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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인생론

배우는 과정에서의 성취가 행복, 생각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라

김형철 | 205호 (2016년 7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철학은 콘셉트를 디자인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정교화하고 엄밀하게 다루는 작업을 한다.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혜는 반드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어제 한 일을 오늘 반복하고, 전임자가 한 일을 생각 없이 따라 하기만 해서는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뒤처지고 말 것이다. 소크라테스가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특히 삶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평생 학습하는 삶과 이 과정에서의성취가 행복을 가져온다고 했다. ‘소유는 행복과 무관하다. 니체는어린아이의 단계가 지혜로운 삶의 단계라고 말했다. 과거를 잊기 위해서는 교훈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도 했다. 한 개인이 고칠 수 있는 건자기 자신뿐이기에 자신에게 명령하고 실행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삶의 완성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도사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자를 부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질문 하나를 하겠다. 그 질문에라고 답하면 너의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치겠다. ‘아니요라고 답하면 역시 몽둥이로 후려치겠다. 아무 답변을 하지 않으면 역시 몽둥이로 후려치겠다.” , 이 도사는 왜 이런 식으로 제자에게 말했을까?

 

선문답에는 정답이 없다. 그냥 질문만 있을 뿐이다. 추정을 해본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 제자는 이제 도사로부터 몽둥이를 맞을 것을 피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죽음이다.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덤덤하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사 모든 악행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한 말이다. 무슨 뜻일까? 자살사이트처럼 각종 자살방법을 가르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깨우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깨우친다는 것은 자신의행동을 바꾸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해골바가지 물을 마신 원효처럼! 깨우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쳐다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의 윤회에서 벗어나고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해탈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에 죽는 것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라서 두려운 것이라면 왜 탄생 이전에 없었던 상태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인가? 탄생 이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말이다. 사실 삶을 가장 잘 이해하는 데 죽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것은 없다. 항상 어떤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그 반대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철학자들의 질문과 사유, 그리고 그들 나름의 결론을 통해 리더십과 우리의’, 그 자체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철학에서 배우는 리더십

 

1) 비전을 제시하라. 플라톤

플라톤은 자신의 위대한 소크라테스를 억울한 모함을 씌워서 사형에 처한 아테네 시민들이 말하는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인왕의 지혜가 보여준다. 국가는 철인왕, 전사계급, 노동자계급으로 구성된다. 각 존재자는 지혜, 용기, 근면의 덕목을 갖고 있다. 정의는 이 모든 덕목이 종합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즉 각자가 자신의 몫을 해낼 때 이상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플라톤이 제시하는동굴의 우화. 많은 독자들이 고등학교 과정에서, 혹은 대학 교양 수업 등에서 접해봤을 만한 내용이다.

 

죄수들이 동굴에 갇혀 있다. 온 몸에 쇠사슬이 묶여 있다. 등 뒤에는 횃불이 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거라곤 벽면에 어른거리는 자신들의 모습, 그림자밖에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림자가 존재하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죄수의 생각은 달랐다. “저 밖에 나가면 실제 세상이 존재할지도 몰라!” 틈을 봐서 탈출에 성공한다. 바깥세상에 나가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눈부신 태양에 그만 눈이 거의 멀 지경이다.

 

, 이제 이 죄수는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혼자 그 진리의 세상, 객관적 실재(實在)의 세상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둘째, 다시 동굴로 돌아가서 동료죄수들을 설득해서 같이 탈출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 죄수는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 동료죄수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한다. “여보게들, 저 바깥세상에는 태양이 있고, 식물, 동물들이 있네! 저 실재의 세상으로 다 같이 나가세!” 동료들은 비웃는다. 동공이 작아져 동굴 안의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비틀거리면서 설득하려는 모습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설정한 캐릭터는 바로 철인왕(philosopers king)이다. 이제 역사에서 실제 있었던 일로 넘어가보자. 한 사람이 스페인 여왕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신대륙을 발견하러 간다고 거금을 투자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선장이 제시하는 프로젝트는 벌써 19년째 스폰서를 찾아 헤매고 있는 상태다. 여러분이 스페인 여왕이라면 여기저기서 퇴짜 놓은 이 프로젝트에 투자할 건가? 결국 투자유치에 성공한 선장은 항해에 나선다. 사실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고 일부는 이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실천에 옮긴 최초의 인물은 이 괴짜 탐험가 콜럼버스뿐이다.

