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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생각

기술 혁명보다 의식 혁명이 중요. 묻고 따지며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야

김경집 | 230호 (2017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우리는 경주 ‘포석정’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별다른 의문 없이 신라 경애왕이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곳을 떠올린다. 하지만 경주가 함락당한 12월, 한겨울에 임금이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과연 음주가무를 즐겼을까. 실은 그곳에 화랑 문노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임금이 포석사에 간 것은 문노에게 제를 지내며 백성들에게 결사항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묻고 따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본 모습과 의미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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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컴퓨터를 배워둬야 한다는 주변의 재촉에 이공대학의 컴퓨터 수업을 들었다. 포트란이니, 코볼이니 하는 컴퓨터 언어를 배우느라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전문 언어는 난공불락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조금은 익혔다. 그러나 별로 써먹을 일이 없었다. 그냥 배우기만 했다.

그러다가 MS-DOS와 디렉토리라는 놀라운 혁명이 출현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내가 수집하고 필요한 정보를 내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참 뒤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이전의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됐다. 그 기간이 개인적으로는 20년쯤 걸렸다. 이 경험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 지금의 기술과 정보의 혁신의 속도는 예전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빠르다. 머지않아 그 결과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나는 소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소비하고, 어떻게 부가가치를 키울 것인가.



입체화된 지식의 필요성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첨단 ICT에 기반한 산업융합과 초연결성 등을 토대로 우리의 상상이 현실화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으며 그 상상의 ‘재료’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지식의 양은 매우 많다. 아마도 세계에서 우리만큼 많은 지식과 정보를 배우는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다만 그것을 오직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방식의 주입식 교육으로, 일방적으로 배우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정작 그것을 활용하는 영역은 부족하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도 결국은 최신 지식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로밖에 활용하지 못한다. 모든 지식이 평면적이고 직선적이다.

만약 그 지식들을 입체화하는 데 집중하면 콘텐츠는 엄청난 가치로 변모할 수 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4차 산업혁명에 의해 약 7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약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면 결국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사라질 일자리에 집착하는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첫 단추가 기존 지식과 정보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로 해석하고 그 속뜻은 ‘가을’이라고 대답한다. 문자적으로는 혹은 평면적으로 이런 해석은 맞다. 그러나 고사성어는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그 원산지가 대부분 중국이라는 것과, 둘째, 이야기 구조를 가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사람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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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농업국가였다. 농업사회에서 말(馬)은 일상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속도나 전쟁과 관련이 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나 주마가편(走馬加鞭)이 속도의 사례에 해당하고 새옹지마(塞翁之馬)는 전쟁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이 ‘말’이 어떤 말인지 물어야 한다. 천고마비의 말은 바로 흉노의 말이다. 중국인들에게 북방의 기마민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흉노, 여진, 거란 등 북방민족은 중국의 존망을 결정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 두려움이 만리장성의 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북경이라는 수도의 ‘극단적 위치’도 바로 그러한 문제에 직결됐다. 하늘이 높은 계절은 바로 가을이다. 가을이면 추수를 한다. 추수가 끝나면 노동에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느슨해진다. 반면 북방의 기마족인 흉노는 초지에서 말을 잘 키웠는데 농지가 부족하니 식량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중국이 힘이 세면 곡물을 사되 만만하면 약탈로 채웠다. 중국인들에게 기마민족이 잘 키운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와 매처럼 채가면 일 년 농사는 헛일이 돼버렸다.

