자본주의>
 
좀바트르는 사치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치가 인간이 가진 허영,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원초적인 욕망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며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하려 한다. 비록 내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치가 진정한 의미의 사치가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 다시 말해 에로티시즘과 관련된 관능적 활기를 수반해야 한다는 좀바르트의 지적이다. 사실 사랑을 구걸하거나 하룻밤의 쾌락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욕망의 대상을 유혹하기 위해 자신의 경제적 여유를 넘어서는 소비를 감내하려 하지 않는가?
 
마침내 좀바르트는 19세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원인에 대해 베버와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생계수단을 넘어서는 부(富)가 축적되어야만 한다.” “성생활이 과거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다른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계급적 구별의식이 탄생해야 한다.” “향락과 구별의식이 기능할 수 있는 대도시가 충분히 발달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우발적으로 마주치게 되면서 산업자본주의로 표방되는 ‘거대한 사치’의 세계가 서양에서 열렸다는 것이 좀바르트의 최종 진단이다. 1960년대 이후에나 집중적으로 논의된 소비 사회의 논리가 이미 20세기 초에 완전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좀바르트의 천재성은 주목받아 마땅하다. 물론 베버로서는 안타까운 일일 테지만 말이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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