 

하지만 배가 가도 가도 신대륙은 나타나지 않는다. 초조해진 선원들이 선상반란을 일으킨다. “지금 당장 배를 돌리지 않으면 죽이겠다!” 이 협박에 콜럼버스는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선장실로 돌아와서 속삭인다.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길인데….’ 이틀 뒤 기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은 나타난다. 그 뒤 투자결정을 내린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콜럼버스는 돈방석에 앉는다.

 

조직의 리더도 이와 같은 처지가 아닐까 한다. 플라톤의동굴의 우화에서처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콜럼버스처럼 자신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같이 가자고 해야 한다. 이데아의 세계를 비전으로 삼아 죄수들을 설득해야 하는 그 철인왕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조직원들은그런 건 안 된다’ ‘불가능하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얘기할 수 있다. 조직의 리더, 기업의 리더, 글로벌 경쟁의실재를 보고혁신의 아메리카 대륙을 믿는 CEO는 플라톤의 철인왕처럼, 미치광이 소리를 듣던 콜럼버스처럼 사는 게 숙명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한다.

 

 

2) 생각을 생각하라. 데카르트

많은 사람들이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산다. 그러나 답을 찾은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답을 찾겠다고 던지는 질문이 아니기도 하다. 물어보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질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찾기를 원했다. 확실한 것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해 나가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이 원대한 사유의 프로젝트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을까?

 

데카르트는 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악마를 상정한다. 내가 지금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마가 나로 하여금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고 있다고 가정한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가짜다. 이 세상은 불과 5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나는 속아서 수억 년 전부터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이번에는 이성적 판단조차 악마에 의해서 속고 있다고 의심한다. 1+1은 원래 3인데 2라고 믿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각형은 모서리가 원래 5개인데 4개라고 악마가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의심해보기 시작하니 실제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데카르트는 발견한다. 그게 뭘까? 바로내가 현재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적 진리가 된다. 적어도 의심하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의심한다는 사실은 의심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의심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절대적 진리다. 그런데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꾼 그 유명한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데카르트의 천재성은 악마가 요구한 모든 것을 인정해줌으로써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끝에 반전을 이루어내는 거다. 마치 유도 선수가 상대방이 공격하는 힘을 이용해서 한 판 승을 낚아채듯이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다. 조직에서 어떤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데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반대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악마의 변론(Devil's advocate)’을 사용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를 실제로 활용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나라에서는 외국에 대사를 파견할 때 반드시 부대사 한 명을 같이 보낸다. 그 부대사의 임무는 간단하다. 대사가 주요한 사안에 결재를 하기 전에 반드시 3가지 반대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사는 그 3가지 부정적 이유에 대한 논박을 해야만 결재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미국의 어떤 회사에 있는 회장은 회사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초안 형식으로 전 직원들에게 보낸다. 그리고는 반드시 한 가지씩 반대하는 의견을 써내라고 한다. 명령을 받고 나면 다들 써낸다. 이를 토대로 수정을 한다. 이것을 두세 번 반복하면 더 이상이 반론이 나오기도 힘들다. 그러면 실행에 들어간다. 그 이후에 불평하면 단호하게 대처한다. 이것이 바로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기(agree to disagreee)’ 정신이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에 대한 이해가 갖춰져 있는 리더는 성숙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반면 자신의 입장 외에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의 길을 향해서 전력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의 최고실권자가 직접 챙기는 프로젝트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 그럴까? 아무도 반대하는 입장에 서질 않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만장일치가 일어나면 그 결정은 무효화하는 게 낫다. 확실한 것을 얻으려면 불확실한 것을 스스로 끌어들여야 한다. 제품이 시장에 나가고 나서 실패하는 것보다 내부에서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이 더 낫다. 반대를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라!