그러니 중국인들에게 천고마비의 속뜻은 ‘유비무환(有備無患)’ 등의 의미였다. 그런데 우리는 옥편의 설명에서 (1)번에 해당하는 의미만 나열해서 ‘하늘(天)’은 ‘높고(高)’ ‘말(馬)’은 ‘살찐(肥)다’라고 사용한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게 상당 부분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 것들이 많다. 질문도 없고, 토론도 없으니 입체적 사고는 무망하다. 이런 지식의 축적이 무슨 의미와 가치를 가지겠는가. 입체적 사고를 통해서 바라보면 그 내용과 속뜻이 달라진다. 수많은 평면적 지식들을 입체화하기만 해도 우리가 지닌 지적 자산의 부가가치 확대의 가능성은 커진다. 거기에 새롭게 제공되는 ‘혁명적인’ 기술과 정보의 장착은 그것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것이 입체적 사고의 ‘기본’

사실 그간 우리는 입체적 사고에 익숙지 않아서 답이 정해진 것을 학습하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여러 용도로 쓰는 데 급급했다. 그런 일은 역사의식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하나 보자. 사적 1호 ‘포석정(鮑石亭)’이다. 우리는 포석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임금이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곳이라고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포석정이라는데 ‘정자’에는 관심도 없고 술잔을 돌리던 유상곡수(流觴曲水)만 연상한다. 얼핏 이 같은 연상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삼국유사> ‘경애왕편’에 이와 관련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사실(史實)이며 팩트(事實)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과 물음이 빠졌다. 식민지 시절의 영향이 크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이 자기네 의도에 따라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하고 위에 언급한 부분만 강조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임금이라는 자가 음주가무에만 빠져 나라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내세우며 조선인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정자가 없는데도 ‘포석정지(址)’가 아니라 ‘포석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정자는 ‘쉬고 노는 곳’이니 말이다.(다행히 최근 경주에 가면 ‘포석정 터’라고 바뀐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음주가무를 떠올리게 됐다.

그런데 정말 경애왕은 그랬을까? 물론 국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가서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전쟁은 추수가 끝난 뒤 하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삼국유사> ‘경애왕편’ 전체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와 전쟁을 시작한 게 9월이고 경주에 입성한 게 11월이다. 당연히 음력이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에 전쟁을 시작해서 12월에 경주가 함락당한 것이다. 아무리 음주가무를 즐겼다 해도 어떤 왕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놀이에 빠졌겠는가.

실은 그곳에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 문노(文努, 537∼606)라는 화랑을 모신 사당이다. 임금이 그 사당을 매년 수차례 찾아 제를 지냈다. 대신들과 동행해 원로들을 그곳에서 만나 함께 제를 지내고 환담도 나눴다. 그를 위해 지은 정자가 포석정이고, 작은 물길을 만든 게 유상곡수다. 당시 신라는 후백제 적병이 수도를 공격하는데 쇠락해 이겨낼 힘도 없고, 원병이 오기도 전에 적을 마주하고 있었다. 임금이 그런 상황에서 포석사를 간 것은 문노에게 제를 지내며 간절하게 청원을 하는 동시에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포석사에 가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백성들이 포석사의 문노 화랑을 떠올릴 것이며 그 화랑정신을 기억해 결사항전으로 수도를 지켜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끝내 견훤의 군대에 도성은 함락되고 경애왕은 사로잡혔다.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주어진 답만 따랐다. 그 답이 매우 고약한 의도로 왜곡된 식민사관의 찌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적 1호였던 포석정이 해방 후 사적 1호로 그대로 자리 잡은 건 그런 식민사관이 익숙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라고 무조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이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묻고, 따지고, 캐면서 여러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그 본 모습과 의미가 비로소 보인다. 주체적으로 묻고 그것의 진실을 캐내는 것도 입체적 사고의 방식이다. 이렇게 입체적 사고의 층위는 다양한 분야에서 부지기수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걸 외면한다.



