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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도구, 삼단논법의 진실

강신주 | 42호 (2009년 10월 Issue 1)
논리적 사유(logical thinking)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가끔 우리는 누군가에게 “좀 논리적으로 생각해봐. 네가 생각하는 건 너무 황당하잖아”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런 말을 누군가로부터 듣기도 한다. 마치 논리적 사유가 무엇인지 누구나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논리가 무엇이며 논리적 사유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물어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을 주저할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지금까지 논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논리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논리라는 말을 들으면 기껏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체계화했다고 하는 삼단논법 정도다.
 
대전제: 인간은 모두 죽는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학창 시절 누구나 이와 같은 사례로 삼단논법을 배웠다. 대전제가 참이고 동시에 소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이것이 논리적 사유의 전부일까? 여기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3가지 사항들 가운데 우리 머릿속에 최초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단논법의 순서대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가 제일 처음 떠오른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논리적 사유는 어떤 것인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제일 먼저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먼저 떠오른 다음,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대전제와 소전제를 찾게 된다. 결국 논리의 순서는 실제로 작용하는 우리의 사유 순서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살인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을 맡은 형사나 검사는 어디서부터 수사에 착수할까? 분명 그는 용의자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살인범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먼저 지목해본다. 보통 이런 사람들을 ‘용의자’라고 부른다. 수사관은 용의자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절차로 수사를 진행할 것이다. ‘A가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면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런데 A는 당시 살인 현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한마디로 알리바이가 있었다. 결국 A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다음 수사관은 B에 대해, 그리고 C에 대해 같은 수사를 반복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인 사건을 맡은 수사관은 용의자를 추정해 그가 범인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집요하게 찾는다. 물론 재판이 열렸을 때 검사는 어떤 증거들을 제시해 피고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수사나 재판 과정의 순서가 반대로 돼 있다는 점이다.
 
 
삼단논법의 비밀도 여기에 있다. 논증이 구성되는 순서, 즉 ‘대전제 → 소전제 → 결론’이라는 순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순서와는 반대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어떤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주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군가 우리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대전제와 소전제를 찾으려 한다. 논리적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여부다.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으려 할 것이고, 마침내 찾은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을 최초로 체계화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사유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철학자였다.
 
이제 주어진 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삼단논법이 적합하게 제공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찾을 것인지,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적합한 출발점(전제)들을 파악할 것인지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는 삼단논법의 구조에 대해 고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들을 구축하는 능력까지 반드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 <분석론 전서>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형식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적합한 전제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적합한 전제들을 파악해 삼단논법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런 능력을 서양인들은 ‘이성(理性·reason)’이라고 부른다. 이성은 어떤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합한 전제들을 찾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사람들은 ‘리즌(reason)’이라는 말에 대해, 이유를 뜻하는 ‘이()’와 본성을 뜻하는 ‘성()’을 합쳐 ‘이성’이라고 번역했다. ‘리즌’이라는 말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단어에는 상호 관련된 2가지 뜻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가 ‘이성’이라는 뜻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유’나 ‘근거’라는 의미다. 결국 누군가가 이성적이라는 말은 그가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라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논리적 사유의 핵심이 우리가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람은 모두 죽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고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가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끼며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그의 주장은 너무나 분명해 아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논리적 사유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이성, 즉 근거를 찾고 제시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 상대방, 즉 타자라는 점이다. 타자가 나의 주장을 듣자마자 그것을 즉각 수용한다면 나는 근거들을 찾아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서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로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한다. 겉으로는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논리적 사유는 타자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논리적 사유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이 발달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폴리스(polis)는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실현됐던 곳,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설득의 정신을 지향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해 드립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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