 

3) 엄격하게 평가하라. 한비자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을이기적이라고 보는 성악설의 입장에 서 있는 순자의 제자다. 왕이 국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덕이 아니라 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법가의 대표주자다. 왕은 법을 만들 수 있지만 자신도 예외 없이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당근과 채찍을 같이 사용해야 하지만 채찍이 더욱 중요하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국가경영의 기본 철학이다.

 

사람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정당하게 보상해줄 때 조직의 기강이 선다. 사람은 의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게 돼 있다. 한 왕에게는 의복과 모자를 각각 관리하는 2명의 시종이 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보니 모자가 가지런하지 못하게 놓여 있다. 진상을 조사해보니 모자 시종이 모친이 불편해서 좀 일찍 퇴근하면서 의복 시종에게 자신의 일을 부탁하고 간 것이다. 그런데 그 업무를 제대로 못해 놓은 것을 임금님이 알아차렸다. 여러분이 임금이라면 어떤 조치를 내렸겠는가?

 

모친의 병환으로 조퇴한 것이므로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고, 동료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것이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한비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릴 것을 권한다. , 모자 담당은 사전 허가 없이 무단 조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의복 담당도 남의 일까지 허락 없이 월권한 것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엄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문제를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면 그 후부터는 업무영역에 대한 구분이 상실되고 만다. 서로 일을 떠넘기고 급기야는 그것이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부패현상들이 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것 아닌가!

 

최신 경영이론, 특히 Y이론에 기초한 학설에서는 리더에게 위임할 것을 권한다. 그것도 과감하게 위임할 것을 추천한다. 그런데 왜 위임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왜 하나부터 열까지 사전에 허가받고, 사후에 보고하는 것일까? 위임의 단계는 이렇다. 사전 허가를 받으면 결과를 굳이 묻지 않으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신뢰가 쌓이면 사전 허가가 생략되고 결과만 보고한다. 그런 다음에는 사전 허가도, 사후 보고도 생략된다. 그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이런 단계까지 올라가면 효율성은 점점 증가하게 돼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인간은 원래가 이기적 동물이다. 자율적으로 하라고 내버려 두면 딴 잇속을 챙길 확률도 있다. 위임했다가도 다시 그 권한을 회수하는 것은 바로 월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하에게 일을 위임할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What to do’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일러줘야 한다.

 