집단지성의 체계화

지식의 입체화와 더불어 ‘집단지성’의 체계화는 그 자산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해 얻게 된 지적 능력의 결과로 ‘집단적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하고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정작 그 집단지성의 실천적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는다. 집단지성이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지만 여럿이 모여 머리를 맞대면 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연 어떻게 집단지성을 활용해야 할까.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피아노로 곡을 들려주면 선율과 박자를 속으로 따라 하면서 익힌 뒤 한 소절씩 따라 부르고 두 소절 네 소절 이어가면서 곡 전체를 따라 부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뒤에 어김없이 ‘분단별’로 시킨다.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가 합창할 때는 어렵지 않게 ‘립싱크’를 하곤 한다. 대충 입만 벌려도 별문제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단별로 시키면 립싱크를 할 수 없다. 분단별로 노래 부르는 건 일종의 ‘발표 체험’이다. 청중은 누구인가? 바로 ‘내 친구들’이다. 그게 연대의 시작이다. 자기 분단이 부를 때는 긴장해서 부른다. 청중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다른 분단의 학생들은 어떤가? 그들은 ‘감상 체험’을 한다. 그냥 부를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다른 분단이 부르는 것을 들을 때는 어떤 소절에서 음이 틀리고 박자가 어긋나는지 의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전에 내가 불렀던 노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경험이 된다. 그렇게 한 분단씩 이어가면서 각 분단의 노래는 ‘진화’한다.

이게 바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집단지성이고 연대의 힘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은 이러한 학습 과정과 사회성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다. 21세기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과정은 여전히 ‘개별적 성취’를 요구하고 평가하며 보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집단지성의 힘을 거세당하며 성장했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방식에 눈을 떠야 한다. 미래 일자리의 관점 등으로만 제4차 산업혁명을 바라볼 게 아니다. 진정 새로운 산업혁명이 요구하고 생산하며 유통하게 될 미래 가치를 증대시키려면 기본적으로 학교의 학습 방식부터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집단지성으로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연대’에 대해 보다 깊이 성찰해야 한다. 연대는 크게 삶의 연대와 앎의 연대로 나눌 수 있다. 삶의 연대는 부당한 독점과 억압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며 공공선과 인격성에 대한 확신과 그 신장이 거의 유일한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연대는 바로 집단지성이다. 집단지성과 입체적 사고가 결합했을 때 우리에게 대안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연대로서의 집단지성은 과연 어떠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 다음의 사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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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은 만화다. 만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은 낮고 박하다. 왜 만화를 낮게 평가할까? 아무래도 흥미 위주의 시각 정보 습득의 습관이 길러지면 문자 정보에 대해 따분하거나, 어렵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화가 주는 정보의 양은 아주 미미한 까닭이다. 명색이 ‘학습 만화’인데 그 정보의 내용이라는 게 고작해야 ‘이치’ ‘모순’ ‘건강’의 의미와 한자어뿐이다.

만화는 사실 ‘선택과 집중’이다. 가장 단순한 선 몇 개로 캐릭터화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미분(微分)’이다. 이번에는 만화의 한 컷을 ‘적분(積分)’해 보자. 만화 첫 장면의 빈 곳에 그림을 채워보라. 어떤 사람은 책장을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창문을 그린다. 어떤 아이는 책상 위에 먹을 것을 그리거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그리기도 한다.

또 다른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 그림들의 칸 아래에 ‘빨간 점’을 하나 찍어보자. 5쪽마다 일정한 지점에 점을 찍는다. 그리고 책머리 일러두기에서 ‘빨간 점이 있는 곳에서 잠깐 멈춰서 그 칸 사이에 들어갈 그림을 상상해보세요’라고 써둔다. 아이들은 만화의 흥미에 빠져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한 50쪽쯤 지나 어느 정도 만화에 익숙해지면 그 빨간 점이 보이게 될 것이고 잠시 멈춰서 상상해볼 것이다. 바로 그 ‘점 하나’만으로도 20세기 만화와 21세기 만화가 달라질 수 있다.

만화의 ‘물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 하나 찍은 것만으로도 만화가 줄 수 있는 사고의 전환과 진화의 힘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면서 여전히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혁명적 진화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 지식을 입체화하고 집단지성화하는 식으로 재구성만 해도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질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80∼90%는 아이들이 40대가 되면 쓸모없는 지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학교는 여전히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에만 치중한다. 확정적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불확정적인 지식에 대한 탐구와 합리적 의심, 그리고 답의 모색 등이 미래 지식의 방식이다. 물론 거기에는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유도하고 자극하는 것이 미래의 교육이다.



