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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초과 에너지로 인한 재앙 막으려면…

강신주 | 43호 (2009년 10월 Issue 2)
19세기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발달로 우리는 ‘생산’과 ‘축적’의 신화를 갖게 됐다. 부단히 생산해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토대로 다시 새로운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생산과 축적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까지 추앙받는다. 우리 사회가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과 소득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과연 타당할까? 부단한 생산과 축적으로 인류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때문에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1897∼1962)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례적으로 생산과 축적보다는 ‘소비’와 ‘낭비’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흔히 바타유를 ‘에로티즘의 철학자’라고 일컫는다. 그는 “금기가 없다면 에로티즘도 없다”면서 에로티즘이 문화적, 사회적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금기란 문화적, 사회적 층위이기 때문에 인간의 에로티즘은 동물적인 성행위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과잉 에너지의 비극
바타유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가 ‘생산’과 ‘축적’의 신화를 해체했다는 데 있다. 무슨 이유로 그는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비판했던 것일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표면의 에너지 작용과 그것이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들은 원칙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때 초과 에너지는 체계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초과 에너지는 기꺼이든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 재앙을 부르면서든 간에 반드시 대가 없이 상실되고 소모돼야만 한다. - <저주의 몫>
 
바타유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문명을 생태학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물론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다른 유기체를 잡아먹고 공기와 물을 마셔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궁극적인 에너지다. 그것은 바로 태양으로부터 나온다.
 
바타유는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가 항상 과잉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태양 에너지가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지구에 도달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초과된 에너지, 즉 이 과잉된 에너지를 처리해야 한다. 물론 바타유가 말했듯 이 초과된 에너지를 체계의 성장에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체계의 성장이 멈췄을 때 생긴다. 바타유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간단한 예로 어떤 아이에게 너무 많은 음식을 준다고 하자. 이 아이는 결국 과잉 영양분을 섭취하는 셈이다. 일단 아이는 과잉 영양분을 자신이 성장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아이보다 덩치와 키가 더 커질 것이다. 과잉 에너지를 체계의 성장에 잘 이용한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과잉 영양분을 공급해준다고 해서 이 아이가 무한히 자랄 수 있을까? 체계에 흡수되지 않은 에너지는 아이를 뚱뚱하게 만들고, 아이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만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영양분을 과잉 섭취한다면 아이는 끝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는 이런 비극적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대답은 단순하다.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 안에 쌓인 과잉 에너지를 계속 바깥으로 배출해줘야 한다.
 
유쾌한 파멸
개체의 수준에서든 사회의 수준에서든, 체계가 유지되려면 체계는 과잉 에너지를 아낌없이 소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제안한 ‘일반 경제(general economy)’의 핵심 논리다. 반면 과잉 에너지를 통해 체계 발전을 도모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를 바타유는 ‘제한 경제(restricted economy)’라고 부른다. 이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적인 경제일 수밖에 없다. 즉 체계 발전으로 흡수하지 못하는 과잉 에너지가 있을 때, 제한 경제는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타유는 19세기부터 인류가 고도의 생산력을 확보했지만, 그 결과 전대미문의 과잉 에너지를 축적하게 됐다고 경고한다. 그가 제안한 일반 경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잉 에너지를 적절히 배출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과 사회는 비만으로 죽어가는 아이처럼 비극적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 바타유가 1, 2차 세계대전을 과잉된 에너지의 폭발 사례라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경고가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의 자폭을 막을 수 있을까?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死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밖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하게 다를 것이다. - <저주의 몫>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에너지원도 태양 에너지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존재한 여러 사회 체계들 가운데 산업자본주의 체계만큼 태양의 과잉 에너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체계에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과잉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 배출할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과잉 에너지를 흡수해 비만에 빠진 아이를 다시 생각해보자. 이 아이는 너무 많은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워 이제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국이 가까움에도 에너지 섭취를 멈추지 않는다면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질적이거나 폭력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이 바로 폭동이나 전쟁의 원인이기도 하다. 아이의 신경질이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하진 말자. 지금 아이는 ‘폭력’과 ‘신경질’로 과잉 에너지를 배출하고 있을 뿐이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배출하는 것을 바타유는 ‘불유쾌한 파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바타유가 제안하는 ‘바람직한 파멸’ 혹은 ‘유쾌한 파멸’이란 무엇일까? 바로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식의 에너지 배출이다. 아이는 자신의 과잉 에너지를 운동을 통해 배출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음식을 다른 아이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눠줄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아이는 과잉 에너지를 배출하거나 줄일 수 있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바타유에 따르면 이런 에너지의 파멸은 ‘바람직하고 유쾌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폭력적 성향과 신경질적 반응을 버리고 이웃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타유의 일반 경제론에 따르면 과잉 에너지는 반드시 소모돼야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이나 폭력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나눔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이 점에서 일반 경제에 대한 바타유의 논의는 기존의 숙명론이나 종말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해 드립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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