매일매일 학습할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은퇴 후 삼십 년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해야 할 일만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될 일에 대해서도 반드시 말해둬야 한다. ‘don't’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 바람에 월권이 일어난다. 월권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위임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How to do’에 대해서는 교육훈련이 끝나고 난 뒤에는 본인에게 맡겨야 한다. 이제 인간의 본성을 이용한 권한 위임과 성과 향상의 방법에 대해 실제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런던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냈다. 그런데 1000명을 배에 태우면 100명만 살아서 도착한다. 900명은 배를 타고 가는 도중 굶어 죽고, 매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싸우다 죽는다. 런던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들이 아무리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특단의 조치 하나를 취한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1000명을 태우면 900명이 살아서 도착한다. 무슨 조치를 취했을까? 이 전에는 몇 명을 태우느냐에 따라서 운임을 지급하다가 이후에는 몇 명이 살아서 도착하느냐에 따라서 운임을 지급했다. 선불제에서 후불제로 바꾼 것이다. 죄수가 고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다음은 공산당 치하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더운 여름날 택시기사들이 그늘에서 다 쉬고 있다. 완전월급제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다 들고 일어난다. “택시를 구경하게 해주시오!” 정부가 특단의 조치 하나를 취한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부터 시 교외 고속도로상에서 손님을 태우지 않은 빈 택시들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장면들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정부가주행거리에 따라서 월급을 차등 지급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손님이 필요 없어진 거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인센티브는 사람을 움직이는 데 대단히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러나 인센티브는 쓸려면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는 인센티브를 사용할 때 그 반대쪽 끝에 고객만족이 연결돼 있는지를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 이 연결이 끊어져 있으면 빈 택시만 요란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시 한비자로 돌아와서 그가 직접 제시하는 우화 하나를 보자. 어떤 마부가나는 이제 채찍 없이 당근만으로 말을 몰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얼마 후 그 마부는 버렸던 채찍을 다시 집어 든다. 왜 그랬을까? 당근을 말 앞에 대롱대롱 달아 놨더니 과연 예상한 대로 명령과 조종에 잘 따른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갑자기 마부는 통제를 상실한다. 바로 당근 밭을 지나가는 중에는 도무지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천에 널려 있는 당근을 먹느라 이 말이 마음대로 가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채찍을 다시 들고 만다. 한비자의마부와 채찍우화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외적 보상, 금전적 보상이 우리에게 동기부여하는 것의 한계다. 외적 보상은 일정한 레벨까지만 그 효과를 가진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 자부심은 금전적 보상으로만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부정적 피드백도 가끔은 반드시 필요하다. 채찍을 무조건 버리지 말라! 리더는 큰 칼을 항상 차고 다녀야 한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그 칼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 쓰면 안 쓸수록 위대한 리더다. 그저 칼집에서 가끔씩 빼서 그 칼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날카로운지만 슬쩍 보여주면 된다. 권력은 배터리와 같아서 사용하면 할수록 방전되기 마련이다.

 

맹자는 성선설이고, 순자는 성악설이다. 한비자는 성악설을 따라서 리더가 추상같이 부하들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벌백계만이 공정한 리더가 취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벌백계를 주장하는 한비자, 상앙, 신불해 등 법가들은 결국 극형에 처해져서 죽고 만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비자도 친구인 이사의 모함을 받아 진시황의 사약을 먹고 죽고 만다. 한비자의 말은 그대로 따를 것은 아니나 중요한 교훈을 간직해야 한다. 리더에게는 꼭 필요한 조언들이 그의 철학과 사상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 그리고 인생론

 

1) 평생 학습하는 삶, 그리고 행복.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다. 플라톤이 이상세계, 이데아를 초월적 실체로 인정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현실 참여를 중시하는 철학자였다. 이데아가 저 편 세계에 뚝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은 4가지 원인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한다. 바로 목적인, 형상인, 질료인, 작동인이 그것이다.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해보자. 목적인은 집을 짓는 설계도면에 해당된다. 주택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기 위한 목적에 걸맞게 설계돼야 할 것이다. 형상인은 방, 창문, 복도 등이 그 각각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질료인은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를 의미한다. 작동인은 재료를 활용해서 집을 만들어가는 목수의 활동을 총칭한다.

 

권력, 명예, ,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은 사람이 있었다. 막상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나자 갑자기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도사를 찾아가 물었다. “도사님,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도사가 해준 한마디는한평생 배우러 왔다 간다였다. 인생의 목적이 배움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허무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배운다라고 하는 것은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쳐다볼 줄 아는 눈, 그 눈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우고 나면 세상이 새로워 보이는 이유다. 이것이 바로 옛 어른들께서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운다라고 말씀하신 메시지의 핵심이다.

 

혹시 은퇴 후 삼십 년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일 목표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십니까? 내일 아침부터는 이 일일 목표를 꼭 가지고 나오세요! ‘오늘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매일매일 학습할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은퇴 후 삼십 년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루하루를 늘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일일 목표다.

 

“인간은 배우기를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라는 책 첫머리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자신의 자아실현을 성취할 때 찾아온다. 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행복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원한다는 말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반면에바란다는 말은 그것을 가지고는 싶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실현은 원하는 것이어야 하고, 복권당첨은 바라기만 할 뿐이다. 둘째,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성취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소유, 소비와 동일시한다.