기술과 지식의 혁명보다 의식의 혁명이 우선이다

집단지성에 대한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요즘 글쓰기에 관한 책과 강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기능주의적 교육에 익숙한 까닭인지 글쓰기에 관한 책이나 강좌도 그런 성향이 농후한 게 사실이다. ‘첫 장이 중요하다’며 톨스토이가 쓴 <안네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등을 거론한다. 혹은 유명한 연설문의 첫 문장들도 사례로 든다. 그리고 글을 논리적으로 써야 한다거나 가급적이면 두괄식의 구성이 유리하고 이해를 돕는 사례도 전체 분량의 15%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지침을 제시한다. 그런 방식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여전히 기능주의적 색채와 태도가 씻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자 글을 쓰면 평가하고 첨삭하는 피드백을 수행한다.

생각을 바꿔보자. 그런 기능주의적 습속을 버려야 창조적 방식이 얻어질 수 있다. 일단 20명이 모였다 치자. 처음부터 책상에 앉아 종이를 내놓고 글을 쓰지 않도록 하자. 차 한 잔 마시면서 담소를 즐긴다. 그런 뒤에 밖으로 나가 ‘등속도로 주변을 걷기’를 수행한다. 말하지 않으면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정한 템포로 걷는다. 그리고 돌아와서 잠시 숨을 고른 뒤에 ‘그 길’에 대해서 글을 써본다. 아까 걸을 때는 딱히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큰 관심을 두고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길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는 요청을 받자마자 그 길에 대해 다시 돌아본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봤던 ‘시멘트를 뚫고 나온 노란 민들레꽃’이 떠오른다. 그걸 ‘소재’로 글을 쓴다 치자. 이것이 직관의 과정이다. 직관이란 사유 혹은 추리와 대립되는 인식능력이나 작용이다. 사유가 반성과 분석을 통해 사태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 반해 직관은 순간 속에서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분석처럼 명확하지는 못하지만 직관은 자아와 사상의 일치를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직관은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사실은 내가 아는 모든 ‘시멘트’와 ‘민들레꽃’에 대한 모든 인식과 느낌이 압축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 그 대상에 닿는 것이다. 어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뇌가 소비하는 전류가 대략 28와트 정도 된다고 한다. 반면 슈퍼컴퓨터나 AI가 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순간 약 3000와트에 가까운 전료를 사용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각자 쓴 글을 읽어 보자. 다른 이가 쓴 글을 ‘들으며’ 그 소재와 내용, 그리고 그의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는 뇌전류는 대략 20와트쯤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무 명의 글을 모두 합하면 대략 400와트의 전류를 소비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계는 매번 3000와트를 사용해야 하므로 모두 합치면 6만 와트나 돼야 한다. 그게 바로 집단지성의 힘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 글을 쓰고 다른 이의 글을 들은 뒤에 다시 그 길로 나선다. 그러면 아까 눈길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거나 직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다양한 관심과 관찰, 새로운 직관으로 이어진다.

4차 산업혁명이나 집단지성, 입체적 사고 등에 대해 총론적 의제 설정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러한 명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정작 각론으로 들어가 구체적 대안과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감과 아이디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의 그것들이 아니라 집단지성화됐을 때 증폭된다. 우리의 기존의 지식과 정보만 입체화하고 집단지성으로 만들어도 콘텐츠 파워를 증폭시킬 수 있다. 거기에 지금의 혁명이 만들어낼 결과물을 결합했을 때 미래 가치가 창출된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호들갑 떨 것도 아니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뀌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혁명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paulkim59@hanmail.net

필자는 서강대 영문과와 같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25년 동안 대학에서 ‘인간학’을 가르치다 자유롭게 읽고 쓰는 세 번째 삶을 위해 대학을 떠나 4년 동안 충남 서산의 해미에 작업실 수연재(樹然齋)를 마련하고 마음껏 글을 썼다. 최근에 파주출판단지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시대 정신과 미래 의제에 대한 탐구와 성찰로 생각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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