 

이는 착각이다. 백만장자는 과연 행복할까?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게 하나 있다. 뭘까? 바로 그 부를 지키는 것이다. 이 생각만 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많이 소유하고 적게 성취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고, 조금 소유하고 크게 성취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하고, 성공하면 행복하다.” 이 등식이 성립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성공 공식은 그 유효기간이 딱새마을운동까지였다.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새로운 행복등식은 이렇다. “행복하면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일하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온다.”

 

2) 자신에게 명령하는 삶,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니체

니체는 이 세상에는 절대적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말하는 보편적 관점, 이데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점주의(perspectivism)이자 극단적 상대주의다. 니체는 또한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인간 스스로 믿지 않으니 바로 인간들이 신을 죽인 것이다.

 

유럽에 있는 성당에 가면 신도가 더 많은가? 아니면 관광객들이 더 많은가? 성당과 교회가 영혼의 구원을 간절히 비는 곳이 아니라 관광기념 포토존으로 변했을 때, 이미 신은 죽은 것이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강인한 삶을 찬양한다. 영웅들을 그리며 말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삶에 대한 긍정적 찬양은 바로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우리 자신을 극복하는 데서 나온다.

 

자신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인간정신 발달에는 3단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낙타의 단계. 낙타는 참을성이 많고 복종을 잘하기 때문에 더운 사막에서 주인이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워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묵묵히 앞에 가는 낙타의 뒤를 따라가기만 한다. 힘이 없고 소심하기 때문에 주인에게 대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막에서 낙오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낙타의 마음속에는르상티망’, 우리말로원한감정이 쌓여 간다. 한마디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둘째는사자의 단계. 사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면 주인에게도 달려들 정도로 용맹하고 사납다. 문제는 늘 혼자 불안하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같이 어울려서 일을 추구하기가 힘들다. 인간이 사자와 달리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서로 협동하는윈윈 시스템을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같이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혼자 똑똑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의 세 번째 단계는 어떤 동물이 차지했을까? 이게 좀 의외다. 바로 어린아이다. 왜 그럴까? 어린아이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잘 잊어버린다. 둘째, 항상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긴다. 어린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자. 조금 전까지 싸우던 친구 하고도 금방 웃으면서 또 같이 놀고 있다. 장난감을 놓고 싸울 때는 평생 원수가 될 것 같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손잡고 논다. 그게 바로 애들이다. 지혜로운 사람 역시 뭐든지 마음에 꽁하고 담아 두질 않는다.

 

이러한 니체의 논의를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과거의 성공도, 실패도 싹 잊어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다. 교훈을 얻기 전에 우리는 과거를 잊지 못한다. 교훈을 얻는 방법은 참 단순하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다.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 이렇게 하고 나면 비로소 과거를 향한 시선이 현재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현재를 진정으로 즐기게 된다. 바로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낫다는 공자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까? 좀 세속적인 방법이지만 한 번만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이 일을 돈 안 받고도 할 것인가?” 그 대답이 만약에나는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라면 사실 이 일을 즐기지 않는 것이다. 마지못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돈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생에는르상티망이 쌓여만 가는 있는 중이다.

 

니체의 교훈을 한마디로 다시 정리하면자신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돼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남의 명령을 듣고 살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기

 

2500년 전, 델포이신전에 이렇게 써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지혜를 추구하려고 하는 자세가 바로 지혜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모르면서 질문하지 않는 것은 죄가 성립한다. ‘아는 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절대적 진리를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론으로 산파술, 즉 질문과 답변이라는 방식을 택한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그들이 사실은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끼를 빌려 준 사람이 돌려 달라고 왔다. 당신은 돌려주는 것이 옳은가? 물론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데 도끼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그 도끼를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돌려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당연한 듯 성급하게 대답한 소피스트들은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질문을 계속해 나간다. 사실 정의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질문도 던진다.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하는가? 신이 명령하기 때문에 옳은 것인가?” 전자라고 답할 때, 신은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옳고 그름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선지자 정도로 그 위상이 격하된다. 반면에 후자라고 답할 때 만약에 신이 도둑질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는 시키는 대로 도둑질도 해야 하는가? 이런 난처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전략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배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메타 인지 능력이 있다. 컴퓨터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하드디스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검색해봐야모른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철학은 콘셉트를 디자인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정교화하고 엄밀하게 다루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혜는 반드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어제 한 일 오늘 반복하고, 전임자가 한 일을 생각 없이 따라 하기만 해서는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뒤처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찰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플라톤과 한비자, 데카르트의 철학을 통해 살펴본 훌륭한 리더의 덕목도 본인이 그걸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의 교훈과 조언도 스스로의 삶 속에서 행하지 않으면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kimchy1@yonsei.ac.kr

 

필자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볼링그린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시키고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경련 윤리경영 자문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현재 한국기업경영종합연구원 자문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 철학자 대회 상임위원이자 한국철학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주로 윤리학 이론과 기업윤리, 생명 의료 윤리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저서로는 <한국사회의 도덕개혁> <도덕사유> <철학의 힘: 만족 없는 삶에 던지는 21가지 질문> 등이 있다.

 

One Point Lesson

 

1. 조직의 누군가가 독특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들어보라. 그가 플라톤이 말하는철인왕과 같은 현자일 수 있다.

2. 행복은성공과 등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성공하고, 성공하면 행복하다는 말은 새마을운동 시대에 통하던 개념이다.

3. 인생에서든, 기업에서든 학습만 하고 실천, 혹은 실행을 하지 않는다면 의미, 혹은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4. 쓸모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를 파악하라. 사람이든, 아이디어든, 삶에서의 한 부분이든.

 

 

DBR mini box

 

 

굽은 나무가 오래가고, 쓸모없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중국 철학자 장자는 극단적 상대주의자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절대자유를 동경한다. 그가 보기에 유가는 세상을 점점 복잡하게 만들어 놓을 뿐이다. 자신의 입장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유가는 세상에 법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 있는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생각은 유연하게 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 보면 하나로 획일화되지만 그것은 어느새 상대방을 옥죄기 마련이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비극이 벌어진다. 모두를 모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런 인생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의 사상에서 인생, 경영, 그리고 바람직한 조직문화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선 네 그루 나무의 비유부터 알아보자. 옛날에 나무들 네 그루가 모여서 살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들어보니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내고 있다. 첫 번째 나무가나는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들이 나를 좋아하지라고 자랑한다. 두 번째 나무가 이어서나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하지라고 으쓱인다. 세 번째 나무가나는 아주 향기롭고 예쁜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나를 아주 사랑하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말하던 나무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둘 베어져 나간다. 한편 구석에서 쳐 박혀 있던 네 번째 나무는 구불구불 자라고 껍질도 딱딱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결국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네 번째 나무만 덩그렇게 남는다. 더운 여름이 되자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모여서 그늘이 시원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500여 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에 나오는 無用之用(무용지용),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왜 장자는 무용지용을 말했을까? 아니 도대체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아,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걸까?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진다. “이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다 쓸 사람 있으면 가져다 쓰세요라고 공고한다. 이때 성경책 북 마크용 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이를 가져다 쓴다. 접착력이 떨어지는 쓸모없는 접착제를 가져다가 사용하니 이제 떼었다 붙였다가 계속 반복된다.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첫 번째 사례는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3M의 포스트잇 이야기다.

 

필자는 사실 이 사례를 생각할 때마다 두 번째 연구원의 기지보다도 첫 번째 연구원의 행동에 더 초점을 둔다. 첫 번째 연구원이 자신의 실패작을 다른 연구원과 공유하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포스트잇은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M에서는 그 첫 번째 연구원에게 특허료의 일부를 지급했다. 그래야 실패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제 또 다른 실제 사례를 하나 알아보자.

 

양초회사 사장이 있었다. 토마스 에디슨이 전구를 개발하자 사람들이 더 이상 양초를 찾지 않는다. 매출이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고 만다. 하루는 위기에 처한 회사 공장을 시찰하던 사장님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한 직원이 점심 먹으러 가면서 공기 주입기를 꺼놓고 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양초에 쓸모없는 공기가 계속 주입되고 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사장님은 무릎을 치면서그래 바로 저거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 날 전 직원을 불러 놓고오늘부터 우리 회사는 비누 회사입니다라고 선언한다. 그 당시 부인네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지면 강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러면 그 비누를 찾지 못해서 쩔쩔 매는 것을 잘 보아뒀다. 혁신은 이처럼 관찰에서 출발한다. 비누에 쓸모없는 공기를 주입하자 물에 뜨는 비누가 나온다. 대박이 터진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두 번째 사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P&G의 아이보리 비누의 탄생 스토리다. 이제 일본으로 건너가보자.

 

 

 일본에 한 소시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장이 하루는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부러진 소시지가 나오는 것을 본다. 물어보니 부러진 소시지는 재가공해서 쓰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사장이 말한다. “그래, 지금부터는 부러진 채로 포장해서 정가의 70%에 시장에 내 놓게때마침 불황이 닥친다. 주부들이 마트에 갔다가 부러진 소시지를 본다.

 

주부들은뱃속에 들어가서 부러지나, 부러진 거 먹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정가의 70%라니, 이건 사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멀쩡한 노트북에서 키보드를 빼버렸더니 패드가 되면서 잘 팔린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세 번째 케이스는 일본의하나마나 소시지얘기다.

 

다시 장자가 직접 얘기해주는 우화로 돌아와보자. 옛날에 한 마을에 빨래를 해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이 몇 군데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세탁소다. 그 중의 한 집은 다른 집과 달리 추운 한겨울에도 손님들이 줄서 있다. 추운 날씨에도 유독 이 집 사람들만은 트지 않은 멀쩡한 손으로 계속 빨래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주인장에게무슨 비법이 있는지묻는다. 알려주면 금 100냥을 주겠다고 하니 그 세탁소 주인장이 가족과 상의 후에 동동크림 같은 것을 하나 들고 나온다. 그는이 약을 바르면 추운 겨울에 물에 손을 담궈도 손이 트질 않는다며 크림 만드는 비법을 알려준다.

 

이 약 제조비법을 알게 된 나그네는 그 길로 임금님께 달려간다. “폐하, 지금이야말로 이웃나라 원수들을 쳐부술 절호의 찬스입니다.” 임금이 놀라며아니, 대감 그게 무슨 소리요. 이 엄동설한에 쳐들어 갔다간 병사들의 손이 다 터서 전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텐데"라고 되묻자 그는 세탁소 주인한테 배운 비법으로 만든 크림을 내놓았다. 그 대감은 왕으로부터 금 100만 냥을 하사 받는다. 장자 책에 나오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오리지널 케이스다. 용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만 더 살펴보자.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적절한 사이즈의 물병은 충분한 물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그 용도에 맞는 조롱박만을 잘 골라서 물병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엄청나게 큰 사이즈 조롱박만이 주렁주렁 열렸다. 그 큰 조롱박으로 물병을 만들 수는 없었다. 만들면 사람들이 무거워서 들고 다닐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을 담았더니 자꾸 깨진다.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그런 거다.

 

큰 조롱박을 헐값에 내다 팔아도 안 사간다. 담장 옆에다가 수북이 쌓아 놨다. 그런데 그 다음날, 쌓아 놓은 조롱박이 모두 사라졌다. 발자국을 따라 가보니 어떤 사람이 그걸 강가에 들고 가 허리춤에 뺑 둘러찬다. 부력을 잘 받아서 둥실 뜬다. 큰 조롱박은 안에 물을 담는 것이 어려웠지만 역발상으로 조롱박 바깥에다 물을 담을 수 있었다는 일화다.

 

이제 무용지용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사물의 쓸모 있고 없고는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도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자신의 적성을 모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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